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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5-1) - " 해방의 노래를 부르기까지 "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19-09-27 (금) 11:27 26일전 48  

본문) 출 12:1-14, 고전 5:6~8, 요 6:48~59

출애굽기를 탈출기 혹은 해방의 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나오기 직전에 하느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지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파스카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pesach(페샤)’, 곧 하느님의 ‘지나가심’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이 이집트 사람들을 죽이면서 히브리인들이 거주하는 집은 ‘거르고 지나가다’는 것과 홍해를 기적적으로 ‘지나가게 하여’ 해방시키신 사건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출애굽기 12-13장에 있는 말씀에 따라서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출애굽(해방)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유목과 농경 사회에서 나온 다른 두 행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틴이 포함된 고대근동 지역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데, 건기에는 사막에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이 없고 풀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목생활을 할 수 없고 사람도 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유목민들은 건기 때에는 물이 있는 평야지대의 도성에 와서 빌붙어 살다가 다시 우기가 되어 광야에 풀이 자라면 도성을 떠나서 산악지대로 가서 목축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도성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끝임 없이 위협하는 근거지였고, 그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도성의 문화인 지배구조는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들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러한 역사적-문화적-지리적 정황을 배경으로 생겨났습니다. 근동지역의 유목민들은 우기(봄)이 되면 건기 때에 머물던 도성이나 도성 주변을 떠나 다시 유목생활을 시작하는데, 그 첫날밤에 양을 잡아 그 피를 천막의 말뚝이나 포장에 뿌리든지 천막의 문지방이나 문설주에 바르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은 그들의 집과 가축을 위협하는 악령을 쫓고, 그들의 신이 새로운 유목 여정을 돌보셔서 가축과 소출을 지켜주시길 기원하며, 가족 또는 부족민끼리 공동식사를 나눔으로서 일치와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 땅에서 3~4월 보리수확기 때 한해를 시작할 즈음에, 새해 소출이 잘 되기를 빌며 못된 잡귀의 영향력을 없애려고 치루는 농경축제였습니다. 

이 두 가지 풍습이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어 새로운 의미의 절기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구원의 밤을 기념하는 날로, 해방의 업적을 기억하고 현재의 베풀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미래에 그분이 주실 생명과 자유로 나가는 야훼의 축제의 날로 바뀌었습니다. 토양과 작물의 풍요와 가축의 안전을 기원하던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역사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체험하면서 그 의미가 새로워진 절기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 주어진 자유의 첫걸음, 새로운 생명의 시작, 야훼를 섬기는 새로운 생활의 출발점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의 첫 번째 달인 니산월의 13일이나 14일에 기념하였습니다. 성서에서 유월절은 언제나 누룩 없는 빵의 축제인 무교절과 함께 나타나며 둘 다 출애굽 사건 이전의 유목민들의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이집트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한다는 면에서, 이스라엘 신앙의 특수하고 근본적 성격을 아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절기들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두 명절은 출애굽사건과 연결되면서 하나로 묶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됩니다. 액땜을 하기 위해 살해되던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빠져 나오던 날 그들의 맏자식들을 그 피로 구했던 새끼양의 희생적 죽음에 연결되고, 누룩 없는 빵은 누룩을 넣어 빵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던 촉박한 상황과 연결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의 중요성은 이 절기들이 기념하는 ‘출애굽의 해방(구원) 사건’이 이스라엘의 신앙체험에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의 근본체험, 원체험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이 지내야 한다는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표시하고, 가족 단위로 예식을 치르라는 규정은 개인의 구원체험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온 백성의 구원체험에 대한 기념이며,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라는 규정은 야훼의 한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성, 형제애를 강조하는 것이고,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는 규정은 해방의 기쁨과 현실의 어려움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는 하느님께서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역사 한가운데서 자신들과 함께 하셨던 것을 기념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더욱 굳세게 믿으면서, 앞으로 미래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함께 단호하게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겠다는 각오를 한 사람들의 절기입니다. 

출애굽의 해방사건과 연결된 유월절과 무교절은 ‘지나감’의 의미를 더욱 실감나게 살려내었고, 이스라엘 신앙과 실존 자체에 의거하여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각인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된 백성, 하느님께 구원받은 백성으로 ‘탄생’한 이 사건은 대대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전수해줄 가정교육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절기가 되었습니다(출애굽기 12:25-27; 13:14-15).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의 역사적 순간에 하느님께 ‘구원받았고’ 해방되었다는 의식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배워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조상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요셉의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의 극적인 사건을 매듭짓는 환희와 경축의 노래(탈출 15,1-21)는 위험에서 구출된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요 ‘능하신 손과 든든한 팔’로 이룩하신 하느님의 놀라우신 업적에 대한 감사입니다(신명기 7:19; 시편 136:12).

 

마태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의 박사들이 돌아간 이후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헤롯의 수배령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가족은 돌아와서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나사렛은 예수님의 고향이며,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이집트이며, 나사렛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왜 이집트로 피신했을까요? 당시 이집트는 아우구스투스의 속주였으므로 헤롯이 의지만 있다면 그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거리도 멀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가족은 안전을 위한 피신이라면, 로마나 헤롯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파르티아로 가는 것이 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이유를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는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태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출애굽을 연결시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의 해방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이집트와 나사렛에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이 이스라엘의 해방과 연관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그것을 읽는 우리들에게 미완성의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헌신으로 끊임없이 손짓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자기의 희생으로 수많은 히브리 민중을 살린 어린양으로 죽었다는 모티브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로마 제국과 유대 지배자들에 의해서 핍박당하던 사람들에게 해방(구원)과 기쁨의 소식이었으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출애굽(해방)을 주도하신 야훼 하느님에 대한 기억과 미래의 희망과의 매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 속에서, 그리고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혹은 출현 그 자체를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경험을 기억하고 온전한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을 희망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을 해방하신 야훼 하느님이 세상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날에 모두 함께 어울려 해방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더불어 숲이 되는 나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비를 맞으며 서로 도우면서,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습니다. 길을 만들면서 가다가 잠자는 토끼가 있다면 깨워서 함께 가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가 있다면 걸음을 맞추어 함께 갑시다. 그렇게 함께 간다면 희망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누룩의 속성이 반죽을 부풀게 하여 부드럽고 크게 하지만, 묵은 누룩과 새로운 누룩을 구별하여 말합니다. 묵은 누룩은 악의와 악독이고, 새로운 반죽은 성실과 진실을 누룩으로 삼은 것이라고 합니다. 누룩 자체로 보면 몰가치적입니다. 누룩 자체를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누룩은 가루반죽에 파고들어 그것을 다 부풀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조심하라고 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율법적 틀 속에 모든 민중을 가두려는 그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을 하루하루 자기의 생명을 연장시키기에 급급한 모든 민중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누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서 민주열사의 피를 빨아먹고, 통일을 위해 죽어간 이들의 생명을 갈취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기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누룩의 행위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반죽에 들어간 효모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확장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가진 사람들이 반죽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접하는 오늘,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들어가 그 세상을 변혁시킬 누룩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오늘 세상이 원하는 것을 따라 가기에도 급급하지 않은가?’ ‘돈이 주체가 되어 최고의 엘리트, 최후의 승자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나는 또 하나의 객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에게 세상은 바리새파의 누룩과 하느님 나라의 누룩,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서 반죽을 부풀게 합니다. 이미 부풀어 오른 반죽에서 누룩을 다시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반죽은 누룩으로 말미암아 이미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사람들을 율법이나 자신들의 권력, 지금으로 말하면 돈에 종속시키게 만들 것인지, 하느님 나라처럼 모든 사람이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이 온 누리가 부드러워 져서 살맛나게 만들 것인지. 어떤 누룩이 되든지 우리 앞에는 자본주의적 세상이 있고, 이미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방의 노래를 확산시킬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우기와 건기에 따라서 해마다 종속과 탈출을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이 출애굽이라는 커다란 사건과 만나서 유월절과 무교절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두 물줄기가 만나서 하나가 되듯이 <아우라지, 양수리, 두물머리, 합류, 수렴동> 조상들이 해마다 경험한 작은 해방의 사건들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큰 해방의 사건과 만나서 민족적인 절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경험을 항상 기억하면서 미래를 준비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행태를 하느님이 보시기에 어떠할지 상상이 되지만, 역사적 경험을 뼈아프게 간직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본받을 만합니다. 

안병무 선생님과 민중신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서남동 선생님입니다. 서남동 선생님의 신학의 중심은 “두 이야기의 합류”입니다. 그에 따르면, “민중신학의 과제는 성서의 민중동기와 한국의 민중전통을 결부시키려는 것이고, 그런 결부는 실천면에서는 이미 1970년에 합류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이 현재 한국교회의 ‘신의 선교’ 활동에서 합류되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사실과 사건을 ‘하느님의 역사 개입’, 성령의 역사, 출애굽의 사건으로 알고 거기에 동참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성서 속에 있는 해방전통 이야기와 우리 역사 속에 있는 민중전통 이야기가 만나서 오늘의 인민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고 나누는 이유입니다. 성서 속에 계신 야훼 하느님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59년 전에 일어났던 4/19혁명, 39년 전에 일어났던 5/18광주민중항쟁, 32년 전에 일어났던 6.10민주항쟁, 그리고 수많은 민족․민주․민중 사건들은 기억할 만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들이 하느님의 꿈과 만나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이 더불어 함께 사는 희망의 미래를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을 먹고 예수님을 마음에 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부르짖는 사람들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낸 야훼께서 오늘도 신자유주의의 세계지배와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파괴되는 생명의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해방의 사건을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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