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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정기총회 설교(84회)

관리자 2019-05-31 (금) 12:14 4년전 1182  

본문) 눅2:13-14, 창27:5-14, 골3:14-15

제목) "누가 하늘이 준 참 평화를 노래할까"

 

우리 기장 전국여신도회의 제 84회 정기총회 개회를 축하드립니다. 제가 지난 4년 전, 여러분의 제 80회 영정도에서 개최된 총회에 참석한 하여, <담을 허물 생명의 물줄기>란 주제로 증언한 바 있었는데, 4년이 지난 오늘, 또 다시 여러분의 초대로 <생명의 빛으로 평화를 노래하자>란 주제의 말씀을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큰 영광이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참 대단한 신앙적 의지를 가진 분들입니다. 여신도회 조직을 가진 이래, 초지일관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제시하신 <정의. 평화. 생명>이란 큰 성서와 신학의 대 주제들을 줄기차게 붙잡고 씨름해 오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교단 총회보다도 산하 신도기관인 여러분의 여신도회가 더 집요하게 이 주제를 놓고 씨름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바람에, 이제는 여신도회를 섬겨 오신 여러분들은, 이 주제에 관해서는 웬만한 신학자나 목회자 못잖게 식견과 방법들을 꿰뚫어 알고 계시지 아니할까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여러분들의 그런 기본적 소양이 오늘의 우리 교단을 든든히 받치고 있고, 또 한국교회까지도 밑받침 하고 있으며, 세계교회에까지도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고 봅니다. 제10차 WCC 부산대회가 바로 여러분들과 우리 교단이 붙잡고 씨름해 온 <정의.평화.생명>으로 개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제84회 총회에도 예외 없이, 여러분은 총회 주제를 그 큰 주제들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그 때에는 나라 안팎의 전쟁 위기가 고조된 상태에서 생명(生命)차원에 집중하였다면, 이번에는 그 생명을 발판 삼아 평화(平和)에까지 나아가자는 취지를 담았다고 봅니다. 비록 아직도 먹구름은 가시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번의 주제 선정은 화해와 평화의 햇빛을 보게 된 지금의 우리 한반도의 정세와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기에 나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에 비쳐진 평화에 관련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보다 적극적인 평화의 세상을 일구고 노래할 주역(主役)으로서의 여러분들이 되도록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오늘 소개한 세 본문 말씀들을 중심으로 저의 증언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할 것은 우리 정체성(Identity)입니다. 곧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택하심과 구원까지 받은 그의 백성이요 제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의, 평화, 생명을 말할 때에도, 언제나 그 분이 직접 말씀하신 내용에 대하여 꾸준히 확인하고 배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 베뢰아 교회의 가족들이 ‘주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라며 말씀을 상고하려는 자세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과연 나 자신은 평화의 사람인가를 살피보아야 합니다. 나부터 진짜가 아니면, 가짜를 이겨낼 힘과 지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때도 사실은 평화를 노래하는 때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온 천하를 장악하고 통치하면서, 그 치하의 모든 생명체들이 완전히 제압을 당하여, 감히 요즈음 자한당이 외치는 것처럼, ‘독재 타도. 헌법 수호’라고 말할만한 곳이 아예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제국은 자기들이 정치를 잘해서, 온 세상에 평화가 임했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Pax Romana를 외친 것이지요! 문제는 그 평화가 ‘누르는 자의 평화’였지, ‘눌림을 당한 자의 평화’는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힘 있는 소수의 노래였지, 빼앗기고 짓밟힌 다수의 노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모든 민중(民衆)들의 생존을 위한 전략이나 지혜는, 힘 있는 자들의 지배 앞에서, 무조건 ‘아멘’하며 사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당신의 종들인 하늘 천사(天使)들의 찬양(讚揚)의 형식을 빌려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의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平和)로다’(눅2:14). 

여기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란 대체 누구입니까? 그것은 곧 당시처럼 특정인들이나 누릴 평화가 아니라, 여러분들처럼 새로운 차원의 평화, 곧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릴 그런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평화를 안겨 주시려고, 예수가 오셨다’는 점을 천사들이 노래로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천사들의 노래의 파장이 어떨까요? 로마의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평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한복판에, ‘또 다른 평화’가 임하였음을 선포한 노래였는데. 그 파장이 어떨까요? 로마 황제의 일방적인 평화에 감히 ‘아니요’를 말하는 선포였기에-, 그 결과가 어떨까요? 예측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한 세상에 왕이 둘이 될 수 없이, 평화도 둘이 될 수 없잖아요? 자연히 가짜와 진짜의 힘겨루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겠지요! 당연히 운명적이고 및 세기적인 대 충돌(衝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첫 번째 크리스마스의 노래였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오신 예수의 운명은 처음부터 다양한 증언들로 밑받침되기도 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노인 시므온도, 그를 축복하면서도 그 부모가 듣기에는 매우 불길하기 그지없는 예언(?)을 남겼습니다(눅2:34-35).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예수님 자신도 당신이 평화에 평화를 주러 오신 자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다만 그가 주시려는 평화는 세상의 것과는 확연히 다를 뿐임도 분명히 하셨습니다(요14:27).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특히, 생전에 예수님은 거짓 평화와 위선적 평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셨는데, 그 중에 특히 가족들의 가족주의에 매몰된 평화(?)까지도 지적하며 질책하셨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가족문화와 종교의 틀 속에서 당시에도 수많은 가족들이 질식하여 죽어가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가족주의 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당신은 차라리 칼을 들고 그 가족의 분쟁과 분열을 택하겠다고까지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다.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12:51-53).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가정의 평화가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이루지 못하고서는, 세상의 평화를 견인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평화라는 험난한 과제를 풀기 위하여, 당신과 함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마5:9).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리고 무엇으로 우리가 하늘로부터 임하는 참 평화를 이 땅에 실현되게 하는 사람들(Peacemaker)이 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하여, 나는 오늘 창세기에 나타난 족장 이삭의 가정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여러분이 ‘세상 평화’가 아닌 ‘예수의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야곱 이야기를 잘 압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형의 축복을 가로 챈 속임 쟁이 야곱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이어 아브라함 가계의 제 3대 족장의 반열에 올랐고, 또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를 이룬 조상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이미지 때문에, 왠지 좋지 못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제시된 본문을 더 들여다보면서, 그 점의 숙제를 풀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면, 야곱이 형의 상속권이나 장자권을 취하게 된 일은, 모두가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이었습니다! 엄마인 리브가의 혁명적인 작업이 없었다면, 지금의 야곱의 등장은 물론, 심지어는 아브라함 가계(家系)도 존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연유를 알기 위해, 본문을 좀 더 들여다봅시다. 문제의 발단은 아버지 이삭이었습니다. 그가 늙어 눈이 흐려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죽음을 의식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문제는 단순히 육신적 눈의 흐려짐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 분별력(分別力)이 흐려진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뜻과 원하시는 바를 헤아리는 영적 분별력이 쇠퇴했음을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늙은 이삭은 자기에게 잘해주는 것을 선호하는 육정(肉情)만 강해졌습니다(27:4). 

 

그 바람에, 아버지 이삭은 장자(長者)란 육체적 표지를 무조건 우선시하였고, 에서가 사냥해서 종종 대접하는 맛있는 고기 맛을 잊지 못하면서, 그가 자신의 후사(後嗣)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에서가 이미 이방인 여인(헷 족속)을 둘이나 아내로 맞이하여, 집안과 부모인 자신에 커다란 근심을 안겨주었던 심각한 문제(26:34-35참조)에 대하여서는 그냥 덮을 수 있다는 입장에 선 것입니다. 게다가 두 아들이 뱃속에서 서로 다툴 때, 이삭이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미리 일어주신 말씀도 있었는데(창25:23참조), 이것과 저것 모두를 잊고 있었습니다. 실로 이삭의 판단력과 분별력에 구멍이 크게 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야곱이 아닌 자유분방한 에서가 끝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계승하게 되었다면-, 과연 아브라함 가계는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의 계보로서 온전히 존속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특히 에서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었기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순간은 아브라함 가계의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그 위기를 넘어설 대안(代案)을 찾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엄마인 리브가였습니다. 리브가가 볼 때, 야곱은 비록 차남이었지만, 내용적으로 아버지 이삭을 더 닮아서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주한 아들이었습니다(26:27절). 형과는 달리 부모의 뜻을 존중하여 엄마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25:28). 무엇보다도 그는 조상의 신앙 세계에 공명(共鳴)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매우 갈망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엄마 리브가는 이제 남편의 후계는 장남이 아닌 차남인 야곱으로 정해져야, 집안이 제대로 된 여호와의 가계와 역사를 계승하고 상속할 수 있다고 굳게 판단했습니다. 

 

그 일은 사실상 역사의 물꼬를 바르게 잡는 일로서-, 리브가가 그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며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일 자체를 심히 두려워하는 아들 야곱을 격려하면서, 그가 만일 그 일로 문제가 되어 저주를 받게 된다면, 그 모든 책임은 엄마인 자기가 도맡겠다고 약속하며 나왔기에(13절), 야곱의 역사가 그렇게 우여곡절의 과정을 겪으면서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약해진 남편을 대신하여, 역사의 방향을 올바르게 튼 이가 아내 리브가였습니다. 

 

리브가, 그녀는 무너져 내리는 가계의 종말론적 순간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생명을 노래하는 집안으로 되살려내기 위하여, 자신을 던지는 일을 과감하게 도맡았습니다. 그에게 관심한 일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가족이기에, 큰 아들이기에, 남편이기에, 무조건 받들어야 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두를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서는, 먼저 내 가족 안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우선해서 받들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살아난 것이 아브라함의 가계와 그 역사였습니다. 남편 이삭의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었고, 야곱을 생산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의 근간을 마련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종국에는 온 세상의 참 평화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조상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기장 전국여신도회 여러분, 평화에 대한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세상의 평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평화는 한없이 변덕스럽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견고하고 모두를 든든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스스로 존재할 힘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평화를 찾을 때, 그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이 세상의 평화입니다. 그 기초 단위는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자녀 되신 여러분,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쉽게 아무나 맡을 수 없는 그 평화를 위한 일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놀라운 집중력(集中力)을 가지십시오! 한순간에 승부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더욱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분별력(分別力)을 보유하십시오! 저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이신 리브가의 그 분별력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총회가 약해질 때, 교회가 흔들릴 때, 가정과 자녀가 방황할 때, 우리의 이웃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여러분은 그들의 머리가 되어 주시고, 손과 발이 되어 주시며, 양심이 되고 입술이 되어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을 바로 잡아주고 세워주십시오! 그게 우리 시대와 다음 세대를 살려낼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런 모습은 여러분이 오랫동안 잘 씨름해온 것이기에 낯설 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긴 싸움을 꼭 이겨내서, 끝내 그리스도의 평화의 세상을 활짝 열고 노래하게 될 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에게 부여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이리제일교회당에서/ 5.28 /  최부옥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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