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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2-1) - " 늘 깨어 사랑하자 " / 이영재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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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대림절(2-1) - " 늘 깨어 사랑하자 " / 이영재 목사

관리자 2018-12-07 (금) 14:01 5년전 2374  

본문) 하박국서 2장 1-4절 ; 로마서 13:8-14절 ; 마태복음서 25장 1-13절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 절기를 지키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하누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대림절을 또한 ‘강림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강림’이란 말은 영어 Advent를 번역한 용어인데 내려온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리는 절기인 동시에 또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누카’를 지키면서 촛불을 켭니다. 헬라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물리치고 유대가 독립하여 다윗왕국을 재건한 사건이 주전 165년에 있었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의 형제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유대왕국을 재건했던 것입니다. <하누카> 절기에는 이 역사적 독립사건을 기념하여 촛불을 켭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을 다시 찾았다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같은 뜻이 됩니다. 

 

세상은 어둠에 싸여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은 밝은 빛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뉴스를 보니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중 45%의 학생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그 어려운 경쟁을 뚫고 최고 명문대학에 입학했는데 학교를 다니다 보니 기뻐하고 즐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답답한 가슴에 우울증이 자라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 사회가 점점 양극화로 치닫고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나라들처럼 귀족층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현시점에서 젊은 엘리트 학생들에게 미래는 어둡고 절망스럽게 다가간다는 것입니다. 같은 대학교 안에서 미래가 이미 보장된 부유층 자녀들이 엄청난 재력을 뽐내며 그들끼리 클럽을 지워서 다니는 모습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서민의 자녀들에게 아픈 소외감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는 이미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래 5000년이나 지속되어온 현상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고통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죽어 갔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교훈서로서 작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알아야 모든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음을 성경은 누누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에 전능하십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니 얼마나 권능이 크시며 못하실 일이 없이 막강하시겠습니까?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진정한 권력자이십니다. 그 어마어마한 권력으로 주께서는 모든 생명에게 활기를 주시고 살리시며 모두가 잘 살도록 섬기십니다. 섬기는 권력자가 참된 통치자입니다. 이 분께서 바로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전능하시기에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창조주는 구원주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히브리인들이 애굽 도성에서 혹독한 노예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 주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애굽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분이 곧 야훼 하나님이십니다(출20:2). 히브리인을 구원하신 야훼께서는 온 세상에서 억압당하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셨습니다. 주님을 창조주와 구원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며 믿음이 생기면 모든 불안이 사라집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신 하나님 야훼는 또한 정의로우십니다. 정의롭지 않으면 그는 구원주가 될 수 없습니다. 정의로우시기에 사회의 불의를 심판하시며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의 폭력을 물리쳐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롭게 심판하심으로써 연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모든 폭력배 같은 권력자들을 벌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크게 흔들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현실의 세상에는 힘센 자들이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출세하며 권세를 유지합니다. 그들이 부를 누리고 떵떵 거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조리가 예언자 하박국의 중심에서 괴로움을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떻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을 바라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하박국의 문제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박국서를 인용하고 있는 책들이 여럿 있습니다. 누가의 사도행전(행13:41)과 바울의 로마서(롬1:17)와 갈라디아서(갈3:11), 그리고 히브리어서가 그것들입니다. 이 중에 히브리서는 두 군데나 인용하고 있습니다(히10:37-38; 11:1-12:2).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소위 ‘칭의론/의인론’을 가르쳤는데 이 때 하박국서 2장 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합2:4이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박국이 “믿음”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 뜻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믿음과 같은 개념인지 하박국서 자체로써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에무나>란 단어를 하박국은 사용했습니다. “의인은 자신의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라고 사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들을 비교해 보면 매우 다양하여 서로 다릅니다. 개정역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새번역은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공동역은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카톨릭역은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라고 각기 다르게 옮겼습니다. 히브리어 <에무나>를 “믿음”이라 하지 않고 “신실함” 내지는 “성실함”이라고도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 칠십인경은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산다”라고 또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의인이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칠십인경이 사용한 히브리어 원전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합2:4의 전반절은 반어적 평행구를 보입니다. “의인”의 반대말로서 “마음이 교만한 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우플라>라고 되어 있는데 의인을 가리키는 <차디크>에 대조되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우플라>는 ‘부풀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자기 자신을 한껏 부풀려서 크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라고 옮겼습니다. 공동역은 “멋대로 설치지 말아라”고 했고, 카톨릭역은 “뻔뻔스러운 자”라고 옮겼습니다. 자기 힘을 크게 떨치며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떵떵거리는 부류의 사람이 <우플라>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바르지 않다’고 주께서 판정하십니다. 이들은 폭력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합2:8, 하마스). 

 

의인은 이와는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고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남 보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의인은 그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빈민촌이 있으면 모른 척하지 않고 빈민들의 삶 속에 뛰어들어 함께 살면서 함께 더 나아지는 삶을 만들어 가려고 혼신의 힘을 노력합니다. 병자들이 있으면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치료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의사와 목회자는 이런 점에 동일합니다. 목회자는 신유의 은사를 구하여 의사들이 고치지 못하는 질병을 기도로서 고쳐보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연약한 자들 곁에서 그들에게 동반자의 손길을 펼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사랑의 종입니다.

 

하박국은 왜 하나님의 정의는 현실에서 실행되지 않고 있는지 의문을 가셨습니다. 이처럼 악하고 부패한 시대와 사회를 만들고 있는 악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는 왜 당장 시행되지 않는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기 위해서 하박국은 파수꾼이 근무하는 높은 “망대”<미쉬메레트>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창조주와 구원주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의심을 떨려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망루<미쉬메레트>는 밤을 새워 적군의 동향을 감시하는 자리입니다. 망대에서는 깜깜한 밤 중에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파수꾼처럼 깨어 밤을 새워야 합니다. 하박국은 망대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만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의인은 모름지기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귀족과 왕들은 반드시  벌을 주고 징계할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온다는 비전<하존>을 보여 주셨습니다. 갈대아 사람이란 바벨론 제국의 군대를 가리킵니다. 느갓네살이 군대를 끌로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왕국을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권세를 누리던 모든 오만한 자들이 무참히 살육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채찍이 되어 범죄한 유대 민족과 왕들을 벌하였습니다. 이 심판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박국은 종교적 세계관의 중심이 되는 문제에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 궁극적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서가 다루는 시대의 문제는 하박국서 1장 6절을 근거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합1:6). 갈대아사람들이 일어난 때는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6세기 초반에 해당되며 유대왕국은 597년과 586년 두 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멸망하였습니다. 이 갈대인들이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것을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민족주의나 애국적 국가주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악하게 사는 자는 민족과 국가나 인종이나 계급의 경계가 없이 모든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하박국의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인종주의나 계급갈등에 휩싸일 수가 없습니다. 악한 제국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리는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될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예언자와 하나님이 나누는 대화로 시작됩니다. 슬퍼하며 탄식하는 애가<아카>의 양식으로 하박국은 의문을 토로합니다. 예언자가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불평하자 하나님은 갈대아인을 통해서 벌하신다고 대답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박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다 더 큰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들어서 선민을 치시는 것이 옳으냐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일지라도 악행을 하면 더 큰 악인들에게 포력을 당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보편적 원리를 2장에서는 확답해 주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을 산다”는 선언이 이러한 맥락에서 더 잘 이해가 됩니다. 

 

마침내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창주주이시며 구원주이신 야훼께서 정의롭다는 진리를 깨우친 것입니다. 하박국이 깨달은 이 진리를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더욱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은 이러한 믿음의 내용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과 오만한 악인 사이의 차별성은 “탐욕” 내지는  “욕심”<에피투미아>을 처리하는 태도에서부터 근본을 달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악인은 탐욕을 채우려고 방탕하고 호사한 연회<코모이스>를 즐기며 폭력을 휘두릅니다. 

 

롬13:13의 헬라어 <코모이스>란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인생을 한탄하며 비극을 연출하며 술로 비통을 달래는 디오니소스의 축제를 가리킵니다. 악인의 잘 됨과 사회적 부조리를 한탄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표현합니다. 빛을 이기는 어둠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오니소스 축제와 같은 염세주의를 경계하고 금지했습니다. 오히려 믿는 의인은 모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사랑을 향해 살기로 결단하는 사림이 성도임을 바울은 천명합니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고 구원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깨달음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의 성도 중에 쯔쯔가무시라는 질병을 앓은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믿음으로 결단하고 온 가족을 데리고 전주 시 인근 완주군으로 귀농하였습니다. 농촌에서 다년 간 살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생명의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비전과 믿음에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가 치사율이 매우 높다는 쯔쯔가무시 병을 앓고 나서 신앙의 고백이 달라졌습니다.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지금까지 이웃을 위해 살지 못했던 과거를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귀농하여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며 생명의 일꾼으로 살아보려고 했건만 기실은 자가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지난 날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 것입니다. 병이 낫고 건강이 회복되면서 그는 사랑을 살아야 하겠다는 굳센 결심으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깨어있어야 한다는 바울의 종말론은 복음서들에서도 누누이 강조되고 있는 신앙입니다. 마태복음서 25장에는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신랑을 맞기 위해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와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갈라집니다. 깨어 있는 종과 잠자는 종이 대비되듯이 말입니다. 하박국은 망대에 올라가서 밤을 새워 하나님께 질문을 하고 주님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박국처럼 깨어 있는 처녀들은 신랑의 영접을 받았지만, 잠 자다가 등불을 켜지 못한 처녀들은 쫓겨 났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기름은 세상을 불 밝히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려면 성도가 누구나 기름을 충분히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성도가 등불처럼 환히 밝게 타오르려면 그 내면에 사랑의 기름이 타고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서울대학교의 학생들을 환하게 밝은 영성으로 인도하려면 사랑으로 초청하는 성경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아니면 이 우울한 현실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한껏 부풀리는 “오만한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이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방탕한 삶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를 지배하는 욕심을 버리고 지금 힘겨워하는 이웃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해 보십시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부조리한 답답한 현실을 이겨내는 길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사는 의인은 부조리한 현실을 뚫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에로 결단하고 일어서게 됩니다. 여기에는 구원이 믿음으로냐 행위로냐 하는 순환논법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리하여 시편85편의 시인은 포로에서 해방된 노예들의 미래를 합창으로 노래합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진실”/”믿음”<에메트>의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헤세드>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찬양이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예배에서 드높이 울려 퍼집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에메트>는 ‘믿음’과 동일한 의미의 “진리/진실”입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체데크>도 하박국이 애타게 갈구하였던 “의/정의”입니다. 여기에 온 인류의 구원을 갈구하는 “평화”가 <샬롬>이란 시인의 언어로 드높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신29:11). 믿는 의인이 걷는 사랑의 “길”<데레크>을 시인은 진리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길이야말로 진정으로 좋고 아름다운 절대선입니다<토브>.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온 성도들이 사랑의 불씨가 가슴에 지펴져서 마침내 환하게 타오르게 되기만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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