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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6-27 (목) 07:08 25일전 42  

본문) 엡 3:14-21, 창 32:22-32, 마 13:44-52

 

오늘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세 번째 주일이다. 여러분은 이 성령의 계절에 접어 들면서, 이전보다 얼마나 더 이 세상에 강림해 오신 성령 하나님과 가까워지셨는가? 부디 여러분과 보다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그 분의 선하는 뜻을 따라, 그 분의 완전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보이는 육체(肉體)로 우리에게 오셨던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영(靈)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성령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하나님 경험을 하도록 접근해 오셨다. 자격 제한이나 차별은 없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인간차별이 없이 자신의 변화와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이 땅의 생명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친히 찾아주셔서, 그들의 원(願)대로 되도록 도우 시는 일들을 광범위하게 펼쳐 오시고 계셨을 뿐이다. 

 

하나님이신 그 분과 인간인 내가, 만나기만 하면 시작될 삶의 놀라운 변화와 그 시너지 효과들은 진정 놀랍고 엄청난 것일 터인데-, 그렇다면 바로 그 운명의 만남을 위한 접촉점(接觸點)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는 점은 간과(看過)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분명한 것은 그 분은 오셔서 ‘열라’고 문을 두드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강제로 문을 뜯고 쳐들어오는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을 여는 주체는 바로 인간인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계3:20참조). 

 

그렇다면 내가 어떤 표지(標識)를 내걸어야 그가 나를 찾아오실까? 언젠가 터키와 동유럽 계열의 국가에 여행할 때, 자기 집에 시집보낼 처녀(딸)가 있다는 표지로, 집 입구에다 긴 장대에다 천 조각을 내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라도 하나님께 내 마음을 전하는 뭔가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마침 지난 주일에 우리 모두가 만난, 여리고의 세리장 삭게오가 보여 준 모습에서 이 부분의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눅19장 참조). 

 

그는 자신의 입으로는 단 한마디도 예수를 찾지 않았다. 아니, 찾을 수도 없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를 보고 싶어 했고, 그런 자기 마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거리의 가로수인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매달렸다. 그런 그의 절박한 마음과 행동이, 그 곳을 지나시던 메시아의 마음을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주님이 ‘삭게오’란 죄인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고, 그 집에 자청(自請)하여 묵으시며, 그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영적 권리를 회복시키시는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시기에 이르렀다. 

 

구원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주시고 싶어 하시는 분과 받고자 하는 이의 마음이 하나로 만나서 묶어져야 된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매우 인격적이고 상호 쌍방적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홀로 짝사랑하게해서는 구원은 없다! 나도 그 분을 사랑하며 뵙고 싶어 해야 구원은 있다! 그 결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만큼, 영원히 분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각자의 역할 분담이 분명하다. 복음서는 천국을 발견한 이들이 보이는 특성들과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응이 필요한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구약은 그 영적 싸움의 모델로서의 족장 야곱의 치열했던 얍복 강가에서의 모습과 그로 인하여 얻어낸 승리의 결과를 전한다. 그리고 서신서에서는 이미 믿음과 성령 안에서 천국의 보화를 소유한 성도들의 보전(保全)을 기원하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올려져있다. 

 

특이(特異)한 부분은 그런 씨름에서 승리하여 천국의 보화를 소유한 이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걸맞는 이름(Name)들을 부여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이 이름이 부여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공적으로 존재를 인정하고, 역할과 책임을 부여하며, 그 가치와 공로를 공인하여 하나님이 상대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이름들일까?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본 나에게 부여된 이름들은 어떤 것이며, 그게 지금 어떻게 행사되고 있는가?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의 비유 말씀들은 온통 천국이 어떤 것과 같은 것인지에 대한 말씀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천국 비유들에 담긴 몇 가지 강조점들은 우리가 매우 주목해야 될 것들이다(44-46절 참조). 

 

첫째,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寶貨)’와 같고(44절) ‘극히 값진 진주’와 같아서(45절), 아무에게나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최상의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마음과 보물 광맥을 찾아 두드리는 광부의 손길로, 찾고 구하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만 발견이 허락되는 세계임을 말한다(눅11:9-10참조). 

 

둘째, 그들은 천국을 삶과 존재의 최고의 가치요 목표로 삼는다. 천국은 그들 삶에 최고의 핵심 목표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팔아서’(내려놓고 포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라도 사야만 되는 수준의 보화이다(44-46절). 그들에게 천국이란 보화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절대 제일의 행복의 근원이며, 삶의 행복과 기쁨 그 자체이다. 따라서 천국 없는 삶이 그들에게는 바로 지옥이다! 

 

셋째, 숨겨진 천국을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나에게 충분해지려면 먼저 ‘나의 것으로 소유(所有)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 즉 ‘자기 것을 다 내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들여 내 것으로 삼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마땅하다. 천국은 그것을 발견한 이들에게 자기 것으로 확정(確定)짓기 위한 노력을 하게 인도한다. 

 

세상일도 그렇다. 어떤 건물이든 내 마음에 딱 든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잖은가? 내 모든 것을 다 팔아(투자하여) 그것을 사고, 등기이전(登記移轉)까지 마쳐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과 같다. 구매자에게는 그 과정에 필요한 힘들고 다양한 노력들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 성령은 천국을 볼 줄 아는 이들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추동(推動)한다. 지옥(地獄)갈 사람들에게는 아예 천국을 보는 눈도 없고, 아무런 수고와 헌신도 관심하지 않는다! 

 

넷째, 천국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지내는 공동체인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Mission)로 나아간다(47-50절).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47절)이 바로 그 선교를 말하고 있다. 그 선교로 교회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세상에는 선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면서 얻게 된 선교의 열매에는 좋은 것도 있고 못된 것도 걸러진다. 의인과 악인도 걸러내기도 한다(48-49절 참조).

 

다섯째,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깨닫는 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서기관’(書記官=율법교사)이란 새 이름을 부여 받게 된 자들로서, 마치 자기 집 곳간에 있는 옛것(구약의 율법)과 새것(예수의 가르침과 교훈들)을 가져다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맞도록 해석(解釋)하고 또 행동으로 보여주는 위치에 있는 ‘집 주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이다(51-52절). 마치 베드로가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를 부여 받은 위치에 서게 된 이들이다(마16:19참조). 

 

구약의 내용을 보자

본문은 자기 삶에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순간에 처했던 야곱이,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 여호와께 나아가 목숨을 걸고 매달리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형 에서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안전과 보호를 간구하여, 끝내 하나님의 승리를-, 아니 천국 보화를 받아낸 이야기이다. 

 

그날 밤, 그에게는 지난 20여 년간의 타향살이를 통하여 곁에 둔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명의 아들들과 수많은 종들과 가축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자기의 삶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았다.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보호와 방패가 되어주시고, 지켜주실 유일한 분임을 그는 알고 믿었다. 그래서 적극적 행동으로 나아갔다.  

 

그 근거는 분명했다. 여호와께서 20년 전에 형을 피하여 하란으로 도피하던 자신에게 꿈에 친히 찾아오셔서, 자기를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언약하셨던 일명 ‘사닥다리 계시’에 대한 기억과 믿음 때문이었다(창28:10-15참조). 본문은 그런 자신이 받았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이제 그 약속이 성취(成就)되는 응답을 친히 받아내기 위하여 그 하나님께 나아가, 그 복을 이루어달라고 처절하고도 치열하게 기도(祈禱)에 매달린 것이다. 

 

1) 야곱은 철야(徹夜)하며 기도했다(24절). 사생결단(死生決斷)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드렸다. 허벅지 관절(환도뼈)이 위골되면서도, 그는 물러나지 않고 눈물을 쏟으며 부르짖었다-‘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25-26절, 호21:4참조). 

 

2) 특히 야곱이 그때에 하나님의 사자로 보이는 이와 씨름하였다는 증언이 두 번 나오는데(24-25절), 그때의 ‘씨름하다’라는 히브리 원어 ‘하밬’은 ‘껴안듯이 꽉 붙들고 늘어지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또 다른 표현인 ‘네에밬’은 ‘먼지를 일으키며 싸우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야곱이 그 밤에 얼마나 기도의 응답을 위하여,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매달렸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게다가, 자신의 육체의 힘의 근원인 환도뼈가 그에게 일격을 당해서 힘도 못쓸 처지였는데에도, 야곱은 여전히 여호와께 매달리면서 여호와의 축복을 요구하였다. 천국과 그분의 힘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힘쓰고 애쓰는 야곱의 모습이 매우 놀랍고 충격적이다. 

 

3) 야곱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음을 인정한 그 사자는 그의 승리를 인정하는 수순을 밟는다. 그 단계가 바로 당신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인물인지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야곱(=속여 빼앗는 자)이다’라는 이름을 들은 그는, 그 판의 승자(勝者)에게는 걸맞지 아니한 이름임을 확인하고, 그에게 새 이름을 부여한다. ‘이스라엘(=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누어 이김, 하나님의 방패)이는 새 이름이 부여된 것이다(28-29절). 

 

실로 ‘말도 안 되는’(?) 순간(카이로스)이 임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 자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겨누어 이겼다’라는 시인(是認)을 받아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표시로 얻어낸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단순한 새 이름이 아니었다. 실질적 언약의 후계자로서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정식 비준(批准)을 득한 일이었기에, 그로서는 새 존재로의 출발이 가능해 진 것이다! 

 

4) 고독과 두려움과 불안의 터널을 쑥 빠져나온 야곱의 마음인 놀라운 안도감과 평화가 임했다. 그래서 상대인 하늘 사자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되래 묻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대답 대신에, 그가 우선 할 일을 하였다. 야곱을 축복(祝福)한 것이다. 이 축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가 보유한 신적 능력을 건너 준 것이다.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의 능력이 그를 돕게 된 존재로 세웠다. 그러니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29절)! 그는 하나님을 뵙고도 살아남은 그곳을 추억하고자,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다. 해는 돋았고 자신의 다리는 절었다!  

 

묵상할 부분이 남았다. 나약한 인간이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겨누어 이겼다는 논리가 과연 가능한가? 그런데도 이곳에서는 통용되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받아야할까? 신과 인간의 관계가 사랑과 인격을 바탕으로 얽혔다는 점에서, 이렇게 받아도 된다고 본다. 바로 하나님이 야곱에게 저 주신 것이다! 우리 통설에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설(說)이 있다. 그렇다. 자식이 그래도 되는 집은, 대체로 부모가 자식위에 군림하는 집이 아니라 자식에게 저 주는 집이다! 

 

그가 인간에게 저 주시는 확실한 때들이 있다. 자신의 부족을 시인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고 나오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저 주신다. 그리고 인간이 당신이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그것을 붙들고 응답해달라고 매달릴 때, 저 주신다. 야곱이 바로 그런 복을 누렸다. 그렇다. 우리는 무자비한 하나님 밑에서가 아니라, 저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밑에서 살고 있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인데, 그 내용에서 그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는 성숙한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그가 찾는 하늘 아버지는 하늘과 땅의 각 인간 족속과 모든 종류의 생명체들에게 걸맞은 이름을 부여하신 분이셨다(14-15절). 그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그에게 사명(使命=mission)과 역할을 부여하셨음을 뜻한다. 자기 이름에 사명에 부여되었음을 알고 사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름값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면서-, 사도는 하나님께 몇 가지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1)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16절). 그러면 성령은 왜 성령은 우리 속사람을 겨냥하시는가? 각자에게 속사람은 그의 마음, 정성, 뜻, 감정, 인격을 결정하며 성령의 내주(內住)할 현장인 까닭이다(롬7:12참조). 그러기에 인간의 주인 교체(交替) 문제도 속사람의 판도로 결정되기에 그렇다! 겉 사람과는 아주 다르다(고후4:16참조). 

 

2) 견고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고, 교회 공동체도 사랑에서 뿌리가 내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총체적으로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힘입어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17-19절). 사도는 모든 성도는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방문객이 아닌 주인으로서 계시어야 했으며, 그들의 교회도 나무와 건물처럼 견고히 존재하게 되기를 간구 드렸다. 

 

결론이다

성령 받아, 천국 보화를 소유한 우리는 이미 새 이름들을 부여 받은 존재들이다. 예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소개하고 알리는 천국 서기관들이다. 게다가 우리 속사람에는 새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주하고 계신다. 그래서 그 분의 거룩한 위임(委任)에 따라, 그 분과 그의 나라를 위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야 마땅하다. 

 

우리 나름대로도, 야곱의 흔적이 없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전으로 뒤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 얻어낸 그 소중한 이름, 하늘 백성이며 이스라엘인가! 이제는 얻기 위한 씨름이 아니다. 보전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 위한 씨름을 전개해야 한다. 그 분 오실 때까지 그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 부족하기에 더욱 서로 어깨동무하며, 마귀를 부끄럽게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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