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5:1~10, 벧전 1:22~2:3, 막 9:33~37
예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죄와 모순이 가득한 삶의 현장이며 역사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문제 많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길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역병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와 각종 환경 재해로 온 지구촌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파하십니다(롬8:26) 역병 환난 중의 대림절, 더 특별하고 새롭게 다가옵니다. 대림(待臨)은 한자로 ‘오시는 이를 기다리다’라는 의미입니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의 신학적 주제는 ‘대림’ 즉 ‘오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몰트만 자신이 2차 세계대전에 독일 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연합군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죽음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절망 가운데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포로수용소 군목이 던져 주는 성경을 읽고 ‘오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공학도였던 그가 출소 후 신학도가 되고 세계적 신학자가 됩니다. 몰트만은 그의 책 ‘희망의 신학’에서 미래를 나타내는 두 단어를 구별하여 말합니다. 라틴어 Futurum(영어Future 어원)과 Adventus(영어 Advent 어원)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양적, 수평적, 연대기적 미래’이며 후자는 ‘질적, 수직적 카이로스적 미래’를 가리킵니다. 카이로스적 미래는 종말에서 현재로 오는 미래입니다. 대림절(advent)은 바로 ‘카이로스적 미래’입니다.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영접하는 시간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비치는 빛이었습니다(마4:16). 그 빛을 영접하는 대림절 되길 소망입니다.
기다림 천국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기다림은 그런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설렘 속에 이미 그를 만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마음에 품고 사모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자에게 ‘오시는 하나님’ 예수는 오십니다. 거기 천국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대, 남 유다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시대였습니다. 나라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뇌물을 사랑하고(사1:23) 밖으로는 강대국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삼키고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유다를 삼키려고 달려오던 시대였습니다(사8:7). 그런 전쟁 시대 한복판에서 이사야는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오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평화, 카이로스적 평화였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은 그의 평화의 노래 중 하나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35:1-2) 이사야가 어떻게 전쟁 통에 평화를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이미 오신 하나님을 그는 만난 기쁨과 감격과 설렘을 그는 노래했습니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거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35:4, 9-10) 이사야는 전쟁 통 시대의 광야에 평화의 나무를 심고 가꾸었습니다. 그는 예수 오시기 전, 700년 전에 활동했지만 그는 메시아로 오시는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그 설렘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에 오시는 하나님, 메시아 예수의 징조를 보고 설렘 속에서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래서 이사야는 구약의 복음서 저자로 불립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사야는 저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대림절 신앙입니다. 예수께서 여러 비유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 이야기의 핵심 주제 중 하나가 ‘기다림’이었습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이야기(눅12:35-40)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마25:1-13), 그 핵심 메시지는 기다림입니다. 그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지루한 기다림’ 아닙니다. 기다림이 설렘이고 행복인 기다림입니다. 코로나 역병과 기후 위기 속에서 지구촌은 어둠과 절망 속에 잠겨 있지만 ‘오시는 하나님’ 아기 예수의 성탄을 알리는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그것이 우리 희망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전쟁 통 세상에서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메시아 대림 신앙의 예언자 이사야처럼....
마음의 빈방을 준비하라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입니다. 교회는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기다림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를 알지 못하였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5-11). 도리어 아기 예수 탄생 소식에 소동했습니다(마1:3). 기다리는 마음의 빈방이 없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예수의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그랬습니다. 예수 제자들도 말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실 마음의 빈방이 없었습니다. 마음의 빈방이 없었던 그들, ‘서로 누가 크냐’ 다투었습니다. 예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 메시아 아기 예수를 알아보고 영접한 사람들은 의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인 동방 박사와 불가촉천민인 목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축에 끼지 못하는 자들이 오시는 하나님을 위한 마음의 빈방을 준비하고 영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절은 아기 예수를 위한 빈방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자기 비움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교만과 독선과 탐욕,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쓰레기 가득한 마음의 방으로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여리고에 오시는 예수를 셀렘 속에서 기다리고 회개하고 영접하였습니다. 그렇게 삭개오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삭개오의 대림절이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 ‘순결하다’, ‘깨끗하다’,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성도(聖徒)’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름값을 못하고 로마의 앞잡이로서 동족의 고혈을 빠는 세리로 살았습니다. 그랬던 삭개오는 거듭났습니다. 이름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 이 시대를 향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입니다.
본문 벧전 2:1-3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그렇습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마음, 바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이고 마음의 빈방을 준비하는 대림절 마음입니다.
피조물이 신음하는 지구촌 위기의 시대, 새 시대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때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오만과 독선과 탐욕과 물신주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마음의 빈방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위기가 그런 위대한 기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2021. 12. 19 대림절 넷째 주일, 정상시 목사, 안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