본문) 렘 23:5-8, 요일 4:13-21, 마 1:18-25
오늘 구약의 말씀은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 쓰여 진 말씀입니다. 오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했던 예언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속된 불신앙과 타락에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징계로 유다는 멸망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패역과 불신앙을 일삼는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지만, 그렇게 이스라엘을 향한 희망을 끈을 끊지 않으시고 다윗의 후손 중에 의로운 자를 세워 그를 통해 다시 회복시킬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와 불신앙에 대해서 확실히 심판하시고 징계하시지만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회심을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에서 선악과를 범했던 아담과 하와를 동산 밖으로 추방하시면서도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심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로운 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이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과 은혜 아래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그저 ‘보라 날이 이르리니...’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죄로 인해 징계받고, 버림받았던 자들도 회복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의로운 자들은 칭찬받고 영광에 이를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 거룩한 믿음의 언약이 선포될 당시 남유다의 왕이 시드기야였다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드기야는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른 불신앙을 고집했던 왕이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하나님께 간구하고 의지하기 보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의 줄타기 외교를 통해 해결하려 했던 왕이었습니다. 시드기야가 통치하는 남왕국 유다의 본질은 예레미야의 멸망 선포를 피할 수 없는 현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타락하고, 불신앙이 넘쳐나는 이스라엘 족속을 향해 하나님은 의로운 왕을 보내어 회복할 것이다 약속하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최악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고 다시 의로운 왕을 통하여 회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은 불신앙의 세태를 따르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들에게는 분명한 소망과 확신을 심어주고, 죄로 인해 징계를 받는 자들에게는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아래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택한 족속,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은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마태복음의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던 의로운 왕이 이 땅에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은 가장 먼저 예수의 족보를 언급함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수많은 예언자들이 이미 언급했던 메시아이자, 다윗의 혈통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을 위해 예비된 메시아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과 섭리 안에서 태어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메시아의 부모를 선택하셨고, 그들은 순종함으로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당시 율법상 약혼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혼전에 아이를 갖는 것은 율법적으로 큰 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자칫 그 사실이 알려지면 요셉도, 마리아도 위험에 처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조용히 관계를 끊고자 했던 것은 마리아를 향한 마지막 배려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마리아에게 자신보다 더 좋은 남자가 생겨 아이까지 갖게 되었으니, 요셉은 마리아의 행복을 위해 조용히 포기하기를 선택했던 것이죠. 행여나 마리아에게 율법의 징계가 이르지 않도록 조심히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 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고, 요셉이 이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후 마리아의 임신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요셉은 출산에 이를 때까지 철저히 거리를 두고 극진히 보호하고 보살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성령께서 움직였고, 요셉과 마리아는 적극적인 순종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임으로 응답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의 몸에 아기를 잉태하게 만들었고, 그 아기를 통하여 이 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 마태복음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모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 그 하나님의 결정을 이 땅에 이루게 하려 역사하시는 성령님, 그 위대한 역사에 순전한 믿음으로 응답한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이 결합하여 탄생한 위대한 작품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서신서는 사랑이라 선언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 일서의 말씀은 영지주의로 대표되는 이단적 가르침과 교회 내부의 분열을 겪는 성도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은 당시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신비로운 영적 현상에만 몰두하고 있던 성도들을 향해 진정한 성령의 은혜와 역사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구체적인 사랑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부활을 통해 증명되고,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얻은 우리도, 그 사랑의 모범을 따라 초대교회 공동체 안의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신비로운 체험이나, 이적, 기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형제, 자매, 이웃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강력히 권면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와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대다수 성도들이 신비로운 영적 현상에만 집착하던 현실에 대해 지적하고 질책하며, 사도들의 잇다른 순교 이후 혼란스러웠던 교회를 결속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사랑으로 하나 되고, 사랑으로 증명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이 인간의 믿음과 결합될 때 나타나는 아름다운 결과물이라는 것이죠.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도우심에 응답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순종의 첫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었고, 두 번째 증거가 사랑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과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치 그 옛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였던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말씀에 맞춰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바꿔 우리의 이웃들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것이 사회적 편견과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응답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메시아 탄생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보다 수백년이나 앞선 약속이었습니다. 그 거룩한 희망의 약속은 수백년이라는 현실적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요셉과 마리아라는 믿음의 백성을 통하여 성취 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채 되지 않아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 배운 사랑을 교회 안에서 실천하여 또 다른 성취를 이루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무려 2천 년이 지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네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이느냐?’ 그럼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야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들의 기본적인 자세이며, 성령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은사이자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넷째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 오실 아기 예수를 생각하며,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여 서로 사랑함으로 경배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가장 귀한 선물은 황금도, 유향도, 몰약도 아닌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실천입니다. 소외되고 아픔 당한 우리 이웃을, 상처받고 어려움 겪는 우리 이웃을, 원치 않는 시험과 상처로 아파하는 이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매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고 나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가장 귀한 선물임을 오늘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넷째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기 예수의 충성스러운 경배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