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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9-1) -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도와주소서 " / 종교개혁주일 / 오정석 목사

관리자 2023-10-26 (목) 16:30 6개월전 296  

사 6:1~8, 요 8:12~20, 계 15:1~4 


정확히 1년 전에, 대한민국이 안타까운 일로 떠들썩했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일어난 대형 압사 사고 때문입니다. 이 사고로 여자 102명, 남자 57명이 사망했습니다. 대부분 20~30대입니다. 사고 후에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 갤럽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국민 70%는 사고 수습 과정에서 정부의 대응이 적절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사고에 대해서 정부를 비롯한 관계 당국자들은 책임지는 자세보다는, 회피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10.29 참사의 책임을 물으면서 행정안전부장관을 탄핵했지만, 헌법재판소에서 기각하고 말았으니,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0.29 참사 이후, 100일이 지날 때쯤에, 서울 시청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하려는 우리 시민들과 설치를 막으려는 우리 경찰들의 충돌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는가,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국민들이 이 사고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고, 무엇보다 다시는 이런 인재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잊지 않고 기억해야 그나마 159명의 소중한 생명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 때문입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의 폭격으로 죽어간 5천명 이상의 생명을 생각하면서, 지난주에 잠시 묵념했는데, 오늘도 1년 전의 10.29 참사를 생각하면서,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기억하고, 유족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마음으로 잠시 묵념합시다.


오늘은 창조절 아홉째주일이고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누군가 추수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누군가 씨를 뿌리는 수고를 했다는 말입니다. 씨를 뿌리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 물과 영양을 공급해 줘야 하고, 아프면 약도 줘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있을 때, 추수의 기쁨을 제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아서, 먼저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하게 가꾸고, 키우느라 수고한 옆 교우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축복합시다. 그렇습니다. 수고가 있어야 결실을 맺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서, 이러한 수고와 결실의 관계를 연장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517년 구교에서 신교로의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기에, 오늘날 개신교 신학과 개신교 교회가 인류에 생겨날 수 있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천년을 보내면서, 가톨릭은 유럽에서 철옹성 같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가톨릭이 철옹성 같았기에, 감히 면죄부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루터는,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후폭풍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가 온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이 될 수 없다는 판단과 믿음으로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씨뿌림의 수고가 있을 때 기쁨의 추수가 있듯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과 실천이 있었기에 오늘날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어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등(출 33:23)을 보며,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물과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가 가능하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런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먼저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남 유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생소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합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모신 채, 주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이사야는 즉각적으로,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뵈었는데, 이것은 자신에게 재앙이요, 망하게 되었다”고 반응합니다.

그 때에,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합니다.

그 후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이 본문에서 궁금한 내용을 몇 가지 물으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성전의 높이 들린 보좌에 계시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왜 나타나셨냐는 물음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나타나셨을 때, 왜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고, 백성들이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으며, 스랍 중에 하나가 숯을 입술에 대고, 그 숯으로 악이 제하여졌고, 죄가 사해졌다고 하셨느냐 물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마친 후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는데, 보냄을 받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사야 1장에서 찾습니다.

이사야 1장은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의 내용인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따뜻하지 않습니다. 기껏 정성을 다해서 자식을 양육했더니, 그 자식이 거역했다고 하시며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위로와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덧붙이십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법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모양으로 제멋대로 살았다고 하시냐면, 무수한 제물을 바쳤습니다.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를 바쳤습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가져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각종 대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엄하게 말씀하실까요?

여러 말씀 중에, 이사야 1장 23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같이 도둑질하고, 뇌물 좋아하고, 고아와 과부의 설움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들은 이런 물질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하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견딜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한 후에, 좀 전에 했던 물음의 답을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왜 하필 이사야일까요? 그리고 이사야에게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알 수는 없습니다만, 위에서 말씀드린 남유다 예루살렘의 상황을 보면,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궁중 예언자입니다. 수많은 궁중 예언자 중에,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이사야만 유일하게 “이러면 안되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이사야도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벽했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유일하게 이사야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던 사람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법을 귀로 듣고, 그 말씀과 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며, 도둑질하지 않고, 양심을 버리지 않고 뇌물을 거부하고, 고아와 과부를 나의 가족이라고 여기고 그들의 고충 해결을 우선순위에 두려고 했던 사람이 이사야 선지자였던 셈이죠.


그렇다면 두 번째 물음이었던, 왜 입술일까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 물음이었던,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라고 다짐했던 의미와 이후의 삶의 모양은 어땠을까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오직 입술로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고 했던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말로만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라고, 말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로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로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것 말이죠.

말로만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고, 말로만 선행을 말하고, 말로만 고아와 과부의 고충을 위로하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죠. 입술에 “제단의 핀 숯”을 대고, “악이 제하여졌고, 죄가 사해졌으니, 이제 나를 보내소서”라고 다짐하고 고백하는 것은, 이제 말로만 하던 정의와 사랑과 선행을 삶으로,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삶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고, 삶으로 선행하며, 삶으로 고아와 과부의 고충을 돕고 살려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요,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이사야 선지자는 말뿐이었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의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성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바리새인만큼 알지 못합니다. 성전의 의미와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식이 그 누구보다 뛰어납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신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시는 내용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 납득이 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유대교 교리를 대표하는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따라 판단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누가 옳다고 생각하나요? 물으나 마나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받으시는 분이 기준이어야지, 드리는 자가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본 중에도 가장 기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제사는 받으시는 분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드리는 자들에게만 집중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헌금이었습니다.

20절 상반절을 보면,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라고 기록합니다.

왜 하필 헌금함 앞에서 가르치셨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하나는, 돈이 있는 곳에 마음과 정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사용하는 곳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하나는, 제사를 드리며 헌금을 바치는 자와, 헌금을 비롯한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헌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이 헌금과 헌금을 드리는 자의 삶이 세상을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규모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어떤 크기든, 그 안에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고 바라시는 것이 오롯이 담겨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마지막으로 계시록을 봅시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과정 중에 이를 방해하고 핍박하는 세력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있을 것임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갖은 핍박과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마침내 이기고 벗어난 자들에게 어떤 세상이 펼쳐지는지 기록합니다.

3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면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하며 경배합니다.

끝까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던 이들은 왜 모세의 노래를 부를까요? 모세의 노래가 무엇이었나요? 지난 창조절 여섯째주일 구약 본문이 신명기 32장이었는데, 바로 모세의 노래였습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니, 이것을 노래로 만들어서 대대손손 부르게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세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살아갈 히브리인들은, 이후에 또다른 이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노래로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늘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를 부른 이들의 삶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라는 생수를 자신의 삶에서 충분히 머금고, 또 다른 생명에게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라는 생수를 먹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입술로만이 아닌, 이러한 삶의 열매를 맺은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교회고, 기독교라는 종교입니다.

과연 우리는 나의 기쁨을 위한, 나의 위로를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와 요담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 때까지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지키며, 그 기준을 갖고 살아가려고 했던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녹록치 않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녹록치 않은 길이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려고 합니다. 왜요? 그 길이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길이기 때문이요,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밝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씨앗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나무가 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그리스도인 한명 한명이 제 2의 이사야, 제 3의 이사야가 되어서 세상을 구원하며 하나님 나라 만들어가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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