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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7-1) - " 거룩하신 하나님의 질투 " / 안종수 목사

관리자 2019-10-09 (수) 17:34 14일전 43  

본문) 수24:14-28, 요15:18-27, 행3:22-26

 

지금 창조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질투의 마음으로 계속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육신의 밥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떡과 포도주, 곧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유월절과 성만찬을 재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말씀에서는 모든 탐심을 버리라고 하시면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물질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 하나님과 이웃과 소통하는 도구, 나눔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오늘 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에 주신 세 본문의 말씀은 새로운 창조역사에 참여하는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말씀을 따라야 할 언약의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사도행전 3:25상)”

 

사도행전 3장은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한 후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든 유대인들을 향해 행한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이 치유의 사역이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일어났으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외쳤던 언약의 자손 예수를 통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 예수 안에서 일어난 언약의 성취, 바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새로운 창조 사역에 참여하는 그 구원의 언약은 과연 무엇일까요? 

 

선지자 여호수아

이 시간 읽은 구약의 본문은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마지막 장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고대 이스라엘 지도자들 중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보다 역사적으로 앞서는 족장들은 그야말로 씨족의 우두머리에 불과합니다. 이에 반해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를 이끈 인물들입니다. 이들보다 역사적으로 뒤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 일시적으로 지도력을 행사하는데 그쳤지만, 모세와 여호수아는 항시적으로 지도력을 행사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운명적으로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고 나와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요단강 동편에서 죽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마치 모세가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것처럼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뒤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는 중에 미처 그 과업을 마치지 못한 채 죽습니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 백성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신명기입니다. 여호수아도 죽기 직전에 설교를 하는데, 그게 바로 이 시간 읽은 여호수아서 24장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기록했다면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율법을 기록했습니다.(수 24:25,26)

 

세겜에서의 언약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장로, 수령, 재판장, 관리들을 세겜에 불러 모아 놓고(수 24:1)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를 거쳐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수 24:13)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을 지켜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처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부터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가나안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의 긴 역사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상기시킨 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이방신, 곧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제국의 신,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의 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다면 이방신들을 섬겨도 좋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24:16-18절에서 “우리는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건인데, 이 두 사건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대답을 들은 여호수아는 예상 밖의 말을 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수 24:19)

 

앞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이방신을 선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하더니 여호와를 따르겠다고 나선 백성들의 고백과 결단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도저히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주 특이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 여호수아, 그리고 구약 신앙의 정체성이며 본질입니다. 이런 말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모두는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속성을 거룩과 질투로 표현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너희의 잘못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 여호수아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여호수아서는 가나안을 힘으로 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침략한 사건을 비롯해서 열 두 지파의 땅 분배가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가나안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런 기록만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쉽게, 그게 아니라도 결국 모두 몰아낸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대 왕정시대에도 가나안에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여러 부족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갈라진 것도 역시 여기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들의 힘들이 가세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가나안 부족들은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도 이스라엘보다 강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힘으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말로도 안 되고, 힘으로 안 된다면, 또한 자기들이 살만한 다른 장소를 구할 수 없다면 결국 함께 어울려서 살아야 하는데,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라면 그렇게라도 살아야하는데, 가나안의 현실 역사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세겜이 이런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력을 당한 뒤 그의 오빠들이 그곳 부족 사람을 집단 살해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한 시도 평화롭게 살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가나안 원주민과 주변의 제국을 몰아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과 평화롭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기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가리켜 신명기 학파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사가, 또는 그 학파는 기원전 620년경부터 활동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서도 바로 이 신명기 사가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의 실제 활동 시기와 신명기 사가의 활동 시기 사이에는 대략 6백년의 차이가 납니다. 여호수아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은 형식적으로는 기원전 1천2백 년 전 세겜 계약이 이뤄지던 시대의 사람들이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6세기의 사람들입니다. 기원전 6세기는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바벨론 유배, 그리고 귀환이라는 엄청난 사건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난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근본 문제가 뭐냐 하고 질문을 하고, 이제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그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질투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철석같이 다짐하고 약속했지만, 이것이 기록된 기원전 6세기의 관점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지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신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지는 않지만, 가나안의 신을 겸해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간혹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나안 신의 형상이 놓이곤 했습니다. 바로 신명기 사가 앞에 놓인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혼합주의였습니다. 신앙적 혼합주의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 이미 물량주의, 맘몬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복주의는 성전의 지성소를 차지했으며, 주술이 신앙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교권이 생명의 영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율법이 복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세속의 질서에 영합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신앙의 혼합주의, 맘모니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묘하게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교회세습의 정당화, 보수기독교단체의 편향된 정치의식, 교단마다 대형교회의 눈치 보기, 특히 예수 믿으면 출세하고 돈 벌고 시집 장가 잘 간다고, 십일조 헌금 드리면 물질적인 축복을 반드시 받는다고,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손해를 본다고 외치는 소리는 종교혼합주의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기에는 불안하여 바벨론, 이집트, 가나안 신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질투가 인간의 질투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질투는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 미움과 증오로 상대방에게 질투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있어서 질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간 구원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그 구원의 행위를 신명기 사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 

 

그리고 세겜에서 백성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해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여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소 곁에 세워 증거가 되게 했습니다.(수 24:24-2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로 인하여 구원받아 새로운 창조 사역에 쓰임 받는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종교혼합주의를 배척하고 예수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은 세상이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보내 주신 진리의 영, 보혜사 성령님이 계시고 그 분이 증언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15:26-27)

 

오늘 창조절 일곱번째주일에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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