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3:1-13,22-24, 마18:1-14, 롬5:12-21
오늘은 창조절 셋째 해의 첫 주일이다. 삼위일체 교회력에 따르면, 성부 하나님의 계절을 모든 절기의 처음과 시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고 있기에, 9월을 맞이하는 오늘 창조절 첫 주일을 새해 첫 번째 주일로 맞이한다. 창조주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의 백성으로서의 복종하는 삶을 다지면서, 한 해를 맞이하려고 한다. 교회력 새해를 맞이하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한다!
아울러 본 교단은 이 첫째 주일을 교회 개척 선교주일과 함께 재일동포 선교주일로도 지킨다. 모든 교회는 교회의 주되신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개척자들의 헌신과 수고로 시작했다. 각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이 개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인한 헌신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물론 개척교회 모두가, 온전한 교회로 자리 잡은 교회가 된 것은 아니다. 그 중엔 부실한 사역으로 인하여, 도중하차 되듯 열매 맺지 못한 체, 간판을 내리게 된 곳들도 많다. 안타깝지만,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의 몫이지, 인간의 몫은 아니라고 본다.
재일동포(在日同胞) 선교는 매우 특별한 선교이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재일동포는 대부분 일제 식민지 시절의 유산들이다. 일제 시절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본 생활을 하다가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그냥 체류하다가 오늘에 이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미 5-7세대에 이른 상태이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들이 됐다. 인종차별에 시달리기도 하고, 공민권도 제지당하기도 하는 등의 각종 삶의 불편을 감당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삶의 희망과 긍지를 안겨주며 선교하는 분들의 헌신도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
이런 교회의 환경에서 우리는 절기 첫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성부의 절기이기도 하기에, 이 절기에는 주 본문이 구약의 내용이고, 복음서는 그 말씀을 입증하는 내용이며, 서신서는 우리가 깨닫고 전해야 할 말씀이 된다. 증언의 흐름도 그 순서대로 하게 된다.
먼저 생각할 대목은 에덴동산에 관련된 기사를 어떻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냐는 점이다. 분명히 에덴동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다. 심지어 문제 메이커인 뱀(serpent)까지도 말이다. 첫 절(1절)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奸巧-crafty)하니라’라고 설명할 정도였다. 이 부분은 복잡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 유해한 짐승까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일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질문의 이면에는 ‘좋으신 하나님의 창조 범위는 완전히 선하고 온전하고 흠 없는 것들만 되는 것 아닌가’라는 순진한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만일 선한 것만 창조하셨다면, 그러면 ‘악하고 흠 있는 것들은 여호와 이외에 또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라는 또 다른 창조의 신에 대한 의구심도 유발되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선한 창조주와 불의한 창조주가 따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라는 망상에까지 뻗칠 수 있음이다.
하지만 우리의 성서는 그런 두 종류의 창조주가 존재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단호히 거부한다. 창조주는 한 분일 때, 창조주이지 두 종류의 창조주란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성격과 한계에 대한 자신만의 규정을 두려고 하면 안 된다. 이점은 잠언 현자의 증언대로, ‘여호와는 온갖(선악 간의)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으니라’(잠16:4)라는 말씀 안에서, 뱀까지도 지으신 용도를 이해함이 좋다.
곧 창조주께서는 왜 착한 선인이나 완전한 의인만을 만드시지, 오직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만을 만드셔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의 출발을 불순종과 부족과 한계와 의지(依支)함에서부터 하게 하느냐 라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인간의 실존(實存)이 이러하다는 점을 알려주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보면서, 이 창조의 무대인 에덴동산이란 삶의 무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찾으려는 마음을 품고 지내면 좋다.
무엇보다도 완전한 자요 의인들이 있을 곳은 이 세상이 아니다. 그들이 살 곳은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가 예비하신 하늘의 집(영역)이다(요14장). 이 세상은 다만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알고 구원의 주를 믿고 의지하면서, 그 완전한 나라를 소망하며 준비하며 사는 자들의 거주지로 보면 된다. 곧 이 세상의 삶을 나그네요 거류민 의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벧전2:11).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에 소개된 에덴동산을 어떤 곳으로 간주하면 좋을까? 창조주 하나님의 주되심을 믿고 있는 지상의 교회 공동체의 영적인 모습을 압축한 내용으로 보면 되겠다. 에덴을 세상만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급한 요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분명히 낙원은 아니다. 오히려 치열한 이 세상에서 자신을 거룩히 지켜내야 할 교회(敎會)란 실상을 말함이 분명하다.
그것은 첫째 에덴에는 하나님과 그의 계명인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아담과 이브란 믿음을 가진 가족 공동체가 그 모델로 등장한 까닭이다. 셋째는 뱀이란 유혹자가 있어서,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시험하고 해치게 하는 유혹자로 엄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는 그 계명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가 얼마나 엄중하고 무서운지에 대한 심판이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 에덴 이야기는 창조주께서 인류를 깨우치기 위해 주신 최대의 창조적 선물이 분명하다.
복음서 말씀은 다가올 미래, 곧 거룩한 천국 입성에 대하여, 우리가 보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핵심 요인은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이냐 여부이다. 그러면서도 그 주변에는 그런 순수한 마음을 얕잡아 보고 무시하려는 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자들의 공세를 상기시키고 경고도 해주신다. 작은 자 하나의 인격과 가치를 존중하시는 여호와이심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함을 일깨우신다.
서신서를 통해서는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디른 두 개의 길이 제시됨을 알린다. 하나는 첫 사람 아담을 통해 열린 길로서, 죄와 심판과 사망이 들어왔고, 다른 하나는 제2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길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를 선택함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새로운 인류를 위하여 의와 생명의 근원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어린아이와 같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절대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을 이기고, 의와 영생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1. 구약 / 창 3:1-13, 22-24 /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 ”
아담은 본디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하아담)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이다. 첫 사람에게서 인류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특히 이 질문은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의 대표 주자인 인간에게 던져 주신 첫 질문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9절).
사실 모든 질문은 먼저 생각하게 하고, 대답도 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담의 답변에는 그가 얼마나 곤혹스런 삶의 현장에 서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여호와의 질문은 뜻밖에도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현존(現存)도 가감 없이 들통나게 한다!
1) 그들 부부는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선악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창조주 여호와의 계명과 질서를 이미 듣고 지내는 영혼이었다(창2:16-17).
그러기에 그들은 그 금지 명령을 따라서 살고 있었다. 그걸 양심의 법으로 간직하고 살았다. 그런데 강력한 유혹자가 등장하자, 그만 그 계명 수호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하나의 법인 양심(良心)을 포기하고, 두 마음의 법인 양심(兩心)을 취한 이중인격자가 되고 말았다.
2) 그들을 향한 강력한 유혹자는 뱀이었다. 대단한 두뇌와 교묘함으로 무장한 짐승을 만난 것이다. 그의 접근은 우직한 남자가 아닌 유연성을 가진 여자였다. 목표는 여호와의 선악과 금지에 관한 이유를 캐묻는 궁금증의 차원이 아니라, 그 질문을 통하여 계명을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예 깨려는 데 두었다. 그래서 여자의 답변이 유연해지자(?/3절), 그는 여지없이 자기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너희는 죽지 않는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4-5절).
이는 본래 피조물이 선악을 아는 일로 조물주의 수준에 들어가게 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언사인데도(22절), 뱀은 그렇게 여자를 유혹했다. 사실 금지령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뱀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역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곡해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하는 허영 된 욕망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소중한 양심이 무너진 후의 인간의 추하고 안타까운 모습에 휩싸이고 만다.
3) 가장 첫 열매는 죄의식과 죄책감이 사로잡히게 된 일이다(7-10절). 그것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품게 되면서 찾아왔다. 우선은 말씀(계명)을 주신 여호와를 뵙기가 두려워졌고, 항상 만나면 즐거웠던 이웃들에게도 자신을 감추고 사는 지경에 들어섰다. 자기 개방 시대는 가고, 은폐(隱閉)의 시대가 열렸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이 사라진 존재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책임 회피를 위한 원망과 변명을 늘어놓는 자들이 되었다(11-13절), 남편은 하나님과 아내에게,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자기를 덮고자 했다.
4) 이런 변절된 모습이 하나님의 충격을 컸다. 이런 자들이 만일 영생까지 하게 된다면, 거룩한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은 어찌 될까를 생각하지 않으실 수 없었다. 순수함과 정직함이 사라진 사악한 자들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 역시 오염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당연히 그들을 막아야 했다. 그곳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까지 먹고 영생하는 일만은 막아내셔야 했다. 그래서 추방령을 내리셨고, 다시 에덴의 복귀 여지도 아예 차단하셨다(22-24절).
아담 부부의 이런 변질된 모습을 보면서, 그의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사는 오늘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궁금해진다. 아니, 두려워진다. 턱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모습, 삶의 현장 안팎에서 끊임없이 가해오는 어둔 세력들의 유혹에 아주 취약해진 내 모습, 그러기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양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웅크려 살아가는 내 모습, ‘어린아이다운 순수성’을 찾아볼 수 없이 위선적으로 변절 된 내 모습이 지금 한없이 위험 지경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내가 취할 길은 과연 무엇일까?
2. 복음서 / 마18:1-14 /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
스승의 계속되는 천국 복음 전파는 제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바람에 제자들의 대화 주제도 자연히 천국에 관련된 것이 일상화된 듯했다. 그런 중에 오늘은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점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1절). 남자들의 ‘큰 자’에 관한 일상적 욕망이 천국에서까지 관심으로 이어진 모양새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서열 관심에 앞서서, 천국에 입장하는 일이 우선적임을 지적하시고, 그 바탕에서의 ‘큰 자’에 대한 답까지 주셨다(1-5절).
주님의 천국 입장이 가능한 자의 모델로 삼은 대상은 한 어린이였다. 그러면서 ‘너희가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다(2-3절). 이는 아담 부부가 뱀의 유혹을 받기 이전에 보유하고 있었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주의 말씀에 어린아이처럼 겸손(謙遜)하게 순종했던 모습이었다. 사실 ‘천국에서도 큰 자’란, 바로 그런 자였다(4절).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라고도 일러주셨다(5절).
그런데 여기에서도 유혹자인 뱀 같은 존재가 있음을 지적하신다(6-9절). 공동체 안에서도, 믿음이 작은 자를 실족(失足)하게 하는 자가 있음을 지적하셨다. 아담 부부를 실족하게 하면서 죄짓게 만들듯 말이다. 주님은 그런 자를 아주 맹렬히 저주하셨다. 특히 당신의 제자들이 그 함정에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셨다. 작은 자를 업신여기거나 실족시켜서 다시 길 잃게 만들면, 그들을 돌보는 천사들의 고발이 하나님께 올려질 것을 각오하라는 경고까지 주셨다(10절).
3. 서신서 / 롬 5:12-21 / “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사도 바울은 인류의 운명이 두 사람의 등장에 의하여 극과 극의 대조적 국면으로 형성되었음을 주목하면서(12-17절), 그러기에 저주와 사망이 아닌 은혜와 생명 길을 찾는 모든 이들은 즉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가 안겨주실 영생(永生)의 선물을 받으라고 촉구하였다.
첫 사람은 아담인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不順從)함으로써, 결국 인간 세상에 죄와 사망, 저주와 정죄를 안겨 준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둘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順從)하심으로써, 인간 세상에 용서와 은혜, 의로움과 생명의 구원의 빛을 안겨 준 인물이 되셨다(18-19절). 특히 예수님은 죄와 어둠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결국은 당신이 세상에 안겨 주신 은혜와 생명의 빛을 이길 수 없음을 확실히 입증해 주셨다.
o 우리 앞에는 아담의 길과 그리스도의 길이 놓여 있다.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 함께 있다. 부디 분별을 잘하여, 다시는 유혹자에게 흔들리거나 빠져들지 말라. 에덴의 현장인 주의 교회 공동체와 우리 가족이 불순종으로 무너지게 하지 말라. 특히 겸손하고 자기를 믿지 말라. 다만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에, 어린아이처럼 순종하며 사는 일에 전념하라. 그래서 주께서 안겨 주실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의 위상을 누리며 사는 이들이 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