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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학교육주일

관리자 2018-02-06 (화) 14:05 6년전 1310  

본문) 2:123-3:6, 2:1-3, 14:1-12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속이 좁다거나 더 마음이 폐쇄적이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실재로 그런 현상은 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기독교인이 한번 마음이 틀어지면, 손쉽게 화해나 용서가 잘 되지 못한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전도에도 열심이지만, 교회 선교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데에도 더 열심인 것이 사실이다. 엄청난 모순이다!

 

요즈음 소위 사회적으로 마냥사냥 또는 집단 왕따 문화 같이 보이는 현상의 대부분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통일 문제라거나 역사 왜곡 문제라거나 동성애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인권조례를 폐기하려는 태도에서나 위안부 문제나 세월호 사건을 대해 온 그 동안의 한국기독교인들(특히 극우적 보수주의자들)의 모습들 같은 굵직한 부정적 차원의 사회 문제들을 한국개신교도들이 계속 주도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여전히 공중파 뉴스 대신에 가짜 뉴스를 믿으며 박근혜의 결백을 주장하며 시위를 계속하고 있고, 문재인 정부의 퇴진까지를 외쳐대는 태극기 부대의 상당수가 극우 기독교인들이라는 소식은 지금의 한국기독교의 미래를 암담하게 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대형교회의 강행되는 세습관행도 그에 못지않다. 저들의 일련의 행위들이 진정 모두의 진리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보전을 위한 방어행위일까’, ‘하나님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를 위한 것일까가 궁금하다.

 

모두가 자기 성찰이 없이 최소한의 상식을 벗어난 탈법적, 유아독선적 비합리주의적 태도들이어서-, 지금의 한국의 교회들이 왜 세상으로부터 걱정을 듣게 되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엄청난 예수 방해꾼들을 우리 내부에서 보는 것 같아서,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간다. 왜 이렇게까지 한국교회가 어긋나 있을까?

 

내가 현재 잠시 머물고 있는 이곳은 태국 북부의 아름다운 도시 치앙라이이다. 이곳에 대한 소문들이 너무 좋고 한국 은퇴자들의 천국처럼 호평을 받아, 갈수록 이곳엔 한국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게다가 소수민족들이 많이 어우러진 곳이기도 해서, 이래저래 이곳은 한국의 선교사들도 많은 곳이다. 나름대로 태국 교회들의 교세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썩 괜찮다.

 

그런데 너무 아쉬운 일은 이렇게 몰려드는 한국인들을 한자리로 모이게 할 한인교회가 없다는 거다. 물론 두 서넛 한인교회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곳 내부의 사정이 너무 좋지 못해 그나마 모였던 소수 교인들마저 이곳 태국교회로나 아니면 가정에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대체하는 정도라고 한다. 건강한 목사 지도력과 평신도 집단만 형성되면, 참으로 멋진 한인교회가 탄생할 만 한 곳인데-, 지금의 사정은 오리무중이다. 분열과 불신의 디엔에이가 깊은 한국교회와 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후유증이 이곳에까지 반영된 것 같아,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됨과 화해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분열과 대립과 갈등의 주역들이 되었나? 왜 통일과 일치의 주역이 아닌 도리어 분열조장 세력이 되었나?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이러한 우리의 고민들을 담고 있다. 예수 시대의 국가종교인 유대교의 병폐를 통하여, 우리들의 문제를 다시 보게 하고 또 그 대안이 무엇이어야 되는 지를 담아내었고, 또 이방인 로마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앞에서 거론한 우리 문제들에 대하여도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 신앙인의 가장 최고의 계율인 안식일(주일) 준수에 따른 본래적인 신앙적, 윤리적 입장을 제시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인간 세상에서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분열이 아닌 일치의 주역으로 설 수 있는 지를 전하여 준다.

 

o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안식일(安息日)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참고로,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지금 우리가 지켜가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매우 엄격한 국민행동규율이다. 우리의 국가보안법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가장 엄격한 신률(神律)이어서, 백성들이 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따라서, 그가 의인이 될 수도 있고 죄인이 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안식일 준수의 일단은 무조건 일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한다는 거였지만(십계명 중 제4계명 참조), 내용상으로는 그 안식일을 문자대로 온전히 평생 동안 지킨다는 것은 백성 모두에게도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안식일은 점점 죄인들을 양산하는 심판과 정죄의 도구처럼 되고야 말았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처음의 의도인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안식일과는 아주 다른, 삶을 옥조이고 속박하는 차원의 안식일이 된 것이다.

 

특히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 병에 고통 하는 이들, 나그네들, 안식일이지만 일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이들에게는 이 안식일이 치명적인 죄책감을 안겨주는 멍에가 되고야 만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들은 안식일 준수하는 명제 앞에는 영원한 죄인이라는 영적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이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18:14, 58:3참조).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가장 가슴 아파하셨던 이가 계셨다. 바로 안식일의 진짜 주인이시면서(2:28), 그 안식일로 인하여 인간을 구원하고 행복하게 하려고 태초에 그 안식일을 제정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이셨다! 나사렛 예수로 오신 그리스도는 그 모순된 현실을 이 땅에서 직접 목격하시고 절감하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식일이 가진 자의 무기처럼 되고, 신앙의 오만을 조장하고, 자기와 다른 사회적 약자 위에 군림하는 도구처럼 되는 일에 주님은 침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안식일을 통하여 모든 이들을 살피고 돌보며 그 사랑 안에서 서로 다른 모든 이들이 하나 되는 모습을 꿈꾸신 주님으로서는 이 이외의 현상을 보시면서, 철저히 교정해가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당시 교권주의자들과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큰 주제는 다름 아닌 안식일 논쟁이었다. 안식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켜야하는 것인지를 놓고 그들과 격렬하게 부딪치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두 가지 핵심 차원을 볼 수 있어야겠다.

1)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27).

예수께서 친히 안식일의 제자리 찾기를 해주신 것이다. 안식일의 원()주인으로서 말이다(28) 특히 죄인들을 섬기고 이 땅에 사람들을 위해 당신을 내어주시러 오신 당신의 입장으로서는 당신이 제정하신 안식일도 당연히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되는 무대여야만 했다. 안식일 때문에 사람이 복을 받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때가 되어야지, 사람이 갈라지고 안식일 때문에 더욱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주님께서 분명히 천명하셨다.

 

이 점에서 창세기 본문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본래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안식하셨다’(3)는 말씀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안식일의 기원(起源)이다. 하나님이 쉬셨으니, 인간도 쉬어야 하는 뿌리 논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똑같은 존재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일하시다가 피곤하시니까 제 칠에는 쉬어야만 다음 일이 가능하시다는 건가? 인간들처럼 말이다. 역시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안식하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근거이다. 바로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연약한 세상 인간들에게 쉼과 안식을 안겨주시기 위함이었다. 즉 인간들은 정기적인 안식과 휴식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음과 그러기에 <육일노동과 하루안식>의 생체 질서의 리듬 속에서 자신의 건강한 삶을 보전해 가도록 배려하여 제정해 주신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다.

 

2)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될 수 있는 구체적인 모습들은 어떤 것들인가? 나머지 본문들이 잘 사례들을 잘 담고 있다.

복음서의 경우(23-26, 3:1-5)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임에도 밀밭 사이의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이 허용된 일을 통하여,

안식일이라도 가난하고 배고픈 일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 허용되어야함을 허락하셨다.

-병든 이들이나 생명 구하는 일들은 안식일에도 당연히 중단 없이 수행해야할 일들이다.

서신서의 경우(14:1-10)

안식일(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일에도, 그 성수의 내용이 문제이다.

주일을 지키면서도 함께 한 성도들 사이에 서로 갈등하고 시험 드는 일들이 허다하잖은가?

-그런 점에서 안식일 준수는 제대로 된 주일 성수여야만 된다. 그 모범적인 지침을 로마교회 의 복잡한 사례를 들어 바울이 제시한다. 교회 생활에서 깊이 주의해야할 일들을 제시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1-4). 누구든 믿음의 단계와 수준의 차이는 있다. 주 님은 그런 연약한 이들의 그러한 입장을 존중하신다. 그런 것을 모르고, 상대를 자기 수준에 서 맞추려하면 큰 시험이 따르게 된다. 매우 조심해야 한다.

서로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5-10). 특히 상대의 행동이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 고 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방법이나 인식이나 문화의 차이를 무시하고 상대를 비판하 고 업신여기게 되면, 그것 행위는 교회공동체의 일치에 결정적인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O 결론은 이렇다

 

따뜻하고 연약한 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의 소유자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등장해야 한다. 교회란 제도나 교리에 충실한 존재보다는 함께 모인 동료 인간들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자세와 인격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하늘 안식의 주인공이리라! 인간 사랑의 큰 품을 가진 자들이 세상의 주역들이 되리라! 우리의 신학교육도 이런 성숙한 주의 백성들을 겨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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