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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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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12-20 (목) 10:11 5년전 1171  

본문) 사 35: 1-10, 막 9: 33-37, 벧전 1: 22-2: 3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일이고, 주의 오시는 성탄(聖誕)이 이틀 후로 임박한 날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쯤은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야할 때이다. 그게 무엇일까? 

 

우리 주변에는 뜻밖에도 성탄을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신나게 노는 날, 선물 나누는 날, 쉬는 날, 육체를 만족시키는 날, 등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또 있다. 성탄은 강단의 촛불 네 개를 모두 밝혔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다. 그날에 나눌 선물 준비를 다했다고 해서도 오는 게 아니다. 성탄의 놀라운 은혜(恩惠)는 세상의 들뜬 분위기와 사람들의 행복 만들기 따위의 여러 프로그램에서는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날은 어떤 날이고 또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우리는 성탄을 크리스마스(Christmas)라고 부른다. ‘그리스도를 예배(禮拜)하는 날’이란 말이다. 저 동방박사의 행보와 베들레헴 야외의 목동들의 행보처럼, 진정한 왕으로 이 세상에 탄생해 오신 아기 예수를 찾아서, 그의 신하와 백성 됨을 고백하고, 나의 소중한 예물을 드리며, 엎드려 경배(敬拜)하는 날이다. 그러면서, 그 아기 예수를 만난 기쁨과 감격의 새 마음으로 새 인간 되어 살아가기 시작하는 날이다. 

 

우리는 최소한 ‘최악(最惡)의 크리스마스’는 피해야 한다. 무엇이 최악의 성탄일까? 바로 ‘주인 없는 생일잔치’가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다.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성탄이 그것이다. 따라서 나의 성탄에는 오직 그 분만이 보여야 하고, 그 분으로 내 가슴이 충만해야만 한다. 그 아기로 오신 분을 찾아가 만나서, 그 분을 만난 기쁨과 감동과 기억이 내 가슴에 채워지는 성탄 되게 해야 한다.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은 메시아 오심의 핵심적인 단계(段階)들을 잘 정리하여 소개해 준다. 

 

첫째는 그가 이 세상에 오시면 이 세상은 어떤 지각변동(地殼變動)이 일어나서 새 세계가 열릴 것인지를 예고(豫告)하였고, 둘째는 그 성탄이 ‘너의 성탄이기 전에 나의 성탄이 되기’에 절대 필요조건은 무엇인지를 전하며, 셋째는 그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거듭난 삶의 변화를 받게 된 이들은 그의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지를 안내해 준다. 

 

구약의 예언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70여년 오랜 세월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가게 되면서, 그 이후에 새롭게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의 상황을 묘사했던 사40-55장의 내용을 압축하여 전한 서문(序文)이다. 특히 포로 귀환 시에 펼쳐질 환상적인 광경을 예언과 성취란 구도로 잘 묘사한 곳이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불가능하게만 여겨진 세계가 가능한 실재의 세계로 옷 입고 나타날 때의 묘사가 화려하다. 이 놀랍고 충격적인 세상이 언제 나타나며,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바로 하나님이 오실 때이다! 그 때는 ‘마치 오랫동안 죽은 것과 같았던 광야(廣野)와 사막(沙漠)이 살아나, 물이 솟고 시내가 흘러 무성한 낙원을 이루는 대변혁을 이룰 것’이다(1-2,6-7절). 본문 내용을 다시 보자. 

 

1) 하늘에게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가 흐르되, 그 방향이 어디일까? 당연히 낮은 곳이다! 결코 높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오시면, 낮은 자리와 빈 마음들은 오시는 분의 은혜와 자비(사랑)의 물줄기로 충만히 채움을 받는다. 그 결과는 어떨까? 그들이 삶의 구원(救援)의 기쁨을 충만히 맛보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마치 광야에 샘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는 것처럼, 그들의 삶의 질(質)이 혁명적인 변화를 받게 된다(1-2, 6.하-7절). 그 뿐만 아니다. 그의 그 변화의 물결은 그에게 머물지 않고, 이웃과 온 세상을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

 

2) 그 변화의 놀라운 실상(實狀)은 이것이다. 약한 손이 강하게 되고, 떨리는 무릎이 굳건하게 되며, 겁내는 자가 굳세게 된다. 맹인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며, 저는 자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가 입이 터져 노래하게 된다(5-6절). 즉 하늘에서만 맛볼 일들이 땅에서도 맛보게 되는 역사가 발생한 것이다(3-6.상). 그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대(大)혁명이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늘이 인류에게 선물한 ‘완전한 새 질서요 대로(大路)이며 거룩한 길’이다(8.상)

 

3) 그런데, 이런 놀라운 구원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열려진 것이지만. 그러나 실재(實在)에서는 아무나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하늘의 영성(靈性)에 잇대어 있는 것이기에, 거기에 걸맞은 여건(與件)을 갖추지 못한 자는 수혜(受惠)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어떤 것들인가? 

 

4) 먼저 거부(拒否)당할 자들이 소개된다. 거짓되고 더러워서 깨끗하지 못한 자들, 사악(邪惡)한 자들, 사자와 같은 패권적 인생을 산 자들, 사나운 짐승같이 남에게 고통과 폐해를 주고 살아 온 인생들이다(8-9상). 그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다. 서로를 짓밟고 누르고 군림하며 이용하면서 살려는 성향에 빠져 산다(막9:34참조). 그 마음이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들로 가득하다(벧전2:1참조). 이런 행위자들은 거룩한 길목에서 당연히 배제(排除)를 당한다. 

 

5) 오시는 메시아가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의 직접적인 수혜(受惠)자들도 소개되었다. ‘오직 구속(救贖)함(the redeemed)과 속량함(the ransomed)을 입은 자들’이다(8-10절). 구속과 속량함을 입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오시는 분으로부터 일종의 몸값 지불처럼 피(避)할 수 없는 값비싼 은혜를 입었음을 말한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다. 그래서 오시는 분과의 관계가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이 결속된 상태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 관계는 대학 입시를 앞둔 공부하는 학생들과 그를 지원하는 부모의 헌신과 수고를 연상하면 이해된다. 공부는 자식(子息)이 하지만, 그 자식이 공부에 매진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재정, 배려, 후원, 기도 등의 온갖 응원과 헌신들은 부모가 한다. 그러면서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더욱 공고한 하나가 된다. 자식은 부모의 구속함을 받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번 강릉에서의 수험생들 10명의 가스 대참사(慘死)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한 것은, 그런 자신의 구속함을 입었던 자식들을 너무도 허망하게 떠나보내게 된 부모들의 통한(痛恨)의 몸부림 때문이다-). 

 

6) 다시 보자. 바벨론 포로시절의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무슨 은혜를 입었나? 겉보기에는 여호와가 그들을 위해 아무런 수고와 헌신이 없었던 것같이 보였다. ‘무능한 신’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바로 그 부분을 생각하면, 여호와의 마음은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하셨겠는가! 하지만 여호와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죄 값을 잘 치루고 깨끗한 새 백성으로 나와서 활동할 새 시대를 위하여 계속 일하셨다. 

 

다니엘서에서의 여호와의 모습과 지난 주일에 만났던 애가(哀歌)서에서의 여호와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고통하는 백성들과 함께하셨는지도 확인하였다. 구속함을 입은 자는 그런 하나님의 연단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극복해 낸 남은 자(Remnant)들을 말한다. 여호와는 포로 환국 시에, 그런 구속함을 받은 자들을 이끄시면서 선한 목자(牧者)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그 바람에 영영한 희락과 기쁨과 즐거움만이 가득하였을 뿐, 조금 전까지 그들을 억압해 왔던 슬픔과 탄식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말이다!!(10절). (-이스라엘은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쟁 없이 평화로운 본국에로의 귀환을 이룬 유일 국가가 되었다.)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사야서가 오실 메시아로 인하여 이 세상의 대 변화를 ‘낮은 곳에서부터 견인하여 이룰 것’을 예고하고, 또 그 일을 오직 주님의 구속함을 받은 이들을 통하여 누리고 확산될 것을 예고했던 내용이었다면, 복음서는 그런 예언들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와 그의 택함 받은 제자들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 준 내용이다. 그 현장을 함께 살펴보자. 

 

1) 예수님의 제2차 수난예고가 있은 후, 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끼리 한 쟁론(爭論)이 있었다. 그 쟁론의 핵심은 ‘서로 누가 크냐’는 것이었다(33-34). 

그런 논쟁은 자기들끼리는 종종 있었던 거였다. 그것도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런 자체 논쟁은 뜨거웠다. 왜 그랬나? 범상치 않은 스승 예수의 행보를 볼 때, 머잖아 대권(大權)같은(?) 큰 자리에 오르실 분처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제자들만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의 가족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사였다. 그러기에 세베대와 요한의 엄마가 어느 날, 예수께 단도직입적으로 공개 청탁(請託)을 했었다. ‘당신의 날이 오거든, 내 아들 하나는 당신의 우편에, 또 하나는 당신의 좌편에 있게 하소서’(마20:20-참조)

 

2) 예수님은 전혀 의외의 내용으로 대응하셨다. 제자들의 시선은 줄곧 높은 자나 모두를 지배하는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들 앞에 초라한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시며, 그 아이를 보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나온 말씀은 어느 때보다 훨씬 단호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36-37절). 

 

3) 문제는 주님의 그 말씀이 제자들의 마음을 깨우치는 단순 교육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종에 그 동안의 제자들의 삶과 가치관을 일거에 뒤집어 놓는 차원으로서, ‘예수의 새로운 가치관을 좇을 거냐 거부할거냐 선택(選擇)하라’는 심각한 요구였고, ‘내 말을 따르는 제자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단(決斷)하라는 초강경의 통보였다. 주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4) 이유는 분명하다. 제자들의 그러한 높아지고자 집착하는 사고(思考)와 지배자 중심주의적 성향은 당신이 이 세상에 섬기러 오신 이유와는 정반대의 것이었고, 본질적으로는 범죄를 유발(誘發)하는 인간적 본능의 산물이어서(벧전2:1참조), 결국은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이 분명하였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보자. 주님이 어린 아이를 대안으로 내세우신 까닭은 무엇인가? 

 

5) 어린 아이는 당시 ‘이등(二等) 인간’의 상징이었다. 일등을 추구하는 사회와는 전혀 걸맞지 못한 존재였다. ‘모자란 인간’의 총체(總體)였다. 못 갖춘 인간, 약자, 작은 자, 도움이 필요한 자로서, 정상적인 사람들 축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기득권 세력에게 밀려난 존재의 대표였다. 주님도 물론 당신의 제자들이 진정 세상에서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방법과 접근이 세상의 것과 달랐다. 진정으로 ‘가장 큰 자’가 되려면, 그리고 광야에 꽃이 피고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하려면, 바로 사회에서 밀려 난 외롭고 슬픈 존재들까지도 품고 사랑하며 존중하여서, 그들까지도 기뻐하는 세상을 만들 때 비로소 일등이 가능함을 일깨우신 것이다. 

 

6) 그렇다. 주님은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세상을 열지 못하면, 이 세상은 결코 참된 구원을 맛보지 못할 것임을 잘 아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은 지배자가 아닌 섬기는 사람으로 오셔서, 당신의 제자도 그런 자가 되겠느냐는 것이었고, 그 길을 원치 않는다면 당신을 즉시 떠나라고 단호히 요구하신 것이었다. 결국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전 제자들은 예수의 그 말씀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게 된다. 그 복종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거듭나면서 주님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지구촌에서 ‘큰 자’로 영원히 추앙 받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의 무게에 짓밟혀 본 적이 있었는가? 그 말씀 때문에, 내 삶의 방향과 구도가 재편되어 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과연 어떤 새로운 세계가 보이던가? 광야에 길이 나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는 놀라운 경험이 따르던가? 그렇다. 오직 그의 말씀을 수용할 때, 주의 오심인 성탄(聖誕)은 비로소 나를 위한 성탄이 될 것이다. 기쁨과 감사의 성탄이 되리라!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의 무게를 엄중히 체험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예수를 체험한 이였다. 그 결과 예수는 말씀대로 오셨고, 사셨고, 가셨고, 다시 오실 분이시고, 말씀 자체이신 분임을 알았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을 상대하는 분명한 방식이 있었다.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며 사는 일이 곧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일이며, 그의 구원을 누리는 길임을 알았다. 그러기에 교회 가족들을 향한 그의 권고 편지에서는 주님의 말씀에의 순종하기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1) 진리(말씀)에의 순종은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의 뜻을 좇는 일이어서, 그 사람의 영혼(靈魂)을 깨끗하게 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도록 견인(牽引)한다(1:22 참조). 

 

2) 우리의 거듭남(중생)도 전적으로 말씀에의 복종에 의한 것이다. 까닭은 말씀 자체가 항상 살았고 세세토록 있으면서, 그 내용을 믿는 자에게 구원(救援)까지 주기 때문이다(23-25절). 

 

3) 주의 사랑(인자)을 맛본 이들, 즉 속죄함을 입은 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누가 높으냐’라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갓난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신령(神靈)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완전한 구원을 향해 계속 자라가야만 한다’(1-3절).  

 

결론은 이렇다

 

성탄이 임박했다. 아기 예수를 맞이할 나의 구유는 무엇인가? 그 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말씀에 대한 복종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세속적 욕망을 씻어내고, 그리스도의 섬김과 낮아짐의 옷을 입자. 신령한 말씀을 사모하면서 그의 백성들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자. 그의 말씀으로 내가 계속 자라가기를 소원하며 다짐하자. 성탄의 감동이 더욱 충만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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