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되게 하시는 예수(주현절 둘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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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하시는 예수 겔37:15-23/ 엡2:11-22/ 마12:22-32 주현절둘째주일(2018년 1월 14일)
평창 동계 올림픽이 다가왔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남북 당국자회의에서 북한은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 그리고 문화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고 우리는 북측의 선수들과 사절단이 방문하는데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적극 협력하기로 합의 했습니다. 민족적으로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남북이 하나 되어 함께 참여하기로 한 결의로 그동안 경직되었던 남북관계의 물꼬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루시려 했던 일은 “하나 되게 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이시지만 완전한 일체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또한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하나 됨의 교제와 사귐 안에 들어오게 하셔서 우리와 하나를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깨뜨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 단절을 가져와 마침내 온 세상은 하나 됨을 상실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평화’와 ‘화해’입니다.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이웃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을 원하시는 하나님(겔37:15-23)
이 세상은 항상 분쟁과 싸움, 대립과 갈등으로 가득합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이 세상가운데 온전한 화해와 화평이 이루어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한 민족, 한 하나님의 백성, 한 신앙, 한 아버지, 한 율법, 한 성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 북이 갈라져 두 나라가 되었고 오랫동안 서로 대립, 갈등가운데 살았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하나가 안 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됩니까? 이 갈라진 남북왕국을 하나님이 강제로 그의 손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19-22) 보십시오! 분열왕국 이스라엘은 끝내 강력한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자중지란으로 함께 망하고 말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망하여 아시리아의 포로로 잡혀갔고 남 왕국 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아시리아제국을 정복한 바벨론에게 망하여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두 나라의 갈등이 언제 끝난 줄 아십니까?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후에 먼저 아시리아에게 잡혀간 북 왕국 이스라엘과 포로 된 신세로 둘이 만났을 때입니다. 그제야 둘 사이의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남 왕국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예루살렘에 귀환할 때, 북 왕국 난민들 일부도 그 귀환행렬에 함께했습니다.(렘31장) 스스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손이 강제로 그 둘을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귀환한 후 불행하게도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을 떠났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분쟁, 갈등의 삶으로 돌아가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강대국을 통해 강제적으로 잠시 함께 모을 수 있었으나 그 강제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온전한 하나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목의 제물 되신 예수(엡2:11-22)
화해와 화평을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의 사건은 하나님이 친히 화해의 문을 새롭게 여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가 먼저 화해의 문을 여셨습니다.(또 오셔서, 17절) 화해는 원수가 먼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원수는 내게 먼저 오지 않습니다. 기다리가 안되면 원수가 굴복해서 마침내 두 손 들고 오도록 압박해보지만 압박할수록 원수와의 관계는 더욱 꼬이고 빗나가고 맙니다. 화해는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화해의 문이 열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스스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해의 값을 그가 대신 지불하셨습니다.(십자가로, 16절) 화해는 맨입으로,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 화해는 엄청난 값을 누군가 대신 지불하고 그 희생의 피로 원수의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상호주의적 대화”로는 남북화해가 불가능합니다. 북쪽에서 우리에게 대하는 만큼 ‘상호주의적’으로 대해보십시오! 당장 전쟁입니다. 파탄 납니다. 불신의 골만 더 깊어질 것입니다. 손해 보고 퍼주어야 합니다. 뻔히 저들의 계략이 보여도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우선입니다.(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16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이웃과 화목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풍성함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큰 용서를 받아야 그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이웃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 충격적인 사랑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달려가 원수의 목을 끌어안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야 과거가 없어지고(고후5:17) 장벽과 담이 없어지며(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4-15) 차별이 없어집니다.(외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19절)
화해의 공동체(마12:22-32)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말했습니다.(24절) 예수가 미우니 예수께서 행한 성령의 역사까지 부인하는 성령 훼방죄를 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이 미우니 아예 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능력까지도 부인하고 외면하며 삽니다. 교인 때문에 예수에게까지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교인들은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다 이제는 기도도 안하고 불평하며 예배의 은총을 상실하고 마침내 교회를 떠나 ‘안 나가’교인이 되고 교회를 앞장서서 비판하는 자리에 서기도 합니다. 교회의 많은 직분 자들이 목사와 갈등하며 미워하고 분노하다 점점 하나님의 말씀마저 듣기를 거절하고 신령한 은혜의 자리마저 회피하며 그 마음이 황폐한 사막처럼 된다면 이게 얼마나 큰일입니까? 마귀가 손뼉 치며 기뻐할 일입니다. 한 순간 온 세상이 마귀나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쟁하는 나라는 설 수 없으며 예수님의 귀신축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표적임을 말씀하셨습니다.(25-28절)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 앞에는 함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는 갈등의 골이 깊을수록 함께 서야 합니다. 눈물로 기도하여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는 일에 함께해야 합니다. 전쟁 앞에서는 함께 싸워야지 서로 다투겠습니까? 분쟁과 갈등이 없을 수 없으나 대적들과 함께 싸우고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주의 일 하다 “분쟁”과 “갈등”에서 속히 벗어나야지 그 속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는 망합니다. 자중지란으로 패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에 대한 상처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잠시 그 갈등을 멈추고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기도하는 자리에, 말씀 듣는 자리에 서서 함께 대오를 정리하여 우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대적인 강한 자부터 결박하는 일에 우선 힘써야 합니다. 적군을 앞에 두고 자중지란하시겠습니까? 무엇이 우선입니까? 강한 대적과 싸우는 일이 먼저입니다. 대적들이 우리 주변에 진을 치고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전쟁하러 왔는데 성도들 간의 작은 갈등문제로 갈라져 싸워야 합니까? 싸움을 멈추십시오! 이 어리석은 갈등에 더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강한 대적에게로 우리의 전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갈등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함께 힘을 모아 우리의 강한 대적을 결박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전리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화해’와 ‘평화’입니다. 오해를 풀려고 해명도 해보고,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려고 인간적으로 애쓰면 애쓸수록 더 깊은 오해와 갈등의 자리에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인간관계가 더 꼬이고 헝클어집니다. 그런데 갈등으로 인한 아픔을 하나님께 맡기고 함께 우리 대적과 싸우는 일에, 뜨겁게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함께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이웃들의 결박을 푸는 일에 힘쓰다 보면 어느새 서로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마음이 되살아나고 오히려 쉽게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앙인과 종교인
A.W. 토저는 종교인과 신앙인을 이렇게 비교했습니다. 1) 신앙인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지만, 종교인은 예배를 방청할 뿐입니다. 2) 신앙인은 자신을 회개하지만, 종교인은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3) 신앙인은 시간과 더불어 신앙인격이 깊어지지만, 종교인은 자기 의가 더욱 높아질 뿐입니다. 4)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만, 종교인은 자신의 뜻을 추구합니다. 5) 신앙인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만, 종교인은 세상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6) 신앙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지만, 종교인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합니다. 7) 신앙인은 예수님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지만, 종교인은 예수님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8) 신앙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만, 종교인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9) 신앙인은 사람을 치유하지만, 종교인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10) 신앙인은 영적 설렘이 있지만, 종교인은 영적 메마름이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은 우리가 아직 어둠의 권세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임재 앞에 있는 사람은 우리의 참 대적이 누구인가를 알고 우리가 참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아래 있는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도 압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