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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2)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교회연합주일

관리자 2024-09-03 (화) 11:19 13일전 103  

본문) 렘 17:5-8, 마6:25-34, 엡6:10-20 


오늘은 창조절 둘째 주일이다. 무섭게 계속된 폭염(暴炎)과 열대야도 이제는 꼬리를 내린 듯하다. 날씨의 조그만 변동이 이토록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고 절대적이라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비로소 찾아온 새 계절 가을이 여러분 모두에게 신선하고 축복된 계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어떠한 새로운 물결이 우리에게 밀려 들어올지 모르지만, 부디 몸과 마음이 잘 훈련된 탄력 있는 신앙의 힘으로, 영육간의 강건함을 유지함으로써 보람된 세월이 되기를 기원한다. 


오늘은 또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진영이 지키는 교회연합 주일이다. 연합(聯合)은 물리적 통합을 이루자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서로의 다름과 정체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모두의 큰 대의와 목표를 공유하기 위해서 서로 자기를 양보하고 비워서 그리스도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어가자는 취지이다. 마치 찬양에서 4부 합창단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상하면 된다. 각자의 능력과 개성을 발휘하면서도, 얼마든지 함께 조율하면 전체가 하나임을 뽐낼 수 있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하다. 창조주로부터 모두와 전부를 다 받은 인간은 없다. 하지만 창조주는 인간이 부족해도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길은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상대를 인정할 때 나온다. 서로 인정하며 사랑하며 겸손히 상대를 존중하면 열리는 길이다. 내 것이 제일이라는 독선을 내려놓고, 상대의 다름과 차이에서 나를 보완하고 채우려는 공생 공존 공영의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 길을 보여달라’고 명령을 받은 무리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마음’엔 천국은 없다. 모두가 함께 죽는 지옥이 있을 뿐이다. 그 마음에는 누구든 생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crab mentality’(게 정신)라는 말이 있다. 무슨 말인가? 바다에서 잡은 게는 그릇 속에 두면 혼자는 잘 기어 나오는데, 몇 마리를 함께 한 그릇에 담아두면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밖으로 나가려는 다른 게의 꼴을 보지 못하고 서로 덤벼들어 물고 뜯어 공격하며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 크랩 멘탈리티는 바로 마귀 정신이다. 그것이 자리하는 곳은 그곳이 어디이든, 분열과 저주와 상처와 좌절과 탄식만 있을 뿐이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다. 정치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다. 우리는 이런 어둠과 파괴의 영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필히 항생(抗生) 주사를 맞아야 한다. 코로나 항생 주사를 여러 차례 맞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항생 주사를 맞아야 한다. 그 주사가 무엇인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주사요, 성령의 충만을 힘입는 일이다. 


오늘 본문은 마침 두 가지 인간상을 대조하여 제시한다. 저주를 받을 자와 복을 받을 자이다. 

누가 저주요, 누가 복인가? 이 대목은 구약 예레미야 선지자의 증언을 통하여 명확히 구별되어 증거되고 있다. 복음서는 평소의 삶에서 어떤 삶을 취하고 사는 사람이 복을 받고 사는 사람인지를 분명히 특징지어 밝혀 준다. 그러면서 저주가 아닌 복의 사람으로 살도록 안내한다. 하나님 없는 이방인의 문화가 아닌, 그의 백성의 문화를 좇아 살도록 강하게 안내하신다. 


이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여, 교회의 사도인 바울은 우리에게 총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곧 ‘성령의 전신갑주(全身甲冑-amror)를 입으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두운 통치자 및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곧 영적 무장을 단단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에게 번번이 패해 넘어질 것이기에, 정신을 차려서 성령이 주신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할 것을 지시한다.


1. 구약 / 렘 17:5-8 / ”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詛呪)를 받을 것이라 ---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福)을 받을 것이라 “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 칭한다. 그는 조국 유다 왕국이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히 배신하고 이방 강대국에 의존하며 그들의 각종 신들인 우상 숭배에 빠져든 상황을 목도하면서, 그 결과로 그들이 그들의 경배자인 바벨론에게 점령되고 파괴당하여 끌려가 씻을 수 없는 비참한 나락(奈落)에 떨어질 것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었다(17:1-4참조). 이에 선지자는 여호와께 받은 말씀으로 인간 운명의 갈림길을 정리하여 경고 겸 교훈을 강하게 전한다. 


인간들은 예외없이 자신의 안전한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일부만 성취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곧 거짓되고 허황된 안전관(安全觀)에 매달렸고 참되고 확실한 안전관은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일부는 저주를 받고, 일부는 복을 받게 된 것이다. 그 갈림길의 핵심은 분명하다. 그가 누구를 의지했느냐에 있다. 힘이 없는 인간이냐, 힘을 가진 하나님이냐에 있다. 이제 그 차이와 결과를 확인해 보자.


1) 저주를 받을 사람들은 분명하다(5절). 사람을 믿는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성을 포함하여 덧없고 죄 많은 인간(육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한다. 그게 바로 실패와 저주로 이어지는 원인이다. 인간 자체의 한계와 변질을 선택한 결과물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그 입장 때문에 그는 정작 자신을 도울 힘을 보유한 하나님에게도 외면당하고 생명의 근원에서 떠난 사람이 된다. 결국 사람 의지하면, 이렇게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버림당할 처지에 서게 되는 것이다. 


2) 저주를 받게 된 자들의 결과도 선명하다(6절).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좋은 곳이 있는 곳도 구별하지 못한다. 분별력을 상실한 상태이기에, 그는 행복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후회와 탄식만 가득한 버림당한 영역의 일원이 되어 방황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런 상황이 혹 지금의 나에게 와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여 어서 그곳에서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3) 복 받을 사람들도 분명하다(7절).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를 의뢰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이는 지난 주간의 요1:12-13에서 언급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자신의 콘트롤 타우어(control tower)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순복하며 산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자신이 받들고 살아야 할 대상임을 알고 산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더욱 깊이 의지하며, 그의 선하신 뜻과 손길에 자신을 언제나 활짝 열고 살아간다. 


4) 복을 받게 된 자들의 결과도 선명하다(8절). 이들은 저수지를 품고 있고 보화 창고를 보유한 이들과 같아서, 언제 어디서나 환경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가뭄도 타지 않고 늘 청청(淸淸)하고, 거두는 결실도 그치지 않는다. 시1:3의 말씀처럼, 하는 일이 다 형통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시23:4의 말씀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안위해 주심을 믿고 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갈 길 아니겠는가! 


2. 복음서 / 마 6:25-34 /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에, 그들을 세상 일반인들과 차별화(差別化)시키는 교육을 계속하셨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제자들)와 이방인(세상사람들)를 구별하시면서,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의식구조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다. 어찌 보면, 제자들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 확립이랄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앞의 예레미야서의 저주와 복을 받게 될 사람들의 차이에 관한 말씀과도 연관된 내용이기도 하다. 


본문 논제의 주제는 의식주(衣食住) 문제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차별화된 태도들이다. 당시의 백성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빈곤하고 가난하며 일용할 양식 해결에 급급한 터였기에, 그런 주제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아주 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잠 깨어 눈만 뜨면, 생계 걱정을 하게 되는 시대여서, 이 주님의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결코 가볍게 받기가 어려웠다. 전적인 믿음의 차원에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1) 주님이 보신 이방인(비신자-세상 사람)의 의식주에 대한 대응 태도는 ‘염려하는 일’이었다(25절). 그들의 일상을 염려와 걱정으로 지배하는 일이 바로 의식주 문제였다. 마치 인간이 의식주에 매달려 살다가 가야 할 존재인 양 늘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게 창주의 주(主)이자 인간까지 만드신 예수에게는(요1:3 참조)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셨다. 그것은 창조주의 본뜻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짐승 수준이 아닌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져 이 세상에 온 인간이, 어찌 자고 나면 의식주 문제에 올인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단 말인가!


2) 그들에게는 자기 존재에 대한 시각(視覺) 교정(矯正)이 절대 필요했다. 의식주 문제는 염려해서 해결될 차원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었다(25절). 생존의 문제는 생명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했다. 공중의 새들, 들의 백합화들, 들풀과 들꽃들 모두도 창조주의 따뜻한 배려로 자신들의 가치와 존재를 뽐내고 생존하며 살다가 감을 직시해야 했다(26-30절). 결국 과제는 염려가 아니고 믿음의 부족이었다(30절). 무슨 믿음인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이런 우리에게 의식주 문제가 해결 받아야 할 것임을 이미 잘 알고 계신다는 점을 신뢰하는 일이다(32절). 


3)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주의 제자들)의 의식주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염려가 답이 아니다. 이미 아버지는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시고 다양한 모습으로 공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제자들은 자신의 필요에 앞서서 먼저 구할 것이 있다.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his Kingdom)와 그의 의(his righteousness)가 이 세상에 실현되도록 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 자에게 내려주시는 이 모든 것(자신의 필요한 것)을 받아서 살아가면 된다(33절). 


4) 이것이 예수께서 제시해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며 살아야 할 확실한 질서(秩序)다. <나는 하늘 아버지의 것을 먼저 구하고, 아버지는 내 것을 책임져 주신다>. 물론 이 질서의 성립과 확인은 우리의 전적인 믿음과 복종을 통하여 확인되고 체험된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면서 자신의 것은 자신이 책임지고 해결하겠다는 자기중심의 마음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접근을 차단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런 자에게는 어쩔 수 없으시지 않겠는가!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큰 것 속에 나의 작은 것도 들어 있음과, 영적인 것 해결책에 육체의 것도 담겨 있다는 포괄적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다. 


3. 서신서 / 엡 6:10-20 / ”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 


본문은 교회의 사도인 사도 바울이 험하고 거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 후 주께서 예비하신 그 영광의 나라를 상속할 성도들이 영적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할 길잡이이다. 여기에는 의식주 차원을 포함하여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우리를 대적해 오는 악한 영들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대응책도 담았다. 핵심은 바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전신 갑주(甲冑)를 취하여 입고 사는 것’이다(11,13절 참조)! 이는 우리가 지금 영적 전쟁(戰爭)터에서 살고 있음을 직시해야만 받을 수 있는 내용이다. 안일(安逸)한 삶의 자세를 버려야 복음이 되는 말이다. 


1) 먼저 왜 우리가 주의 강한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해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우리 삶의 환경을 이미 장악한 마귀 세력이 너무도 간계(奸計)하게 하나님의 백성의 영역들을 쉼없이 흔들어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10-11절). 


2) 그에 대한 우리의 씨름할 대상은 보이는 세력들이 아니라, 윗 권세들과 통치자들 그리고 주관자들과 공중 권세를 쥔 악의 영들이다(12절). 지금 우리나라의 사이비 권력과 거짓된 정권의 흐름을 생각하면 된다. 표면상으로 민생문제가 큰 화두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악한 거짓 영들과 우상 종교가 득세하는 불의한 세력과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과 같다. 귄력자 자신은 허수아비 수준이다. 이것이 거짓 영과 우상에 대한 공세에 집중해야할 이유다. 이에 사도는 전신 갑주를 취하여 장착할 것을 요구한다(13-18절). 그게 무언가? 


3) 먼저는 호신용 자기 보호(保護)장구가 필요하다(14-16절). 진리(眞理)와 의(義)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14절). 이는 자기부터 떳떳한 몸과 영혼의 소유자여야 된다는 말이다. 불의에 처한 자는 싸울 힘이 없기 때문이다. 평안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15절). 누구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을 위한 복음임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며, 구원의 확신 위에서 나와야만 한다(16절). 


4) 다음은 공격(攻擊)용 장구도 필요하다(17절). 방어용 무기만으로는 승리하지 못하잖은가? 성령의 검(劍)이요 공격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다윗의 물맷돌 5개의 역할을 수행할 말씀이다. 주의 말씀을 대적할 사탄의 무기는 있을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마4:4,6,7참조). 이 무기들은 평소 말씀 공부와 훈련과 암송과 묵상과 성령의 도움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여기에 바울은 항상 깨어 기도하는 일을 추가한다. 동료 신앙인들을 위한 중보기도 연대를 추가한다(18절). 강력하고 꾸준한 기도는 방어용도 되지만, 공격용에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5) 사도는 자기와 같은 복음 전파의 최전선에 출정한 선교인들을 위한 기도 지원도 요구한다. (19-20절). 그들은 후방의 남은 자들을 대신하여 최전방에서 적군과 맞서서 싸우는 전사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련도 많고, 목숨도 잃게 되며, 상처도 클 것이다. 그러기에 후방의 성도의 기도 후원과 물질 성원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함께 승리하도록 서로 하나 돼야 한다. 


o 교회연합주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머리요 대장으로 둔 지체들이다. 지체들은 자기 뜻과 고집은 버려야 하고, 오직 대장의 뜻에 따라 지체 간의 서로 연합을 잘해야 한다. 그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사랑하고, 축복하여야 한다. 오직 성령의 전신 갑주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서 마귀의 간계한 이간질을 막아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기뻐하시는 세계와 교회와 가정이 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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