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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1-11 (금) 17:50 5년전 1085  

본문) 막 9:38-50, 사 11:10-13, 고전 3:1-9  

 

위기의 한국교회를 구할 절호의 기회인 새해에 다시 접어들었다.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잘 해보라’고 때를 주신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특별한 돌보심이 간절하다. 이유는 도대체 우리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의 각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터인데-, 교회부터가 ‘길 잃은 양’이 되어버려 있으니, 도대체 그 자신과 세상은 누가 구할 것인가? 

 

분위기로만 보면, 지금의 한국 교회는 세상만도 못한 곳이 아닌가 싶다. 세상은 지금 어떤가? 내부적으로는 묶은 적패(積敗)를 청산하고자, 그 동안 쌓여있던 각 분야의 비리들 심판하는 일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어제의 원수였던 북한과 소통의 폭을 키우며 하나의 평화로운 조국 건설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를 위해 남북 정상들이 계속 만나고 DMZ 속에 있던 지뢰제거하는 일에도 함께 하며, 분단된 철도의 맥(脈)도 잇기도 시작하였다. 민족과 역사에게 희망을 주는 나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더욱 어둠의 터널에 빠져 든 상태이다. 희망보다는 걱정을 하게 한다. '사랑'이 중심을 잃어버렸고, '명성'이 명성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다. 교회 분열은 지난 90년대-2000년대보다도 훨씬 심각하다. 그 때의 두 곳의 연합기관이 2010년대 들어선 지금은 4-5개로 더 분열한 상태이다. 내용도 하찮은 이권, 자리다툼, 이해관계 등에 발목이 잡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설 자리가 안 보인다. 

 

어디 그것뿐인가? 이번에는 연일 목사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공중파 언론에서 질타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교회 목사들의 성폭력 비리자(非理者)들이 그렇게 많아도, 교단이나 교회에서 퇴출이나 징계도 받지 않고 버젓이 목회와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질타하고 있다. 동성애자들 규탄에는 그토록 열을 올려도, 자신의 추악한 비리에는 무척 관대하다. 왜 이렇게 한국교회가 어긋난 걸까-? 주님의 거룩한 교회가 이토록 그의 허접한 종들로 인하여 유린을 당해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백성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도 되는 건가?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이러한 우리의 심각한 고민(苦悶)에 대하여 답과 길을 열어준다. 결정적인 답은 이것이다. 우리의 지금의 한국교회는 ‘요한의 교회’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의 교회’로 나아가지 못한 까닭이다. 교회를 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뜻을 받들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기 보다는, 예수를 우산삼아 그곳에 모인 자기들의 이익과 돌봄과 상조(相助)의 수준을 지켜내는 곳으로 각색(脚色)하고 변색(變色)시켰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지금의 교회는 예수의 교회에서 예수를 이용하는 무리들의 집합처가 되고 말았다. 예수의 뜻과 명예를 심각히 손상시키고, 예수의 이름과 그 능력을 가렸으며, 그 크고 놀라우신 분을 동네 골목대장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주님 자신도 그런 우리들에게 얼마나 분개하고 계실까! 아무래도 지금은 그의 인내의 시간이요. 그의 심판이 본격화되기 직전이 분명하다. 바로 이때가 우리에겐 각성과 회개의 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오늘 세 본문들은 두 개의 상반된 교회들의 대조적인 시각들을 조명해 주고 있다. 그 개념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던진 두 개념, 즉 ‘육신(肉身)에 속한 자들’와 ‘신령(神靈)한 자들’이란 표현을 이용하려고 한다. 나는 이렇게도 표현하려 한다. 자신들을 위한 ‘인간의 교회’가 있고, 예수를 위한 ‘예수의 교회’도 있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곳이 바로 육신의 속한 자들의 교회와 예수의 교회가 맞부딪치는 현장을 담아낸 곳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제자 요한과 그의 일행의 착각(錯覺)을 엄중히 지적하시면서, 스승인 당신의 마음과 생각이 어디에 있는 지를 깨닫고, 거기에 따라줄 것을 요구하신 곳이다. 즉 육신의 속한 차원을 극복하고, 신령한 자들이 되어야할 방향을 잡아준 곳이 바로 여기였다. 

 

<육신의 속한 자들의 실상> 오늘의 세 본문에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나온다. 한 그룹은 요한을 중심한 제자들 그룹이며, 또 한 그룹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무리들이다. 

 

1) 요한이 예수님께 드린 보고는 이것이었다. ‘우리 모임에 속(屬)하지 않은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鬼神)을 좇아내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않고 그런 일을 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기에, 즉시 중단시켰다’는 것이다(38절). 사뭇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한 당당한 보고였다. 

 

① 요한(제자)의 그러한 태도는 어떤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나? 독점(獨占)의식이나 상속(相續)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특허권(特許權)이라도 가졌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만의 주님이시기에, 그 누구든 예수의 모든 것을 활용하려면, 자기들 캠프에 들어오던지 아니면 자기들의 승인 정도는 받아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들은 세상의 예수에 대한 교통의 통로를 자기들로 좁혀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자들은 또 다른 유대교 바리새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 신앙의 모든 것, 의인의 모든 것, 율법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자기들만의 것이라는 듯한 독선적이고 배타적 성역의 담을 높이 쌓아두었는데-,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그와 유사했다. 세상 과 그들 밖에서도 활발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에는 전혀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②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오래 전 이사야 예언자로부터, 오실 그들의 메시아가 만민의 기치(旗幟)가 되셔서 세계에 흩어진 모든 이들을 다 불러 모으는 구세주로 오실 것을 선포했던 사실을 전혀 알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사11:10-13절 참조).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하자. 

 

구약 예언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1) 이새의 뿌리에서 나신 한 싹은 분명히 나사렛 예수이신데(!), 그는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은 만민의 기치(旗幟-Banner)가 된 역할이다. 마치 숱한 여행객들을 통솔하고 규합하며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여행 가이드가 든 그 기치와 같은 역할 말이다! 함께 여행하는 이들은 그 기치만 보면, 든든하다. 잠시 헤매다가도 높이 들린 기치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런 분이셨다. 그가 등장하면 흩어졌던 세상과 남은 자들이 그 앞으로 돌아와 평화를 누리며, 그곳을 영광스럽게 했다(10-12절). 

 

2) 그때의 두드러진 특징은 ‘돌아온 자들의 마음들’이다. 이전(以前)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 때문이다. 즉 예전과는 달리 서로에게 질투(嫉妬)하거나 배타적이지 않게 되면서, 또 다시 흩어지는 일은 없게 되기 때문이다(13절). 더 이상 무모한 경쟁심과 배타심으로 상대를 밀어내고 자신을 고립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협력과 공유하는 마음으로 더불어 공생하는 공동체로 나아갈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요한 일행은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메시아로 오신 분이심을 알아야만 했다. 그렇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예수를 자기들만을 위한 구원자로 묶어 두려는 만용(蠻勇)을 부렸으며, 아직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자신들의 천박한 수준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태도는 마치 고린도교회의 신도들의 영적 수준과 흡사했다. 

 

고린도교회의 내부 상황이 어떠했는가

1) 고린도교회는 교인들 사이에 거세게 일고 있는 시기와 분쟁으로 진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들이 선호(選好)하는 교역자들을 놓고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척 목회자였던 바울을 선호하는 자들, 그 후임자인 아볼로를 더 선호하는 자들, 그리고 한 때 그곳을 방문했던 사도 베드로를 선호하는 자들까지를 포함해서-, 그야말로 교역자 선호도를 놓고 파벌(派閥)이 형성되면서 상호 시기하며 분쟁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하기에, 교회가 교회로서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2) 바울은 그런 교인들의 모습을 ‘육신에 속한 자’(the worldly)의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지금은 더 이상 ‘신령한 자’(the spiritual)들로 상대할 수 없음을 밝혔다(1-2절). 그런 특징은 무엇인가? 예수는 믿되, 그 영적 수준(水準)이 어른답지 못하고 모든 게 자기중심(自己中心)으로만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이라는 데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용납이 없이 전적으로 자기 것만을 절대시하는 수준의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앞서 복음서에서 만난 제자 요한의 수준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입장은 항상 주변으로부터 시기와 분쟁을 유발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어찌 제자 요한과 고린도교인들만의 모습이었겠는가! 오늘 한국교회의 세상과 이웃을 향한 경직되고 배타적인 모습들 속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들이 아닌가? 큰 문제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그 대답도 복음서의 예수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 분이 모든 신령한 자들의 원조(元祖)이시기 때문이다. 

 

<신령한 자들의 자리>는 다른 곳이 아닌 예수의 입장에서 찾게 된다. 제자들의 의식 교정(矯正)도 예수님 자신이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서의 존재를 드러내자, 흩어졌던 수많은 이들이 이모습저모습으로 예수 당신을 구원의 기치(旗幟)로 알아보며 몰려들고 있음을 친히 감지(感知)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때부터 당신을 향하여 몰려오는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향하여 당신을 기꺼이 개방(開放)하신 것이다. 

 

주님의 반응인 ‘금(禁)하지 말라’(39절)가 그 핵심이었다. 허용(許容)을 명령하셨다(39-41절). 그는 이 세상 누구든 고통 하는 이들의 생명을 살리고 선(善)을 행하려는 일에 당신의 이름과 권세가 도움이 된다면, 당신의 모든 것을 무제한 이용하도록 개방하셨다. 그것이 본래 당신의 성육하신 목적에 부합(符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특정 세력들의 독점(獨占)적 대상이 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자들의 구원을 위해 공유(共有)내지 공익(共益)를 위한 개방된 존재로 오셨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 예수는 구원받고 도움 받고자 하는 모든 세계인들을 위한 개방된 세계 최대의 공유 자원이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분의 제자여야 했다

 

<복음서의 내용을 좀 더 성찰해 보자>

메시아의 사정이 그러한데도, 제자들이 계속 세상과 이웃에게 폐쇄된 입장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어찌될까?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큰 과오(過誤)를 범하게 된다. 

 

하나는 예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고 좇으려는 자들을 등 돌리게 하여, 적(敵)이나 비판자가 되게 하므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좁히게 하는 큰 과오(過誤)를 범하게 한다(39절). 또 하나는 예수를 믿고 따르려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시험에 빠지게 하여 구세주에게 등돌리게 되어 실족(失足)하게 만드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됨으로서(41-42절), 결국은 그 죄 때문에 무서운 지옥의 심판을 받게 된다(43-48절 참조). 

 

<대책은 무엇인가>

 

주님의 최후의 당부,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和睦)하라’(49-50절)는 말씀을 매우 엄중히 지켜야만 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주어진 멍에인 영혼 구원을 위한 삶은 시련과 희생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요리인의 손에 의하여 음식에 던져지는 소금처럼, 생명 구원을 위한 우리의 행동들도 고도의 적절성과 분별력(안 해도 안 되지만, 과해도 안 되는 성격)이란 지혜가 요청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무엇을 하든지 인간 자랑은 절대 금물이다. 반드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전3:5-9절).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와 능력이 가리워지는 순간, 교회나 인간 모임에는 시기와 질투와 분쟁이 들끌게 된다. 교회와 목회는 하나님이 허락하에 된 것이다. 어떠한 교역자의 절대성도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할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운영하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종일 뿐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된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평화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리라.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하루 속히 요한의 교회의 굴레에서 예수의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예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섬기고 그가 사랑했던 세상을 보살피려는 의지를 보다 확고히 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불균형한 교회의 모습에는 희망이 없다. 인간들 자신들만을 위한 교회, 자기들만의 리그로 너무 편협하게 좁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온 세상의 구세주이시고 기치이시다. 교회가 마음과 생각을 넓혀서 예수의 크신 모습을 제대로 전하기 위하여 더욱 낮아져야 한다. 교회는 교회 바깥 영역에서도 활발히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서도 눈과 마음이 열려야 한다. 그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세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예수와 그 진리의 독점기관이 아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예수의 그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자 더욱 겸허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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