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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3)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남신도회주일

관리자 2025-09-16 (화) 21:10 2시간전 3  

본문) 창 12:1~9, 요8:53-59, 갈3:1-14


오늘은 창조절 셋째 주일이다. 분명히 날씨는 완연한 가을이 시작된 분위기이다. 그토록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강릉 지역에도 마침 120mm 넘는 가을비로 인하여, 큰 위기를 넘기는 듯하다. 기상 이변이 속출하면서 전 지구촌이 각종 몸살을 앓는 중이라서, 이렇게라도 정리가 된다면 그래도 감사할 뿐이란 생각이다. 이제라도 인간은 창조주 앞과 그의 무대인 자연 앞에 더욱더 겸손한 마음과 자세를 갖추고 살아야 하겠다. 


오늘은 마침 총회가 제정한 남(男)신도회 주일이면서, 동시에 제110회 교단 총회가 강원도 홍천에서 개최되는 주간이기도 하다. 본 총회는 ‘살아계신 하나님, 처음 사랑을 회복(回復)케 하소서’(느8:1-12, 시42:1-11, 계2:1-7, 마7:15-17)라는 주제를 내걸고, 새로운 한 해의 살림살이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런 주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만연한(계2:6,14-15 참조) 니골라당(黨)의 모습처럼, 교회의 첫사랑을 지켜내지 못하고 복음의 변절자들이 되어, 하나님과 세상에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린 우리네 모습을 참회하며, 이제라도 그 첫사랑을 되찾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교회가 되기를 다짐하고자 한다.


부디 이런 성서적 신학적 영적 노력들이 크게 결실하면서, 우리 교단이라도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교회상을 새롭게 구축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하자.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부터 가열 차게 시작해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본 연구원이 오랫동안 씨름해 온 삼위일체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설교 운동은 더욱 가치가 있고, 마땅히 강화되어야 할 큰 과제이다. 사실 한 분문 설교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자기중심의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 중심의 설교로 전이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지금보다도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세 본문 설교는 분명히 큰 부담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주님의 강단을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강단의 주인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로 굳게 세우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세 본문 설교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 씨름에서 반드시 승리해 내야 한다. 그날 그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속에서, 핵심이 되고 공동의 주제가 되는 내용을 캐내되, 그 주제에 관련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입장을 구약과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나타난 바를 조곤조곤 밝혀주면서, 그러기에 우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설득하면, 그날 말씀의 식탁은 분명히 생명의 양식이 되어 우리의 영혼과 교회를 살릴 것이다. 


마침, 오늘 주일의 주역인 교회의 남신도 회원들은 바로 그런 강단 설교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살아야만 할 복음과 선교의 주역들이다. 그런 그들의 영적 상태는 어떤가? 특히 지금은 가을 추수철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이들의 영혼들이 말씀의 열매들로 살아온 결과물을 추수할 때이기도 하다. 어떤가? 한 해 동안 본교회 남신도회원들의 신앙 발전은 어떠했으며, 그 성장의 열매는 무엇인가? 혹 이점을 서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 진정 큰 은혜와 감동의 시간이 될 것이다. 무(無) 열매라면, 당연히 회개의 시간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오늘 세 본문 내용에는 한 분의 핵심적 인사(人士)가 나온다.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祖上)인 아브라함이다. 그는 단순한 조상이 아니다. 그는 나이 75세에 여호와를 만나서, 새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모든 남신도 회원들의 완벽한 모델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마침 오늘 세 본문 전체를 관통(貫通)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구약 창세기 본문은 이 아브라함이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서, 그토록 확고부동한 복(福)의 근원이 된 존재이었는지를 밝혀준다. 그로 인해 시작된 구원의 질서에도 주목하게 한다. 


복음서 본문은 성자 예수님이 아브라함에 대한 어긋난 인식에 빠져 사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보시면서, 당신과 아브라함과의 관계, 곧 세상 일반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에 관하여 밝혀주신 놀라운 내용이 소개된다. 하늘 회의의 일부를 맛보게 한다. 


서신서인 갈라디아서에도 아브라함이 나온다. 이방인 교회인 갈라디아 교회의 개척자인 사도 바울이 율법에 나온 할례 문제로 인하여 구원론에 큰 혼란에 빠진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신앙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조상 아브라함이 모세의 율법이 없을 때부터도 오직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믿음과 순종만으로써도, 의(義)과 복(福)과 구원의 길에 이르렀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율법에로의 회귀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결국 이 인물 아브라함은 오늘 21세기에 예수를 믿고 사는 온 세상 전 성도들의 조상도 되신다. 중요한 일은, 그는 이미 세계 기독교 계열의 4대 종파인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신자들 모두의 일치된 조상이 되셨지만, 그 후손들인 우리 사이에는 이미 서로 갈라져 싸우고 죽이고 원수가 되어 세계 평화를 무너뜨리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겠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산다는 점은 여전히 우리의 큰 숙제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말씀 중에는 특별한 부분이 눈에 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 나라에서 주님의 때(his Day)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8:56)라는 성자 예수님의 증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곳이 어디였을까? 그리고 예수의 무슨 모습에 아브라함이 그렇게 즐거워하며 기뻐했을까? 내 소견은 이렇다. 그곳은 성자가 성육(成肉)하시기 전에 개최된 하늘 회의로 보이고, 그 회의에는 아브라함도 참여했는데, 그곳에서의 성자 파송의 결정 사항을 두고, 아브라함이 특히 기뻐한 것이다. 자신의 구원관 중에서 크게 무너진 이웃 사랑 부분을 복원하기 위해서, 메시아로 세상에 가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1. 구약 / 창12:1-9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


본문은 인간 아브라함이 어떻게 영원자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내용이다. 특별한 요인이라면, 그에게 건네준 하나님의 언약(言約-약속)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순종이다. 그것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 행동자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오직 믿음으로 여호와의 사랑과 구원을 받게 되는 길잡이(조상)가 된 것이다. 그를 향한 여호와의 명령은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메소포타미아 & 하란)을 떠나서, 당신이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고, 그 대가는 미래의 영구적인 언약들이었는데, 성격상 손에 쥘 현찰이 아닌 보증수표 같은 약속의 말씀이었다. 그걸 믿었다! 


그가 받은 언약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이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차원이다(2절). 그로 큰 민족을 이루도록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여서, 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2절). 이 일은 아브라함 스스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주도로 이루어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는 일 못잖게, 그 자신도 하나님을 완벽하게 믿고 사랑하는 일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그가 복이 성취된다!


또 하나는 이웃(인간)들과의 관계 차원이다(3절). 그를 지렛대 인물로 세워서,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곧 아브라함 후손 된 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엮어주는 중심축이 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인간 스스로 가능한가? 가능하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네가 받은 사랑과 축복을 독점하지 말고, 못 받은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며 살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고 하면, 이 복의 실현은 가능하다. 


이 두 복에는 큰 특징이 있다. 하나님께 받는 복과 인간에게 주는 복이 하나의 옵션(option)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분리는 아예 처음부터 허용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분리시키면 어떻게 되나? 그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의 복 모두를 훼손하는 범죄자가 된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받게 된 복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과는 아주 성격이 다르다. 기쁘게 받고, 열심히 나누고 주며 사는 삶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함정(陷穽)도 있다! 


곧 복을 거머쥔 자들이 자기 욕심이나 교만에 사로잡혀서, 그 복을 무기로 삼으려고 할 때이다. 이 지점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거 무너졌고, 자격 상실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받은 그 축복을 특권화시키고, 못 받은 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면서, 그들 위에 군림하는 교만의 함정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함정에 깊이 빠져든 대표적인 무리들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복음으로 받아 누려왔던 유대인들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대체 누군가? 예수를 가장 미워했고 증오했으며 나중엔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도 가장 앞장섰던 자들인 이 바리새인들은 대체 누군가? 그들은 유대 신앙사에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가장 잔인했던 박해와 탄압을 순교로 견디어내며(BC170년), 율법 종교를 지켜낸 전사들이었다. 그런 후에 유대교가 국가 종교로 자리할 때, 민족 신앙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한 열성적 종교 기득권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왜 예수님과는 그토록 맞섰고 어찌 그렇게 증오했던가? 


바로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이중적 복에서, 첫 번째인 하나님 사랑의 복에만 천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웃 사랑의 복에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잘 섬기면 의인이고 구원을 받는다는 면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어느덧 극우 신자들이 되어 있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수많은 죄인(罪人)들을 구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곧 그들이 외면하고 잃어버린 이웃 사랑의 복음을 되찾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를, 그들은 그토록 자기의 걸림돌로 알았고, 제거의 대상 제1호로 삼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보신 그때의 유대교는 이미 더 이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귀의 자손들에 불과하였다(요8:44). 그 마음들이 자기 욕심과 살인자의 마음과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종교집단에 불과하였고, 불의의 칼날을 휘두르면서 숱한 죄인들만을 양산하는 정죄와 교만의 집단이었다. 이 심각한 사태 해결은, 땅이 아닌 하늘의 개입이어야만 했다.


이런 현상을 저 하늘나라에서도 매우 심각한 일로 보았다. 그런 행동은 분명히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 백성들의 것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서둘러 저들을 잠재우고, 그들에게 외면당한 이웃 사랑의 복음을 회복시키려면, 하늘의 특별한 개입과 능력이 필요함을 절감한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특별한 총회가 열렸다. 아브라함까지도 포함된 회의였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바로 독생자 예수를 파송하여, 그 실종된 복의 질서를 되찾기로 한 것이다(요3:16). 


2. 복음서 / 요8:53-59 /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본문은 오직 하늘나라에서 진행되었던 총회에서 결정된 내용으로, 그 회의의 주역이셨던 예수께서 친히 공개하신 핵심적 내용의 일부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땅의 인간들로서는 소화시킬 수 없는 증언이었기에-, 그 유대인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주요 내용이다. 


1) 하늘 아버지가 아들 그리스도를 지목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시는 모습이 나온다(54절). 

2)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그의 말씀을 좇으신다(55절). 

3) 그곳에 합석한 아브라함은 주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고, 보고 기뻐하였다(56절). 

- 이 대목은 아마도, 하늘 회의에서 아들의 세상 구원을 위한 파견 결정을 대하면서, 참석자인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매우 기뻐했던 반응을 예수께서 그렇게 밝히셨던 것으로 보인다. 

4) 그때 아들의 위상(位相)은 하늘 아버지 급(級)으로서,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 계신 엄존(儼存)자이셨다(58절, 출3:14 참조). 


3. 서신서 / 갈3:1-14 /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갈라디아 교인들은 비유대인이며 이방인 출신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율법에 매이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만으로도 충분히 의와 구원과 복을 받는 길이 열렸음을 믿고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임당하시면서까지 속죄 제물이 되신 까닭도, 세상의 모든 죄인들과 이방인들이 어려운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과 순종만으로도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또 구원과 복을 받게 되도록 하기 위함임을 명심해야만 했다(6-9절). 곧 믿기에 얻게 된 신분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놀라운 사실을 외면하고 율법(할례 같은)에 따른 구원을 추구하는 일은, 율법이 주는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망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된 자가 없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를 통하여 걸머지신 ‘속죄의 복음에 아멘하는 자들’은 그 누구나 의인(義人-義認)이 되어, 그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11절). 그에게는 바리새인이 가졌던 정죄의 힘은 없고, 그 대신 속죄자 예수의 은혜의 힘만이 가득하기에, 그들은 하나님 사랑은 물론 이웃 죄인들에게까지도 사랑하며 사는 온전한 구원의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된 것이다. 


O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 자손 됨은 하늘도 인정하고 땅에서도 인정하는 확실한 구원의 증표이기에 아주 중요하다. 이름만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과 질이 그의 자손 됨을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이면 확실하다. 성령은 나의 삶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살게 하는 유일한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을 계속 점검하자. 건강한 자손되어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남신도회원들이 되자. 결코 영적 장애인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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