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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7-1) - " 착한 종과 악한 종 " / 이태영 목사

관리자 2024-10-11 (금) 14:57 2개월전 164  

본문) 창 9:1-7, 벧전 4:1-11, 마 25:14-30


착한 종 – 자기의 지분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신의 소유를 맡겼습니다. 각기의 능력에 따라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성경원문은 세 번째 종이 받은 것이 은(알귀리온)이었다고 기록합니다(마25:18, 27). 물론 ‘알귀리온’이 ‘돈’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역개정역에서 금이라고 해석한 것은 지나칩니다. 새번역이나 잘 알려진 영역본들(NRSV, NIV)도 금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다섯 달란트’라고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 다섯 달란트’(14절)를 주었다고 번역된 개역개정역은 향후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그 돈을 받자마자 ‘곧바로’ 일하기 시작합니다(마 25:16). 성경은 ‘곧바로’(유쎄오스)라는 말을 통해 첫 번째 종의 신속한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은 모든 것을 하나님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달란트를 받은 ‘즉시로’ 주인을 위하여 일을 시작합니다. 개역개정역에는 그가 장사를 했다고 하나, 헬라어 원문에는 그가 단지 ‘일을 했다’(에르가조마이)고 할 뿐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장사하다’(프라그마튜오마이, 눅 19:13)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개역개정역이 마태복음의 본문을 장사를 했다고 번역한 것은 누가복음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종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는 망설이거나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자기의 것이란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남긴 후 그 이익의 지분에 대한 갈등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곧바로’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첫 번째 종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임하는 첫 번째 종의 자세입니다. 이 종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자신이 다섯 달란트를 갖고 두 배를 벌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 푼도 자신의 지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순교의 제단에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분들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종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있지도 않았기에 드릴 것도 없고 헌신할 것도 없는 하나님 나라 사람입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과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즐거움 뿐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종들이 주인에게 하는 말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배를 남겼으니 드린다고 하지 않고 그저 ‘보소서’(마 25:20, 22)라는 감탄사만 말하고 있는 점도 종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은 첫 번째 종에게 상을 내립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이렇게 말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종에게 주어진 것은 물질적인 보상이나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일체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기쁨과 즐거움이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하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악한 종 – 자기에게 올 지분만을 계산한다


그런데 이에 비해 세 번째 종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의 개념 속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아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것과 자신의 것을 철저하게 구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주인의 것인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것인지에 대해 치밀하게 계산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이지만 끊임없이 자기에게 돌아올 지분을 생각합니다. 그는 주인의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를 받습니다. 그는 다른 두 종과는 달리 땅을 파고 주인의 은전을 감추었습니다(마25:18). 그가 재물을 감춘 것은 누구를 의식해서일까요? 일반적인 추측을 할 때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도둑입니다. 그 돈을 도둑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인입니다. 주인에 대한 불평과 불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후자의 가능성이 짙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달란트 비유의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세 번째 종과 주인의 팽팽한 긴장 관계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결산을 할 때 세 번째 종은 주인의 돈을 땅에 감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나이다.”(마25:24~25)

심거나 헤친다는 말은 모두 농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용어입니다. ‘심지도 않고 거둔다’는 말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곡식을 가져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헤치지도 않고 모은다’는 말은 타작 마당에 추수한 곡식을 널지도 않고 알곡을 가져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불로소득하는 착취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의 말은 맞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과연 불로소득하는 분일까요?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가꾸며 추수한 곡식을 널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알곡만 냉큼 가져가시는 분일까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소유의식에 사로잡힌 땅의 사람이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남긴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런데 정해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익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몇 배, 몇십 배의 이익을 남긴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모두 귀속되는 것이지, 내 것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내가 죽은 후에 해도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거두어 간다고 하면 하나님이야말로 불로소득하는 분 아니겠습니까? 내 지분에 대한 보장도 없고, 내 것이 되지 않을 바에야 내가 무슨 이유로 이 돈을 늘이는 데 고생을 하며 땀을 흘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기에게 올 지분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위한 어떠한 일도 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돈을 땅에 묻어버립니다. 본인이 일을 하기 싫으면 이자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최소한의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익을 주인에게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지분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인을 위한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


주인이 세 번째 종을 심하게 책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이 달란트가 네 소유의 돈이었다면, 네가 그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너는 최소한 이자라도 추구하지 않았겠느냐?”는 질책인 것입니다. 주인이 “내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도 않는 곳에서 모은 줄 알았더라면 마땅히 내 돈에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서 원금과 이자를 함께 받도록 했어야 했다.”(마25:27)고 말한 것은 이해타산에 밝은 세 번째 종의 사악함을 지적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인이 볼 때 세 번째 종은 참으로 무익한 종입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종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악한 종입니다. 이러한 종은 하나님 나라에 해만 끼칠 뿐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고 사는 착한 종와 자기에게 돌아올 지분만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악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소유나 지위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살아갈 뿐 아니라, 이제 곧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자기 것이 있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일체 감사와 일체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종은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소유에 집착하고, 지위에 붙들려 있으며, 자아에 얽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며 자신의 지분을 생각합니다.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산합니다. 그가 살아가는 삶의 동기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입니다. 신앙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신앙을 갖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무언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도 거부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우상의 본질이라고 할 때(출32:23), 그는 철저하게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청지기


베드로전서 4장 10절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를 강조합니다. 청지기는 관리인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청지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강조하는 선한 청지기는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며, 이전에 죄 속에서 살아가던 삶과 단절한 사람입니다(벧전 4:1). 사람이 가진 욕망과 우상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벧전 4:2),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벧전 4:6). 근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사람이며(벧전 4:8),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벧전 4:10).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노아의 가족에게만 주신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다섯째 되던 날에 바다와 하늘의 모든 생물을 지으신 다음,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라”(창 1:22)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되던 날,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후, 같은 내용의 복을 이들에게도 주셨습니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생명체들을 향해서 풍성한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 안에서 풍부한 결실을 맺고, 크게 성장하며, 가득 채워지는 삶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소유나 점유에 대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9장 2절의 “붙였음이라”와 9장 3절의 “주노라”는 인간에게 피조 생명체들의 소유권을 넘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맡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명조차 소유하지 못하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창세기 9장 4절과 5절에 살아있는 동물들의 피를 먹거나 흘리지 말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생명의 소유권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단지 피조세계를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공성(公共性)


오늘의 말씀들은 소유에 집착하고 자기 욕망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공공성(公共性)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모든 시도, 그리고 청지기 직분을 망각한 채,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하만물을 소유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악한 것이라는 강력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철저하게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았던 성도들의 정직한 믿음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로마제국의 엄청난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착한 종과 선한 청지기처럼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생각하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공동체 내부에는 다양한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믿음의 대열을 이탈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유의식과 자아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의 인격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한 아간(수 7:1-26)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냉철하게 되돌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지분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신실하고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 나라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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