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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7-09 (화) 08:38 4년전 1059  

본문) 고전12: 1-14, 슥4:1-14, 눅17:5-10 

 

여름이 본격화되었다. 올 여름은 일찍 찾아온 더위로 국민들이 많이 힘겨워하고 있다. 특히 유럽은 거의 전역이 40도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고, 특히 저 북방 지역인 알라스카 지역은 30도 넘는 무더위가 찾아오기도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지구촌의 기상이변이 분명하다. 참 우려(憂慮)가 되는 때이다. 부디 여러분 모두 이때가 건강한 시기가 되기를 축원한다. 

 

게다가 일본의 아베 정권이 우리에게 신뢰를 파괴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게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우리를 더욱 열(熱)받게 한다.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손길로 그런 불의한 일들을 잘 처리해 주시길 기도드린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다섯째 주일인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우리에게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주실까?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은사로 인한 혼란스러웠던 사례(事例)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놀랍게 선사하신 신령한 은사(恩賜)들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갖고 그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며 살도록 일깨우신다. 

 

고린도교회는 매우 특별한 이방인 교회로서 매우 역동적인 교회였다. 헬라인의 탁월한 우월성과 민족성을 바탕으로 한없이 교만할 수 있는 곳인데-, 그런 인본주의적인 센터와 같은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강하게 전파되었다.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랑을 무력화시키면서, 누구나 쉽게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능력을 접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배려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부여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활발하게 체험하였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은사는 방언이었다. 기도할 때에 낯설고 이질적인 말들이 터지면서, 주변에 비방언자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체험자에게는 놀랍고 두렵기도 했고, 비방언자들을 향해서는 특별한 존재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엔 방언 이외에도 다양한 은사들이 함께 부여되고 있었다(8-11절 참조). 그래서 서로 경쟁하듯, 교회 현장은 마치 은사들의 각축장(角逐場)처럼 되었다. 

 

그런 모습은 마치 운전면허증이 없이 다양한 고급 자동차들부터 주어진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기에,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놀라운 영적 체험으로 잠깐 감격하다가, 이내 상대방의 것과 자기의 것을 비교하면서, 혼란과 시기와 경쟁과 자랑과 배척 등으로 빛이 바래지면서, 교회가 그런 소중한 은사들로 인하여 큰 시험에 빠져드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잖아도, 고린도교회는 교역자들 선호도(選好度)를 놓고, 이미 파벌이 형성되었던 끝이라서(1-4장. 참조) 이런 은사 갈등 현상은 교회를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게 하였다. 신학적 정리가 절대 필요했다! 

 

사도 바울의 편지는 바로 그 부분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 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주옥(珠玉)같은 말씀이다. 무엇보다도 은사에 대한 이해가 없이 믿음 생활하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복음의 빛을 던져 주는 진리의 증언이기도 하다. 혹 은사에 대한 체험을 중요시한 이들에게도, 자신이 받은 은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지를 다시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령(神靈)한 것’에 무지하면 안 된다(1절).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신령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의 존재가 신령하며, 그 분이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방법 역시 신령하다. ‘신령하다’는 말은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무시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이고 인격적이며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면을 충분히 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그런 접근 가능한 영역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그 경계선을 훌쩍 넘어서 계신 분이시다. 성령의 역사가 귀한 것은, 그런 그가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만나게 돕기 때문이다. 

 

서신서를 보자

바울은 먼저 그들에게 주어진 은사 자체가 거짓 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참 성령에 의하여 부어진 것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당시에는 여러 이교(異敎)에서도, 그런 낯선 방언과 병 치료와 예언 같은 영적 활동이 있어서, 주목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이다(2절 참조). 문제는 자칫 거기에 붙들리면, 그는 그때부터 마귀와 귀신의 종이 된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기에 영적 활동이 활발한 곳에는, 그만큼 영적 분별력이 요긴(要緊)했다. 

 

그 분별력의 기준은 그 은사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에 의하여 부여된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 은사가 그를 일깨우고 살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변화를 주면서, 그를 영생의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1) 그가 받은 은사가 성령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에 갈림길은 다음과 같은 고백 여부에 있다. -‘예수는 주(主)님이시다’라는 시인(是認) 여부에 있다(3절). 만일, 그가 은사를 받고도 예수의 주되심을 분명히 고백하지 못하거나 자기 자랑에 빠져 있다면, 그는 거짓 영을 받은 자임을 드러낸 것이다. 마땅히 배척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누구든지 온전한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면,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할 수가 없고 다만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택한 백성을 향한 역할(役割) 부여와 분담 배치를 다양하게 수행하셨다(4-6절 참조). 성령은 은사(恩賜)를 주셨고, 성자이신 주님은 직분(職分)을 부여하셨으며, 성부께서는 사역(事役-일거리)를 제공 하셨다. 그래서 당신의 택한 일꾼들은 성부께서 깔아주신 일거리를, 성자께서 공인해주신 직분을 가지고, 성령께서 선사하신 재능(은사)으로, 마음껏 일하게 하셨다.

 

3)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그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 그것은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모두(특히 교회공동체)를 ‘유익(有益)하게 하려 함이라’(7절). 그래서 그 일들 잘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려는데 있다! 

 

4) 그래서 주신 은사들은 크게 9가지였다(8-10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신유(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 분별(分別)-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通譯)함이었다. 

 

5) 이런 은사들 배치(配置)의 주도권은 각 사람의 형편을 살피시는 성령께서 하셨다(11절). 다만, 분명한 것이 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들을 함께 부여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 하나나 혹 조금 더한 것을 주셔서, 그것으로 모두를 섬길 수 있게 조처하셨다. 이제 성령의 그 마음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언제 건강하고 큰 교회가 될 것인가? 서로 하나 되어 각자의 적은 은사로 서로의 유익을 나누며 돕고 협력할 때이다. ( 참조 - 시인 조동화의 < 나 하나 꽃 피어 > 후면 )

 

성령 받은 이들은 절대 조심해야 한다. 성령은 나에게 은사와 재능을 부여하셨는데-, 그의 뜻은 내가 받은 재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유익을 공급하는 일이다. 마치 오병이어처럼 말이다(요6장 참조). 결코 자신의 특권이나 소유로 간주해서, 그것을 독점하고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 잊지 말자. 만일 내 안에 있는 재능이 나의 이기심과 교만의 도구가 되게 되면, 한 순간에 주님이 거두어 가실 것이다! 이제 내 자신을 살피자. 나는 성령으로 무슨 은사를 받았으며, 그것으로 어떤 기여자로 살고 있나? 

 

구약을 보자

본문은 자신이 받았던 은사(믿음)와 직임들(총독과 대제사장)을 가지고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가 어떻게 무너진 조국의 역사를 세우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은혜로운 능력을 드러내었는지를 잘 전하는 내용이다. 

 

특히 스룹바벨은 바사(페르시아)가 파송한 유다의 총독이었다. 직임이 부여되어 조국에 보내심을 받았으나, 그 앞에 떨어진 과제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의 생활기반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태산(泰山)과 같은 난관과 역경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난관은 백성들의 자포자기(自暴自棄)한 무기력한 마음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자괴심과 불신앙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스룹바벨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할 수 없었다. 재건의 의지가 분명했다. 그 타개 방안은 어떤 수고와 역경에서도 먼저 무너진 성전부터 복원하면서, 그 일로 인하여 백성들의 무너진 신앙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즉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먼저 구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마6:33참조). 그 일은 없는 경제력을 내세우는 일보다도 자신이 가진 은사를 뚜렷이 하나님과 세상에 드러내면서, 믿음으로 새 성전의 디딤돌을 기초석으로 놓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쏟아지는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전의 기초를 놓은 작업을 결행하였다. 

 

그러자 이 모습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기 시작하셨다. 마치 오병이어를 어린 아이로부터 받으신 예수께서 친히 그것으로 거기에 모인 5천명 이상의 배고픈 백성들을 다 먹이고도 12광주리를 남기신 일을 시행하신 일과 비슷했다(요6장 참조). 본문은 꿈으로, 환상으로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스룹바벨에게 보여 주신 내용이다. 하나님은 단언하셨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靈)으로 되느니라’(6절). 

 

그 바람에,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과 여호와의 후원을 받은 성전 재건은(6,10절) 모든 사람들의 부정적인 냉소에도 불구하고, 가장 놀랍고 빠르게 재건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주님은 그 일을 시작한 스룹바벨의 손이 그 일을 마치게 하는 은혜도 입혀주셨다(8-9절). 그로 인하여 모든 어려웠던 ‘큰 산’들은 스룹바벨 앞에서 다 평정이 되었으며, 멸시하던 자들도 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았다(7,10절 참조).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은 결코 분량에 의하지 아니하고, 진실한 믿음에서 나옴을 본다.  

 

내용 중에서 ‘두 감람나무’란 말이 나오는데(3,11절), 이는 정치적 메시아와 종교적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했던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을 지칭하고 있다. 저들은 공직(公職)에 있는 기회와 역할을 모두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로 알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들의 신앙회복을 위해 크게 기여하는 자료로 삼았던 인물이다. 지위와 권력을 결코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시대 감람나무(메시아)로 인정을 받았다. 

 

복음서를 보자

이곳 역시 교회의 지도자들인 사도들(제자들)이 교회를 섬기는 일꾼으로서의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이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통감(痛感)하면서, 자신들에게 직분(職分)을 부여하신 주님에게(고전12:5) ‘믿음의 은사를 더해 달라’고 간구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서의 가장 필요한 은사는 바로 강하고도 주님을 향한 살아 있는 믿음에 있음을 일깨우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믿음 없는 사역자는 교회의 주이신 주님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없어서, 목양 자체가 불가능함을 말한다(히11:6 참조). 이를 입증한 내용이 바로 그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그렇다. 진정한 힘은 목자의 살아 있는 믿음에서 나온다. 교역자가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믿음과 그의 말씀에 복종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냥 입술의 요구나 인간적인 권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믿음의 힘이 흐를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서, 세상과 사람을 변화시키는 신비한 능력이 부여되는 것이다. 저 스룹바벨이 그 겨자씨 믿음의 주인공이었다. 

 

모든 주의 종들이여, 믿음의 결핍과 부족을 크게 아파하자! 나에게 믿음이 없거나 부족함을 참회하면서 부요를 위하여 간구하자. 돈이 없는 것이나 사람이 부족하거나 내 지식이나 역량이 부족한 것을 우선시하지 말라. 주님에 대한 믿음과 그 능력을 복으로 받고자 힘쓰고 애씀의 부족함이 가장 큰 공적(公敵)임을 각성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적이고 인간적으로 약하고 부족한 것은 탓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당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으면서 당신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당신의 종들의 잘못된 태도(態度)와 자세(姿勢)를 매우 심각하게 보신다. 

 

그 점에서 주님은 주인을 대하는 신실한 종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하여 언급하신다(7-10절). 주인을 대하는 종의 마음은 언제나 종의 태도와 마음가짐에서 드러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주인은 자세가 불량한 종들에게서 자신을 향한 믿음(신뢰)가 있다고 결코 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부분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신실한 종들은 주인에 대한 무한한 복종과 그 신뢰에서 자신을 입증한다. 어떻게 입증하나?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10절). 

 

결론이다

아--, 요즈음 이런 종들을 찾아볼 수 있을까-? 자세 불량하고 태도가 무너진 곳에서, 어찌 양질의 겨자씨만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어찌 은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목회의 성공을 외모나 능력이나 규모에서 찾으려하지 않고, 오직 나를 당신의 종으로 택하여 부르신 주님께 감사하며, 생명과 능력의 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주의 분부에 따라서 앞으로 나아가는 순수한 믿음의 일꾼들을 지금도 주님이 눈을 크게 떠서 찾고 계시리라 믿는다(슥4:10). 

 

우리가 능력 행하려고 애쓰지 말자. 능력은 그 분이 주시면 된다. 주역은 그 분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철저한 그의 종이면 된다. 부디, 우리에게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부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자. 이 점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고의 당부이다. 


참조 - <나 하나 꽃 피어>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도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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