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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강연 --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1) / 한목협24차 총회

관리자 2023-06-21 (수) 11:16 10개월전 112  

<주제> -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

                  (창12:1-3, 시146:5-9, 막12:28-34, 행1:6-8, 엡2:14-22)  


                                                                                                                        최부옥 목사 (기장, 한목협중앙위원, 말씀목회연구원장) 

                                                         

들어가는 말 :  


1. 한목협에 참여하면서 가졌던 설레임  


우리는 1998년 11월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가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출범하던 그 날의 기쁨과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전국교회 총 13개 교단들의 목회자 갱신그룹들이 모여-, 한국교회가 이제 비로소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가 함께 만나서, 새롭고도 참된 유형의 한국교회가 출범했음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URD라는 이름, 곧 일치(Unity)+갱신(Renewal)+섬김(Diakonia)의 이름 아래서 서로 다른 우리들이 주 안에서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우리들은 성 프란시스의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란 기도문을 응원가처럼 자주 불렀고,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사랑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라는 <부흥>의 노래도 계속 불렀다. 생산적인 모임과 활동도 활발해서 세상은 한목협의 증언과 활동을 주목하는 상황도 전개되었다. 


교회의 일치 운동은 한국교회의 진보수의 장벽을 허무는 일이었는데, 한목협은 그 일에 커다란 성과를 유발했다. 각 교단의 유력자들이 대거 한목협의 연합활동에 동참하면서, 우리들은 서로가 보유한 장단점을 벤치마킹(공유)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기회로 만들면서, 목회자 자신과 교회를 공교회 차원으로 보다 성숙하게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비록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힘이 한창일 때에는 소속 교단장들이 모여, 한국의 양대 연합기관인 교회협와 한기총이 단일 기구로 나아가게 하자는 운동까지 전개하기도 하였다.   


갱신(更新)운동은 소속 회원들이 자체 교단의 정화 및 회개운동들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교단 내부의 교단장 선거부정과 구조적 갱신운동에도 깊이 관여하면서, 금권 선거가 아닌 제비뽑기 등의 깨끗한 선거혁명도 이끌었다. 또한 교단마다 나름대로의 건강한 목회자 활동을 고양하고자 갱신그룹을 활용하면서, 적잖게 기여해왔다고 본다. 특히 매년 6월에 개최된 몇 일간의 전국대회는 서로 다른 교단의 목회자들이 모여 서로 상대를 익히고 배우는 대 축제의 장이었다. 그리고 몇 년마다 한목협이 성도들의 의식조사를 실시하고 발표하여,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바람직한 목회 방향을 제시한 일들은 매우 큰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속한 기장의 21세기 목협도 교단의 목회역량들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계간 회지를 발간하면서 전국 목회자에게 목회력 함양을 목표로 다양한 목회정보를 취합하고 개발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건강한 교회와 목회자 생산은 말씀목회 향상으로 가능함을 알고 꾸준히 노력했다. 발제자인 본인도 한목협의 이런 가치관과 도전들을 통하여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 특히 본인의 말씀목회연구원(www.wpci.kr) 사역도 바로 한목협의 열매의 일환이었다고 고백한다. 


섬김 운동은 한목협이 가장 꾸준히 실천해온 영역이었다. 매년 부활절과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이웃들이자, 사회적으로 강도만난 이웃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예배하며 사랑의 손길을 펼치는 행위를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에는 교도소에도 방문하면서, 문제의 현장들에 참여하여 예수의 사랑과 복음을 나누며 전파하였다. 

 

2. 한계 앞에서 선 우리, 다시 되찾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 


이러한 지난 24년간의 우리들 나름대로의 소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너무 안타까운 처지에 있고, 숱하게 많은 장벽들 앞에 직면해 있다. 자주 듣게 되는 소리 중 하나는,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시대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해 주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는 각종 종교여론조사들에서, 기독교가 가장 낮은 신뢰도를 얻고 있음에서도 확인된다. (예) 학교폭력의 문제로 화제가 된 영화 <더 글로리>에서도, 학폭의 집단 가해자 중 하나가 대형교회 목사의 딸이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세간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음을 엿보게도 하는 장면이다) 


코로나 이후에 들어선 요즈음은 우리 기독인들의 수도 크게 내리막길에 들어선 게 분명하다. 한 때는 국민의 20%는 넘는 1000만 이상의 성도들이, 최근에는 이리저리 빼고 계산하면, 매주 약 500만명 정도의 성도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샘이라는 통계보고도 있을 정도이다.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쳇 지피티(Chat GPT)를 비롯한 고도의 각종 AI 인공지능 시대가 활짝 열려서, 그들로 인한 사회적 파고(波高)들이, 우리 교회의 목회와 강단에까지도 밀려들어 왔다. 이것은 코로나 때문에 지난 몇 해 동안 교회 출석을 하지 않고도 예배나 설교가 가능한 시대라는 인식이 퍼진 데에다, 이런 인공지능을 이용한 다양하고 편리한 설교 및 예배 매체들까지 손쉽게 개인의 손안에서 접할 수 있게 된 상황이 되었음을 뜻한다. 마침 지난 주일에는, 독일 바이에른 주의 성 바울교회에서 약300명 교인들을 상대로, 쳇 지피티 목사가 수염을 기른 아바타의 모습으로 등장하여서 주일예배를 이끌기 까지 했다. ‘현재에 집중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도 전했다. 이는 영혼 없는 설교가 범람하는 시대가 우리에게 더욱 활짝 열렸음을 말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현재의 교회 목회자들의 설자리는 더욱 좁아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 이 대변혁의 거센 폭풍을 현재의 우리 연약한 교회들이 어찌 감당할 수 있을 건가!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변화는 예측이 불가하며, 그 파장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은, 마치 풍랑을 만나 우왕좌왕하던 갈릴리 바다의 뱃속에 있던 제자들의 모습과 비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막4:35-38참조).  


지금도 처처에서는 생존을 위한 교회와 목회자들의 비명들이 계속 들리고 있잖은가! 교회들의 통폐합, 폐쇄, 목회자의 이중직 허용 등-. 그럼에도 소망이 있다면 이 풍랑 인연하여서 우리를 더 빨리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4:38-41절). 그 주님을 깨우던 제자들의 심정으로 지금 우리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들은 우리 내부의 역기능적 모습들에 있다. 교회가 세상에 발산할 예수의 향기가 바닥이고, 복음의 가치들이 무너진 일들이 가장 큰 문제이다. 현재의 우리는. 저 ‘머리가 깎여서 들릴라의 품에 안겨있는 저 삼손’과 같고(삿16:19-21), 복음과 사랑의 역동성을 상실하여, 강도 만난 이웃들을 돌아볼 영혼이 없었던 저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들과 흡사한 데 있다(눅10:30-32). 세상의 불의를 막아줄 힘이나, 약자들을 대변할 지혜나 능력이 없는 교회가 된 것이 문제이다. 이를 어찌할까? 


(특히 말씀의 사유화가 우리 교회를 타락하게 했다. 그 바람에 최고의 공의가 되어야할 교회가 자신과 집단의 이익단체가 되게 했다. 다시 닫힌 진보와 닫힌 보수로 회귀한 상황이 되게 했다. 어려울 때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논리도 있지만, 어떤 말씀을 붙잡아야 할지, 헤매는 실정이다. 서로 자기가 잡고 있는 한 모퉁이가 전부요 전체 인양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연구원은 역시 삼위일체론적 성서접근이 가장 보편타당한 말씀에로의 길이라는 확신 속에, 오늘 주어진 주제 강연의 틀도 그렇게 준비했다. 성부성자성령의 입장들을 각각 소개하되, 결과는 하나임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 일에는 지난 2년간 본 연구원이 발간한 사도행전(복음), 민수기(율법)의 내용이 큰 자료가 되었음을 밝힌다. 여기 참석자들에게 드리려고 약간의 서적들을 가져왔으니, 필요하면 받아 가시기 바란다 – 이 내용은 구두의 증언이었음)


‘믿는 자여, 어찌 할꼬’라는 성령의 탄식이 크게 들린다. 그러기에 우선 정체성의 재확립이 시급하다. 이제 그 답을 위하여, 먼저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아야 하겠다. 


o 우리가 누군가 - 우리의 정체성(Identity) 찾기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삼위일체적 정체성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둘째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셋째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할 증인들이고 전해 줄 선교인(宣敎人)들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 상호간에 밀접하게 연계된 하나이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펴본다.  


o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그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뢰는 신구약 성서 전체에 가득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다(마1:1). 예수께서 소개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보면(눅16:24-31), 그의 위상은 정말 대단하다. 그는 하늘 심판대에서, 거지 나사로에게는 자비를, 부자에게는 심판을 선언할 정도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존재감은 강고하다. 세계 4대 종교인들(개신교,천주교,유대교,이슬람)도,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데에, 모두 일치한다.


그의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신뢰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고향-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 할 땅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1절)과,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2-3절)에 온전히 순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어떤 존재로 세우고 싶으셨을까-? 이를 위해서는,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의 내용(2-3절)과 특성을 우선 들여다보아야 한다. 


먼저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리라’(2절)는 첫 번째 복을 살펴보자. 인간이 스스로 복의 주체인 근원과 뿌리가 되는 일은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바로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굳게 맺어질 때에는, 가능해진다. 다만 필수 조건이 있다. 복의 원천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하나님 사랑이면 되는가? 십계명과 예수님이 제시하신 수준, 즉 ‘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면 된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신6:5,막12:30 참조)


그러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3절,하)는 두 번째 복은 어떤 것인가? 내가 받은 복을 나 혼자만 누리지 아니하고, 받지 못한 세상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는 일이다. 곧 ‘이웃 사랑’의 복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 곧 내 마음을 열고, 펴서 살려는 분명한 의지만 있으면 된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바로 그런 성격의 복이었다! 받기도 해야 되고, 또 반드시 주기도 해야 되는 복이었다. 

 

그런데 이 두 복들에는 큰 특징이 있다. 이 두 복들이 package처럼, ‘서로 성격이 다른 두 가지가 서로 하나로 묶여져 있는 것이다(option). 곧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패키지 복’, 곧 그 둘 중에 하나만 취하려고 하는 순간, 남은 다른 하나는 아예 무효처리가 되는 그런 일괄처리(一括處理)형의 복을 받았다. ‘전부냐 전무냐’(All or Nothing)형이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본질상 하나로 묶여서 함께 취급되는 유형이었다. 이 얼마나 독특한 복들인가-!


결국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이 불가분리의 사랑의 시스템을 수용하면서, 생각 밖에책임과 부담이 크게 부여된 복을 받았다. 진정 큰 멍에였다! 그는 ‘복 받는다’는 것부터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야만 하게 되었다. 복은 좋지만-, 그러나 거기에 걸맞은 세상과 이웃을 향한 책임과 부담을 함께 감당해야만 되었기 때문이었다. 


o 복(福)을 이중적 계명의 틀 속에 묶으신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주셨을까? 이는 사랑에도 위험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기복주의에 빠져서 희생이나 섬김이 없는 야욕의 도구가 될 위험이 있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간사랑은 그 중심을 상실한 사랑이 되어서, 교만해지거나 공의를 잃어버린 것들이 될 수 있기에, 이 둘의 상호견제와 보완으로 사랑의 온전함을 확립하고, 또한 값싼 사랑을 피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한 틀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을, 처음부터 하나의 구원의 옵션으로 묶어서 그의 백성들을 건강한 사랑의 사람으로 세우고자 하셨다! 기독교를 일원론 종교로 세우셨다.  


하나님은 그런 당신의 선하신 뜻에 아멘하고 수용하는 아브라함을 기뻐하셨다. 그때부터 그가 받은 복의 실체가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교와 섬김, 교제와 나눔들을 통해서 였다. 사실 이러한 복들은 모든 생명체들의 머리가 되는 복이었으며(신28:13참조),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이었다(창12:2-3). 


o 이웃 사랑이 흔들릴 때 – 이스라엘 신앙의 실패의 결정적 요인 


하지만 실제적인 큰 문제는 이웃 사랑에 있다. 이웃 사랑이란 말과 생각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그 어려움을 체득해야만 나올 수 있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실현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그 모델로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의 ‘이웃 사랑’의 연단은 매우 낮은 곳과 밑바닥 에서부터였다(시146:7-9참조). 시작은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부터였다. 그것도 그들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짓눌리고 빼앗기고, 나그네 되어서, 헐벗고, 병들고, 두들겨 맞기도 하며, 그래서 주변에서 고통 당하는 숱한 이웃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소위 ‘좋은 이웃’이 될 실전 훈련을 정말 무려 400여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웃 사랑을 본격적으로 실천해야만 했다. 그 때 그들 가슴에는, ‘너희는 종(從)이었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 그것을 망각하면 내가 멸(滅)하겠다’(신15:15을 비롯한 신명기 전체)라는 경고용 딱지가 항상 붙어있었다. 그러면서 언제나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과부-나그네들, 그리고 경제적 약자인 제사장-레위인을 돌보는 생활들이 옵션으로 부과되었다. 그들의 세 절기들(유월절-칠칠절-초막절) 중에서 후반의 두 절기들은 모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요구되는 때이기도 했다. 그때 그들은 건강히 살았다. 


그런 이스라엘이 비극(悲劇)에 빠져 든 것은 조상이 받았던 패키지의 복들을 저버릴 때였다. 그들이 세상의 왕정체제를 택하면서, 권력과 돈과 정파와 전쟁의 맛에 빠져들면서, ‘하나님 사랑’만 붙들고, ‘이웃 사랑’을 외면할 때였다. 인간을 신분과 소유와 환경에 따라 차별하고 교만을 부리면서부터였다. 이에 하나님은 격노하셨다. 그것은 당신과의 계약 위반이었고, 아브라함 자손임을 포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 일들, 곧 약자를 착취하고, 불의로 재물을 모으며, 힘없는 자들에게 군림하면서, 당신 앞에 나와서는 마치 흠 없는 자처럼, 뻔뻔하게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제사를 아주 역겨워하셨다(소선지서들 참조). 그들이 당신을 성전 안에서 제물이나 받고, 복이나 베풀어주는 신으로 취급하며, 세상과 인간의 일과는 상관이 없는 신처럼 예배와 삶을 분리하는 행태를 맹비난하셨다. 그런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교를 죽은 종교로 만들었고, 백성들을 길 잃게한 것이다. 이는 생명의 종교를 안팎이 다른 이원론 종교로 만든 것이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나라가 남북의 분열과 패망으로 이어졌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우상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참혹한 멸망을 당했다. 그들의 잔인한 혼혈 정책으로 인하여 문제의 사마리아인들이 생산되기도 했다. 남왕국 유대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여년의 서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어지는 제국들의 식민지 백성으로, 주권상실의 나락 속에서 탄식하며 살아야만 했다. 


o 예수 오심과 성령의 강림 – 무너진 구원의 방정식을 복원시키려고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나? 그런 잘못된 얽힘으로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고자 오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처음의 복의 구도’를 회복시키고자 오셨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주님은 당시에도 여전히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이웃사랑은 외면하며, 편협한 종교관으로 수많은 죄인들만을 양산하던, 당시의 유대교와 치열하게 싸우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뽐냈지만, 주님은 신앙과 삶을 분리시킨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사정없이 책망하셨다(요8:44 참조).


그 유명한, ‘무엇이든지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니라’(마7:12절)는 황금률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대접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대접하여야 하는 의지적 마음을 절묘하게 함께 묶어주신 주의 말씀이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복의 패키지적 실체를 연상시키신 말씀이다. 이는 산상설교의 핵심 계명으로서의 ‘이웃사랑’을, 최상의 법으로 제시하신 말씀이었다(마5:38-48참조, 22:36-40, 눅6: 31, 롬13:8-10. 갈5:14).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지키는 데에서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다(막12:28-31). 그러면서 당신은 친히, 이웃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모델이 되셨다. 그들 유대 종교가 인과응보란 미명 하에 아예 외면하며 버렸던 죄인들, 여자들, 아이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성소수자들(마19:12,사56:3-5참조), 이방인들과 같이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자들을 친히 찾아가셔서 교제하시며, 그들의 친구로 사셨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편에 계신 지를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당신의 사람들에는, 그런 소자들을 선대한 일이 곧 당신에게 한 일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여건을 갖고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영벌이 있으리라’고도 경고하셨다(마25:41,45참조). 반면에 죄인이었던 세리 삭게오의 이웃 사랑에로의 회심을 아브라함의 후손다운 행위라고 높게 평가하셨고(눅19장),강도만난 자를 선대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선한 이웃’이란 높은 평가를 내리셨다.


o 흔들리는 교회, 길을 잃고 자기 방어에 급급한 한국교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믿음과 사랑의 복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우리가 꼭 지켜내야 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소중한 힘들을 혹 사탄에게 빼앗긴 것은 아닌가? 세기적 대재앙이었던 코로나19 판대믹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의 부족 때문에서 왔을까, 아니면 우리의 이웃사랑의 품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온 것일까? 


작가 김훈의 소설 <흑산(黑山)>을 보면, 우리 역사에 들어온 초기의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이 어떻게 백성의 삶속에 자리하였는지를 소개하는 글이 있다. 그 속에는 말씀을 들은 부자 교우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기 종들에게 나누어주고, 종의 문서를 포기하며 그들에게 넘겨주던 일들이 나타난다(행2:43-47참조). 교회가 세상에 새 구원의 질서를 들여다 놓았던 놀라운 모습이었다! 처음엔 미친 짓 같이 보였으나, 그게 결국 당시의 어두웠던 세상을 살려낸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령이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들을 세우셨고, 성도들을 부르셨다. 이 일들은 하나님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인간들을 사랑하는 일까지도 보여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의 분리는 신형 이원론이고, 보이지 않는 이단에 불과하다. 교회를 죽은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이다. 아브라함 후손의 교회일 수 없다.


절대 잊지 말고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 하나님 말씀에는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제시한 사랑의 가이드라인(guide-line)이 선명하게 있다.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은 목숨을 다하기까지 해야 하고(막12:30참조), 이웃 사랑은 원수(怨讐)까지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마5:44,롬12:18-21참조). 


이 복의 실체는 모세가 등장하고, 예수께서 오심으로서 참 모습을 드러냈다(요4:22참조). 모세와 예수,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모세는 율법을 동족에게, 예수는 복음을 세상 만민에게 전하셨다. 인류는 바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원의 도리’를 접하면서, 그 말씀의 빛 아래로 다 모여 들게 되었다. 그 빛 아래에 모이는 이들은 누구나 눈과 귀와 입이 열리는 기적과 구원을 맛 보게 되면서(행2:21,겔36:27-28참조), 이 세상과 이웃을 선도하며 사는 주역들로 등장하였다. 지금의 우리들은 과연 그 자리에 있는가?


o 한목협의 과제 – 삼위일체 하나님이 제시해 준 세계를 붙잡아야 


코로나 이후에 들어선 한국교회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이 때에 꼭 필요한 것은 어떤 것들일까? 그 동안의 교회의 안일하고 나태한 태도와 비성서적인 행위들에 대한 깊은 회개와 반성들이 선행되어야 한다(사32:9-14참조).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을제대로 전하고 보여주지 못하고 살아온 일들을 성찰하고 회개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교회가 어떤 점에서 세상의 신뢰를 잃었고, 또 선교의 동력을 상실했는지를 찾아서 고쳐가야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정직한 고백이 절대 필요하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 한목협 차원에서 전국 교회들과 함께 씨름하면서 극복해내야 할 일들이 있다고 보기에, 이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우리들에게 제시해주신 세계이기도 하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이 모세에게 제시한 나라다(신4:6-8), 곧 ‘큰 나라와 큰 백성’을 이루는 일이다. 둘째는 성자 예수님이 꿈꾸신 그 나라 백성이 되도록 전력하는 일이다(요18:37). 곧 ‘진리를 듣고 실천하는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이다. 셋째는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서 제시한 나라와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이다(엡2:14-22). 교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퉁이 머릿돌이 되어 화해와 상생과 평화를 온 누리에 이루도록 하는 일’이다. 이제 이 세부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겠다.  

  

성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이시면서 밝혀주신 뜻은, 바로 그들을 온 세상에서 ‘큰 나라와 큰 백성으로 세우시는 일’이었다(신4:6-8). 여기에서의 ‘큼’이란, 국토나 인구나 광물이나 군사력 같은 가시적(물적)인 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에서, 그리고 생각과 마음에서 큰 백성이었다. 온 세상을 품고 도우며 살 수 있는 영적 크기였다. 영어로는 ‘big’이 아니라 ‘great’였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밝히셨던 그의 나라인 진리의 나라를 주목하자. 주님은 ‘당신은 그 진리를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기에, 나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다(요18:37). 주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라고 소개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진리의 실체적 모습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곧 힘센 자 중심이 아닌 약한 자 중심이었다. 의인보다는 죄인부터 살리시려는 방식이었다. 건강한 자 우선이 아닌 약한 자 우선이었다. 한 쪽만의 승리가 아닌 양 쪽 모두의 승리였다. 하나님 사랑만이 아닌 인간 사랑과 함께하는 방식이었다. 정죄보다는 회복이었다. 억압이 아닌 격려였다. 따돌림이 아닌 함께였다. 정의, 평화, 생명의 축들을 견고하게 이 땅위에 세우시고자 하셨다. 그게 바로 예수의 진리의 실체였다. 이 모습은 강자와 부자 중심, 스타와 영웅중심, 힘과 능력중심인 이 세상의 방식과는 아주 다르다. 


성령 하나님의 경우는 어떤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인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주님 예수를 <모퉁이 머릿돌>로 온 세상에 소개했다. 왜 그랬나? 그의 선교현장은 언제나 서로 다른 차원의 영역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동과 서, 남과 북, 강과 약, 부와 가난, 지식과 무지, 정상과 비정상, 군림과 배척 등으로 진정 서로 하나 되기 어렵기만 한 곳들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의 머릿돌 론(論)을 내세우면서, 이 상극적 대상들을 향하여 선택이 아닌 포용과 보완으로, 단독보다는 하모니로, 군림보다는 섬김으로, 독점과 독주보다는 채움과 인내로 서로를 돕고 살릴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러기에 이 문제 해결자인 예수가 온 세상 만민의 구주이심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런 선한 가치관과 목표가 뚜렷한 교회 이루기가 우리 한목협의 목표가 돼야하지 않을까? 여기에 함께할 교회들은 격려해주고, 맞서고 거슬리는 세력들과는 경고하고 일깨워주는 선한 일꾼들이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 내부의 현안들을 다시 본다. 우리 교회들이 지금 얼마나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보려고 한다. 


o 한국교회 발전에 발목을 붙잡고 있는 어둠의 족쇄(足鎖)들 :   

- 복음과 진리보다 이념(理念)에 사로잡힌 한국교회를 구하라 


세칭 태극기 부대를 이끄는 전광훈 열풍이 심각하다. 그를 최고의 선지자로 추앙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은 그를 마치 메시야처럼 추종한다. 그의 한 마디로, 여당에 집단 당원으로 들어가게도 하고, 특정 교회에는 그 교회 목사를 종북 좌파라면서 공격하는 시위도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태극기 부대원들이 있는 교회들이 많다. 문제는 그가 ‘목사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묻는다. 그가 하는 일들이 성경에 부합된 부분이 무엇인가,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는 교회를 살리는가, 죽이고 있는가? 


그들이 거리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 교회를 매우 불신하게 한다. 그는 예수와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치 아류(亞流)임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활동들을 보면, 지금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반드시 우리 교회가 극복해야만 할 과제들이기도 하다. 대략 세 가지 문제들이 보인다. 그게 무엇인가?  


1) 이념(理念) 지상(至上)주의 문제이다. 전광훈 신앙과 그 집단이 보여 준 심각한 이단적 모습은 무엇인가? 분단이 가져온 배타적 이념이 교회의 최고의 가치인 사랑-화해-평화보다도 훨씬 우위에서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보수 동류(同類)들이라는 목회자들이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거나 요구를 거부하면, 그 거친 입으로 사정없이 그들까지도 ‘빨갱이’, ‘배신자’로 정죄한다. 이에 적잖은 목회자들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동조한다. 반발이 일어나면 공개사과도 한다. 실로 교회와 목회를 무한히 추하게 만들고 있다. 이게 진정 왕 마귀 짓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조국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전쟁 없이 민족의 화해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루려는 일은 그 자체가 복음 운동이자 진리와 생명인데도,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런 접근 자체가 아예 좌파적 행동으로 매도되고 있다. 진리를 선포할 자유가 억압 받는다. 예와 아니요를 못하고 있다. ‘종북 좌파’, ‘빨갱이’라는 극우적 표현을 일삼으면서 민족들과 교회들까지도 편 가르기 하는 어리석음을 교회가 하고있다


그러면 왜 한국교회가 이런 좌파 혐오의 늪에서 허덕이는가? 그 원류는 해방직후인 1948년, 남북총선문제로 인하여 4.3제주에서 자행된 3만 여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의 대량 학살에 서북기독청년단이란 월남한 기독교 세력들이, 그 학살의 주역으로 활동한 일에서 기인한다. 이념문제로 인한 동족말살 행위의 첫 대참사였다. 문제는 그들이 그 후에 한국기독교계의 보수 진영의 주류세력이 되었고, 그 참사에 대한 회개나 참회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6.25와 분단을 거치면서, 그런 반공(反共) 이념이 교회들의 신앙과 진리의 최상위 자리를 점해 온 것이다. 


이 강고한 인간적(人間的)교리는 그 후 한국교회의 정상적 신앙 흐름을 크게 왜곡시켜왔다. 이 교리는 예수님의 ‘원수도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데드라인도 간단히 무력화시켜버렸다. 이는 손양원 목사 같은 이가, 자신의 아들들을 살해한 공산주의자를 용서하며 그 살인자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음으로서, 한국교회 신앙사에서의 원수 사랑에 대한 최고의 믿음의 감동과 품격을 안겨 준 일을 완전 희석시킬 정도로 위세를 떨쳐왔다. 참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현상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어떤 유형의 신앙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 한국 신앙인의 참된 자존심인 손양원 신앙의 회복이냐, 아니면 서북학살 세력의 계승이냐? 한국교회가 보여주려는 예수의 얼굴은 무엇이겠는가? 사랑의 얼굴인가, 폭력의 얼굴인가?  


2) 동족(同族)문제이다. 태극기 부대들은 어떤 통일을 원하는가? 동족(同族)인 북한을 향한 그들의 언행은 우리 교회들에게도 심각한 장애와 후유증을 안겨 주었다. 특히 현 정권이 들어선 이래, 북한과 그 세력들을 원수시하고 철저히 제거해야할 세력으로 몰아가면서, 나라의 전쟁 위기는 고조되었고, 동족과의 공존의식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성서가 제시한 동족에 관한 윤리를 조금으로도 알고는 있는 것인가? 이 부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도 살펴보자. 


광야 40년을 마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때, 모세는 여호와에게서 특별 명령을 받는다. 주변에 흩어져 사는 동족과의 전쟁이나 마찰을 엄중하게 금하신 것이다. 야곱의 쌍둥이 형제였던 에서의 후손들인 세일 사람들이나,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 자손인 모압과 암몬 족들과의 전쟁을 엄금하셨다(신2:5,9,19 참조). 


예수님의 사마리아를 상대하신 모습도 그 맥락이다. 정통 유대교가 혈통적으로 부정한 자들이라고 철저히 혐오하고 배제한 사마리아를 예수님은 적극 품으셨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반드시 구원받고 회복되어야할 대상으로 보셨고, 당신의 제자들에게까지도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발전시키도록 명령하셨다. 성령께서도 제자들과 선교사들을 계속 사마리아로 파송하시면서, 그들도 구원을 받게 하셨다(행1:8). 이런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 남북 분단으로 고통 하는 우리나라와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유념하고 엄수해야할 진리요 지상명령이 아니겠는가! 


동족은 하나님이 핏줄로 묶어주신 연(緣)이다. 그러기에 동족 문제는 절대로 서로평화로이 해결하려고 접근해야지, 힘으로 누르거나 짓밟거나 원수 관계로 보면서 접근하면 매우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은 가족이나 혈족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푸는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성경은 이 미묘한 동족 문제에의 접근에 대한 예시(例示)도 제공한다. 곧 창33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깊은 두려움 속에서 만나면서 화해와 평화를 위해 드러낸 모습을, 가장 지혜로운 표본으로 제시한다.  


평화나 화해의 몸짓은 세상이 못하면 교회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선도할 수 있다. 남북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이다. 남북이 가까워지면, 주변 나라들이나 온 세계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려고 하지만, 동족이 서로 싸우면 우리는 결국 온 세계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되고, 그들의 종속 국가가 되고 말것이다. 교회는 동족 문제를 재정립해야만 한다. 대립과 파멸이냐, 화해와 평화냐? 


3) 강대국(제국) 의존 문제이다. 태극기 부대의 손에는 성조기, 이스라엘기, 심지어 일본기까지 들려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대신에 주변의 패권(覇權)국가들을 더 의지하고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태이다. 참 두렵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 특히 우리 교회 안에는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편 가름 언어들이 난무하다. 일부 정치권에서나 사용하는 용어들, 종북 좌파, 친일파, 친미파, 친북세력, 친중파 등등이다. 이는 모두 자기 안에 그리스도나 믿음도 없음을 보여준 모습이다. 


게다가 현 정권이 북한과의 침략 야욕을 저지해야한다는 미명하에, 한미일(韓美日) 동맹에 매달리면서, 북한을 자극하며, 일본과 미국의 요구에게는 절대 굴종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에, 국민들의 자존심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상처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의 입에는 핵무장, 핵전쟁, 핵 이야기 등의 전쟁을 자극하고 불러오는 발언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하다. 미국과 일본은 정말 우리의 친구와 방패막이가 되어줄까? 특히 자신의 과거의 범죄 사실을 완강히 부정하고,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계속 고집하는 일본이, 우리를 도울 사마리아인이라도 될까?


성경이 답 해준다. 저 남북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세력들은 바로 그들이 매달렸던 그 제국들이었다. 여호와가 그토록 남유다에게 형제인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하여 앗수르에게 매달리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음에도(사7:4-9,28:16,30:15). 남왕국은 끝내 앗수르 제국에 매달려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몰락시켰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남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고, 나중엔 그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애굽에도 매달리다가, 앗수르가 신흥제국 바벨론에 몰락하면서 남왕국도 거기에 무참히 무너졌다. 이런 이스라엘의 사례는, 미국과 일본에 매달리는 우리나라에게도 큰 경고도 된다.


한반도인 남북은 지금 급속히 한미일과 북중러란 신 냉전 구도로 양분화되고 있다. 이는 국민들의 바램과는 전혀 상관없이, 저 어리석은 남유다의 아하스왕 같은 윤정권의 허망한 선택 때문에 그렇게 치닫고 있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태인가? 여러분은 이런 양분화 된 대립 구도를, 하나님이 진정 축복하리라고 보는가? 


o 교회의 설 자리 확실히 해야 – 소금과 빛, 진리의 공동체의 길에 바로 서야


지금 미국과 일본은 <북한은 원수요, 미.일은 친구>라는 현 정권의 입장을 빌미삼아, 우리에게 압박하는 일들이 너무 엄청나다. 보안면에서나 경제면에서나 후꾸시마 오염수와 해산물 유통 문제 등, 실로 국민 자존심 면에서도 질식할 정도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국방, 경제, 외교에서의 국력손실은 천정부지이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고 빼앗기고 있는 우리의 경제상황은 너무도 참담하다. 왜 우리가 미일과 같은 탐욕의 나라들에게 이토록 목을 매는가? 하나님을 믿는 교회까지도 그에 부화뇌동해서 되는가? 왜 그리 엉뚱한 길로 가는가? 


동족들은 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 되어 큰 힘을 내기 위하여 존재한다. 남북은 하나 될 때 강해지고 함께 영화를 누린다. 경제문제, 일자리문제, 출산문제, 자원문제, 역사문제 다 해결될 것이다. 이 길은 분명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남북을 동족으로 묶어주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며 함께 찾아가야 되는 길이다. 이게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살게 될 지름길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진리의 빛을 발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명 공동체이다. 세상 권력에 끌려 다니면서 우리의 중심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 권력이하는 일이 진리와 정의에 맞으면 협력해야지만, 불의를 행사하면 저항해야 한다. 민족의 하나 됨은 만고의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때에 교회는 나라나 정치가 제국들의 종속 세력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일을 막아내고, 예수께서 가슴에 품고 계신 진리의 나라 백성으로 이끌어 세우며, 성도들을 조국의 평화통일의 주체 세력이 되고, 영적 독립운동 세력들이 되도록 인도해야 한다. (저 독일교회가 바로 이런 일을 잘해서, 정부가 못하는 통일조국을 이끌어냈다).  


o 선교 자세의 변화가 요청되는 영역들 – 지혜와 순결을 바탕으로


1) 한국교회는 동성애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선교적 대응을 하되, 그 방안에서는 보다 성숙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저들은 교회를 침투하여 몰락시키려는 저 사악한 이단들과는 차원이 아주 다르다. 그들은 그늘에 있는 매우 취약한 존재들이다. 정말 그들은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맛보고 싶어 하는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저 사마리아를 찾으시고 그들 집에도 묵기도 하시며, 구원을 안겨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요청된다(요4:40참조).  


비록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난 모습을 취하고는 있어도,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행위들은 인정할 수 없으나, 그들의 마음과 고단함을 헤아려서 복음과 사랑의 따뜻한 햇볕을 함께 쬐도록, 그래서 양지에 나올 수 있도록 방안을 찾아 제시하려는 선한 목자 된 한국교회의 성숙한 모습이 정말 시급하다. 지금과 같은 율법주의자의 심판하는 자의 모습이나 자신만이 의인인 듯한 행태로서는, 교회나 그들 모두도 해결의 길은 요원하다.  < 나머지 부분들은 다음 페이지를 이용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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