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1: 26-31, 눅12:4-7, 요일3:1-10
오늘은 창조절 둘째 주일이다. 날씨도 완연한 가을이다. 아직은 한낮 더위의 위력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높고 푸른 하늘, 시원한 그늘, 습하지 아니한 일기 등은 분명히 백로(白露)에 접어든 가을이 열렸음을 실감하게 한다. 확실히 우리 대한민국은 사계절의 확연한 변화와 온도 차, 그로 인해 형성된 자연 생태계의 역동적 변화와 그에 대응하는 국민들의 다양한 대응적 능력 면에서, 온 세계에 여러모로 자랑할 만한 것이 많다고 생각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창조절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더욱 집중해서 배우게 된다. 지난 첫 주일에는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깊이 살펴보았다. 분명한 사실은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일에서 하나이셨다는 점이다. 이는 창1장의 태초에 있었던 천지창조 과정에서부터, 삼위 하나님은 하나 되셔서, 세상 만물과 생명 존립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일‘에 하나 되어 이루셨음을 보았다.
그러면 둘째 주일인 오늘은, 삼위 하나님의 어떤 창조가 펼쳐지는가? 바로 만물의 영장(令長)인 인간(人間)이 창조된 부분이다. 구약 창세기에서는 삼위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인 인간(인류) 창조에 관하여 소상하게 소개한다. 특히 인간이 본질에 있어서나, 운명에 있어서나, 기원에 있어서 조물주 하나님과 어떻게 절대적으로 관련해 있는지를 매우 깊게 통찰하게 해 준다.
복음서에서는 삼위 중, 인간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께서 그와 관계를 맺고 살게 된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내 친구(親舊)‘라고 칭하시면서, 그런 관계 속에 들어선 자들을 향하여 ’두려워 말라‘는 당부를 하신다. 예수와 친구 관계만 소중히 유지될 수 있다면,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친구들의 모든 삶을 지키고 보살피며 안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의 여정은 물론, 영생과 영원까지도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서신서에서는 주의 성령이 교회 공동체의 믿음의 행보를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자녀(子女)로 불러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그 안에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인, ’하나님의 씨‘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녀 삼아 주신 것이다(요1:14 참조). 따라서 그런 성별 받은 은혜를 소중히 보전하고자,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며 살게 되면,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온전한 인간으로 서게 된다.
오늘은 마침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주일로 지킨다. 본 교단 총회는 이번 주간에 제111회 정기총회로 모이기도 한다. 사실 ’교회 연합(聯合)‘이란 말이 새삼스럽다. 특히 요즈음의 한국의 개혁교회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서로 연합과 하나 되심을 제대로 본받지 못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분열하고 시기하고 정죄하며 지내는 바람에, 교회는 교회대로 거룩한 힘을 잃고 자정 능력도 쇠약해지면서, 세상을 이겨낼 힘을 상실해 있게 된 모습이 아주 부끄럽다.
이에 우리 총회는 이번에 홍천 총회에서(15-17일), ”살아 계신 하나님,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창1:1, 시8:1-9, 엡4:1-6, 요1:1-5 참조) 라는 주제를 내걸고 우리의 낡은 모습과 분열된 모습을 회개하며 거듭나게 되도록 하나님께 은혜와 능력을 간구하는 대회를 갖는다. 부디 우리 기독교장로회만이라도 이 신령한 사랑의 힘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게 되도록, 모든 총회 가족이 마음을 모아서 더욱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1. 구약 / 창1:26-31 /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음 주시며 ---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본문은 피조 세계의 한가운데에 ’하나님의 대리자(代理者)‘로 서게 된 존재인 인간(人間)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그렇게 창조주에 의해서 지음을 받게 되었는지를 전한 내용이다. 인간은 창조주에 의하여 지음을 받은 모든 만물 중에 가장 마지막인 여섯째 날에야 지음을 받았다.
1)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사역의 정점(頂點-Highlight)을, ’우리의 형상(形相)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는 일로 정하셨다(26절). 여기에서 ’사람‘은 ’인류(人類-켈러)‘란 집단이라고 하기도 하고, ’인간들‘(루터)로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우리‘란 표현은 그곳 천상의 천사와 같은 보좌진을 상대로 하셨다기보다는, (지난주에 증언한 대로) 성자 로고스와 성령이신 삼위(三位)를 상대로 ’우리‘라고 표현하셨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 삼위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도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육체(肉體)로 표현해 줄 피조물 하나쯤은 지구촌에 있음이 좋겠다는 뜻을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삼위인 자신들 사이에도 서로 대화하고 사귐을 가지며, 자유와 함께 사랑도 함께 나누며 사시는 모습처럼, 그 정도의 내적 역량이 부여된 육체를 가진 피(被) 존재인 사람을 만들자는데, 합의하셨다(26절).
동시에 창조주는 그런 존재인 인간과는 직접 대화도 하시고 사귐도 하실 수 있고, 또 당신을 대신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기도 하되, 거기에는 책임도 지게 하는 구도로 존재하게 하도록 디자인하셨다. 그 바람에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께 자기의 전(全) 존재로 긍정과 부정 모두를 통하여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될 수가 있었다. 동시에 그에 따른 영구적인 책임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서게도 되었다.
2) 하나님은 이때 그런 사람을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로 만드셨다. 곧 이성(異性)의 구조 속에서 서로 인간 됨을 확인하며 살게 되는 구조로 인간을 만드셨다(27절). 생산의 구조도 여자에게서 남자가 태어나고, 남자에게서도 여자가 태어나는 구조였다. 그러기에 참 인간이요 성숙한 인간으로 살려면, 남녀가 서로 배필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서로를 배우고 아끼며 주고 나누며 살아가야만 무르익은 인간이 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걸 잘하는 것이 참 복이었다.
그렇다. 창조주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도 그 절묘한 양성의 조합(調合)을 통하여 가능하게 하셨다. 동시에 이런 생육과 번성의 복에는, 보다 큰 뜻을 담아주셨다. 곧 인간 생명의 역사를 중단없이 건강하게 이어가게 하시려는 조물주의 의지였다. 나라나 종족과 가계의 최대 위기가 무엇일까? 종족 생산이 중단되거나, 가계가 끊어지거나, 민족이 말살되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가족의 가장 큰 비극도 그렇다. 후대가 끝나는 일이다. 생육. 번성의 복은 그런 비극을 막자는 것이다. 신앙 삼대(三代)론도 생육과 번성을 보다 확실히 하고자 함이었다.
요즈음 결혼이나 출산 등에 소극적이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물론 신앙적으로나 구조적으로 피할 수밖에 없는 일도 있으리라. 하지만 자기 편의적인 사고만으로 이 은총의 생산과 번식의 선물을 피하는 일은 결코 창조 질서에 부합되지 않는다. 동성애를 비롯한 각종 변태적인 애정 행태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욱 피해야만 한다.
3) 이와 함께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지상 대리인인 인간들에게, 지상의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세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먹거리 공급을 위해 지상의 모든 채소들과 씨 맺는 열매들을 기르고 거두는 등의 노동(勞動)하면서 땀 흘리며 먹고 살아가게도 하셨다(28,하-29절).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노동을 신성시하며 감당해야만 하고, 결코 먹고 놀려는 나태한 삶에 빠져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4) 이러한 창조의 모든 일정이 한 주간 사이에 잘 끝내게 되자, 창조주께서는 크게 만족하시면서 기뻐하셨다(31절). 한 주간의 노동이 제대로 수행될 때, 진정한 휴식과 안식이 따르게 되는 것임도 계속 보여 주셨다. 진정한 휴식(休息)은 창조주의 작품이기도 함을 보여 주셨다.
2. 복음서/ 눅12:4-7 / ” 내가 내 친구(親舊)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
본문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당신의 선택받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내 친구(friend))‘라고 부르신 곳이다(4절).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친구는 대체 어떤 존재였나? 죽어 장사 지냈던 나사로를 향해서도 주님은 우리 ’친구‘라고까지 칭하셨다(요11:11 참조). 그만큼 친구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필요하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도 있는 관계이고(마26:50 참조), 종에게서는 감히 엿볼 수 없는 가족사의 비밀인 ’자기 아버지께로 들었던 바까지도‘ 그에게는 다 알리기도 하는 차원의 관계‘에 있는 존재가 바로 친구였다(요15:12-15 참조).
1)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라면, 다음 사항에 매우 유의하며 살아야 함을 알리셨다.
곧 진정으로 두려워할 대상을 정확히 분별하며 살 줄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5절). 그것은 비신자들은 대체로 자기 목숨을 끊을 위협적인 존재만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굴복하거나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정작 자기 죽음 후에 자신을 지옥에 보낼 심판자 하나님을 향해서는 두려워하지 않고 산다는 점에서, 예수께서는 그런 착오에 깊은 안타까움을 표시하신 것이다.
2) 당신의 친구들은 절대 그런 사람들과는 달라야 했다. 본래 단 한 번의 죽음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당신의 친구들은 그 처음의 죽음이나 자기를 그 죽음에로 몰고 가는 자들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정작 그 첫 죽음 후에 자신을 기다리는 둘째 죽음, 곧 영원한 구원이냐 심판이냐를 결정짓게 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향해서는 절대 두려워해야 한다. 이는 공포감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그의 심판을 기억하며, 거기에 대비한 삶을 이 지상에서부터 엄중히 살아야 한다는 점을 그렇게 강조하신 것이다.
3)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대목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친구 된 당신의 제자들을 잊지 아니하신다는 점이다(6절). 그 까닭은 주님은 그의 전체 삶을 완벽하게 기억하시고, 그가 또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세상의 위협이나 공세에도 두려워 말아야 한다.
3. 서신서 / 요일3:1-10 /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子女)라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법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
본문은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 가족을 ’하나님의 자녀(子女)‘라고 부른 곳이다. 이는 창세기의 단순한 사람 차원에서 훨씬 더 나아간 관계이며, 복음서의 친구란 차원보다도 훨씬 깊이 들어간 관계이다. 자녀는 가족이며, 피와 씨를 나눈 혈족이어서, 결코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절대 수준의 관계에 들어섰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원한 가족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함께 믿는 사람들을 참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1)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바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셨음을 말한다(1-2절). 이는 그가 우리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그의 사랑과 후원을 듬뿍 받으며 살아갈 은혜와 영광을 누릴 존재가 되었음을 뜻한다. 하나님 자녀의 참모습은 아직 나타나진 않았으나, 우리가 소망 안에서 그때를 기다리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제대로 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우리가 자녀의 품격을 갖추고 살아가는 일이다.
2) 하나님의 자녀는 기본적으로 불법인 죄를 범하고 살지 않는다(3-6절). 자신을 깨끗하게 관리한다. 이는 주께서 처음부터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죄짓고 살면 그는 마귀의 자식이기에, 오실 주를 영접할 수 없으리라!
3) 자녀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예수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산 자들이다. 하나님의 씨(seed)가 그 안에 떨어져 있기에, 그는 체질적으로 범죄하지 않고 그 대신 의(義)를 추구하며 살게 된다(7-9절). 그러면서 그의 삶과 행실은 마귀의 자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곧 항상 옳은 것을 추구하며, 주변 형제자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는 모습을 보여 준다(10절).
o 오늘은 교회연합주일이며, 본 교단의 총회 회집 주간이기도 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신앙공동체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회동체이며, 성령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체이다. 그러기에 어떤 경우에도 절대 분열과 다툼을 일삼는 마귀의 손아귀에 놀아나서는 안 되고, 당연히 서로 사랑하며 삼위이신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이 세상에 정착시키는 일에 가장 앞장서야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일에 일치해야 한다. 그런 중에 특히 우리 교단 기독교장로회는 그런 성서적 교회를 세우는 일에 그 어떤 공동체보다도 더욱 앞장서서, 빛을 발해야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