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하 23:13-17, 약 4;1-10, 마 10:34-39
1) ‘번영신앙’을 넘어서
‘사이비(似而非) 기독교’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겉모양은 비슷한데 속이 전혀 다른 것을 사이비라고 부릅니다. 비슷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당 건물도 화려하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 예배도 드리는데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과 전혀 다른 삶을 꿈꾸고 있다면 바로 ‘사이비 가짜 기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의 길’을 가르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호사(豪奢)를 누리며,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을 바라며 이를 위하여 신앙을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길을 가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꿈꾸셨는데 우리는 세상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넓고 좋은 집에 살면서, 잘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타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복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이를 위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여전히 그 ‘이방인들’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표는 큰 집, 맛있는 음식, 화려하고 멋진 옷이 아니고 하나님나라이며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기 위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부수적 도구들일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는 온데 간데 없고 수단들에 집착하며 세상에서의 번영만을 꿈꾸는 ‘번영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려하게 사는 것을 꿈꿀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을 소망해야합니다.
이 ‘번영신앙’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이런 ‘번영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찬물을 끼얹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2)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주시는 파송사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아주 파격적인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담겨있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제대로 바르게 잘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시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34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고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을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35절에서도 사람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오셨다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36절도 자기 집안 식구와 원수가 된다는 말씀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굉장히 과격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眞意)는 가족들과의 불화를 조장하는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고난의 길이 예견된 상황에서 어떤 가족이 순순히 그래 ‘잘 따라가라’고 할 가족은 없고 그래서 가족들의 만류로 인한 많은 가족 안의 갈등이 예견된 것을 강하게 표현하심으로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씀으로 읽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세상에 편하게 잘 사는 길이라면 반대할 가족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엄청난 고난과 자기희생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만류하는 가족들이 이를 받아들이기까지는 불화와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자기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제자의 길을 가려는 가족에게 부모, 형제, 자매들의 극심한 만류로 가족 내의 갈등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나를 따르면 엄청난 물질의 복과 번성하는 복이 내린다.’며 감언이설(甘言利說)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서 물질의 복을 받고 엄청난 번성의 복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가짜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아 우리 삶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된다고 하면 모르지만 물량적인 풍요를 약속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과는 관계없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자기희생이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값지고 귀한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가지고, 풍요롭게 떵떵거리며 잘 살려고 하는 탐욕을 이미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고단한 길을 가지만 바르게 살고, 다른 사람과 사회를 위해서 가치 있는 헌신을 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길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손해나 어려움도 감내하고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하기 때문에 ‘자기헌신이 없는 기독교 신앙은 사이비(似而非)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욕심을 이겨야 합니다.
야고보는 3장에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무분별한 언행으로 상처를 주는 일들은 사람들의 정욕(情慾)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며, 하늘 위에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회복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어서 4장 오늘 본문에서도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육신의 욕심을 이기며 살 것을 권고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해도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하면 받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합니다.(3절)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을 알고 탐욕을 물리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늘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하게 하면서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했습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고 권면합니다.
야고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탐욕을 이기며 절제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우리 육체의 정욕을 제어(制御)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니시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욕심을 채워주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올바른 기도는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비우고 주님의 뜻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4)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지도력
구약본문 사무엘 하 23장 말씀은 다윗 임금의 말년에 과거를 회고하며 쓴 회고담(懷古談)과 같은 성격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다윗의 충성스러운 군인들 세 사람이 다윗에게 나왔는데, 다윗이 그들에게 자신이 베들레헴에 살 때 마셨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며 누가 그 물을 떠다줄 수 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베들레헴은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어서 쉽게 그 성문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장수들은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고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여 베들레헴 성에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잘못되면 그 세 사람의 장수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수행했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받아들고 그 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물은 이 세 사람의 장수들의 피와도 같은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그 물을 받아들고 ‘아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제단에 쏟아 부으며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의 지도력을 엿볼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그 물을 받아들고 마시며 ‘아! 참 이 물맛이 아주 좋구나!’하고 벌컥벌컥 마셔버렸다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지 못했다고 평가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도 마시고 싶었던 고향 우물이었지만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충성스런 세 장수의 피라고 여기고 하나님 앞에 쏟아 부어드렸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자제력을 다윗이 하나님 앞과 그 부하들 앞에서 보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닙니까?”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부하들에게 무모한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나님 앞에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자기 욕구를 내려놓고 절제하는 신앙인의 절제가 많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죄를 짓는 우리들에게 ‘자기 비움’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5) 맺음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희생, 자기 비움의 영성을 채우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우리는 ‘비움’보다는 ‘채움’을 더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양만 있는 가짜 사이비 기독교인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이것이 우리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입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기독교는 사이비(似而非)입니다. 명심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