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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도시,농어촌선교주일

관리자 2024-05-21 (화) 23:18 2개월전 277  

본문) 고전 9:13~18, 사 52:7-10, 눅 10:1-16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이다. 성령의 강림이 왜 중요한가? 성령이 오심으로, 그때부터 이 세상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방언(불의 언어=tongues of fire-NIV)이라는 하늘의 언어와 세상을 묶어내는 땅의 언어를 함께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그동안 노아 홍수재앙 이래 바벨탑 쌓기로 인류가 교만하게 되어, 그 저주로서 언어(말)의 혼잡으로 종족들이 서로 흩어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왔던 관계에 대변화가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창11:9참조). 


무엇보다도 하늘(하나님)과 땅(인간)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고, 멀리만 지냈던 나라들과 이웃들이 서로 소통(疏通)하기 시작하면서 교제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무리가 형성한 교회들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모든 만물과 인간의 아버지로 고백하며 섬기면서, 세상 만민들이 하나 되어 주를 경배하고 찬양하게 된 일이 큰 동인(動因)이 되었다. 이는 ‘불의 언어’, 곧 하나님의 성령의 언어‘의 역사의 산물이었다.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일은 확실히 그 효과가 엄청나다. 마침 요즈음은 세계 유수의 인터넷(IT) 기업들이 인공지능인 A1를 개발하고 있고, 그것도 세계 각국의 언어를 즉시 통역하면서 상대방과 무한히 소통하게 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그 바람에 이제는 우리가 세계 어디에서도 언어의 장벽이 없이 여행하고 외국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참으로 편리한 시대가 열렸다. 실로 놀랍고 충격적인 시대란 아닐 수 없다. 


그중 소통 면에서만 본다면, 이제는 성령이 아니라 과학과 인간의 기술개발에 의하여 그 기능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인간의 과학적 능력과 수준이 또 다른 <제2의 바벨탑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인공지능 발달이 과연 인류의 삶과 미래에 어떤 영향과 발전을 안겨 줄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부정과 긍정의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를 예측한다면, 우리는 현 인공지능의 무한한 발전에 경탄만 하고 살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재앙이나 저주를 인류에게 안겨 줄 시대가 활짝 열렸다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왜 그런가? 인공지능을 개발한 인간의 탐욕과 야망과 정복욕이 이미 그 참변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통제할 윤리(倫理)의 장치도 없이 개발된 인간 기계들이기에, 이제 그것들은 전 인류를 지배하려거나 분열시킬 수 있는 능력을 행사할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은 기존의 핵무기보다도 더 위험하고, 지금의 온 지구촌이 경험하기 시작한 환경재앙과 기후 위기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때에 맞이한 성령 시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동시에 ’그 성령의 능력은 어떻게 드러내야 하나‘라는 궁금증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날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주신 언어의 내용과 방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언어는 단순히 인간들 사이의 소통만을 해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기능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생명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어 줄 사랑을 전하려는 구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하늘의 언어, 생명과 사랑의 언어를 주신 성령의 강림을 새삼 주목하며, 그 말씀을 받고자 뜨겁게 노력해야 하겠다. 


성령이 주신 말씀이 진정 온 세상이 받을만한 복음(福音)이었다면, 그렇다면 복음일 수 있는 말씀은 어떤 요소들을 갖추어야만 할까? 지난 주일에 받은 행2:1-13에 의하면, 복음은 일단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되어야 한다(행2:6-7). 복음은 진정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 것들을 폐하게 하시는 힘을 가진 것이어야 된다. 그래서 어느 육체도 자기 자랑을 못 하게 할 엄중한 무게를 가진 진리여야 한다(고전1:27-29). 


거기에다 모두가 들으면 복이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되며, 좋은 소식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안겨줄 내용이 되어야 복음의 실체가 드러난다(사52:7, 행2:11 참조). 그렇다. 진정한 복음에는 성령이 함께하시기에, 그 열매 역시 풍성하다. 본질이 기쁜 소식이기에, 그것을 전하려는 선교와 전도의 행위가 발생하며, 그것을 나누려는 나눔과 섬김의 행위가 따르고, 그 소식을 선포하고 배우려는 행위들이 잇따르게 된다. 곧 예수의 몸인 교회 공동체 운동까지 발생한다.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도시.농어촌 선교주일이다. 지금 우리는 1인당 0.6명 정도의 아이 생산력으로 인구절벽 시대에 접어들었고, 게다가 누적된 도시와 농어촌의 삶의 격차와 문화 수준은 위험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의료인들의 의과대학생 증원에 따른 반발의 배경도, 알고 보면 의료인들이 수입이 부족한 농어촌 기피하고 도시에로의 집중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 웬만한 농어촌들은 이미 모두 고령층 어르신들의 집 지키기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런 엄청난 공백을 그나마 막아주는 일은, 놀랍게도 해외에서 온 이주민들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이런 복잡한 사회적 현상에서 외롭게 시골 교회를 지키는 목회자와 그 가족을 돕는 일은 그래도 도시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동시에 그곳에 있는 해외 이주민(移住民)들을 교회가 품어서 선교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도 깊이 관심해야 할 과제이다. 그들 숫자는 이미 수백만 명에 이르지 아니한가! 우리는 그곳에서 또 다른 룻(Ruth)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도시와 농어촌교회가 공존 공생할 것인가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그 길을 찾아보겠다. 


1. 서신서 / ”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이로다 “


성령의 사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며 온 세계를 향할 때 놀라운 선교의 열매들도 많았지만, 그러나 뜻밖에도 매우 회의적인 의심의 눈초리로 바울 사역을 지켜보며 비판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바울의 전도와 선교로 인하여 세워진 교회와 그 안에 모인 이들로 인하여 거두어진 헌금들에 대한 의심이었다.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그들은 바울이 자신의 생계와 수입을 위해 그토록 선교에 열중하는 것 아니냐는 논지로 공세를 가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 점을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공세에 자신의 방어적 입장을 매우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그 공세를 차단(遮斷)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자칫 그 대응이 애매하거나 소극적이면, 바울의 선교사역은 일대 타격을 당하고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바울이 대응한 논리에는 배울 것이 많다. 이곳에는 선교에 관련된 영역과 선교사가 취할 자세에 대한 적잖이 소중한 정보와 입장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바울은 목회자나 선교사나 성전 봉사자들이 그곳에서 나오는 급료와 생활비로 자신의 생계(生計)를 해결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함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 점에서는 예수께서도 앞서 그 점을 확실히 공인해 주신 일이었기 때문이다(13-15절, 눅19:7참조). 이 점은 오늘날의 모든 교회들이 전임 목회자와 교역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지원하는 성서적 근거도 되었다. 


2) 하지만 바울은 자신은 그런 공식적인 방식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 대신 그는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선교방식을 취했다. 곧 <자비량(自備糧) 선교>이다. 이는 생활비 문제는 처음부터 완전히 선교사가 자신의 독자적인 취업행위를 유지하면서 선교하는 방식이다. 그 일을 위하여 그는 처음부터 텐트 제작 기술로 소득을 얻어 생활비와 함께 구제비까지 해결했다(이 일로써 자비량 선교란 표현으로 <Tent-Maker>란 용어가 등장했다). 귀한 목적 때문이었다. ’생계를 목적으로 한 선교를 한다‘는 주변의 오해를 불식하고, 선교의 효능을 극대화하고자 함이었다. 오늘날에도 해외에 파송된 평신도 선교사들에는 이렇게 자비량 선교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다. 


3)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복음 전파의 사명(使命)에 관련된 뜨거운 신앙고백을 한다(16-18절). 첫째 자신의 복음전파는 결코 자랑거리용이 아니라. 부득불 할 일이기에 하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복음을 전파를 하지 않는 일은 곧 자신에게는 화와 저주가 된다고 판단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16절). 그러기에 바울에게 선교와 복음 전파는 자신의 생존 수단이요 이유였다. 호흡이며 보람이요 가치였다. 살기 위한 적극적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전시용일 수는 더더욱 없었다! 


4) 자신의 선교에 대한 입장이 그러하기에, 외부의 보상이나 하늘의 상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일 뿐 그 어떤 옵션이나 조건일 수가 없었다(18절). 그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은 그저 그리스도의 사명자(종)임을 천명한다. 무슨 사명인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면서, 하나님과 세상 모든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和睦)하라‘고 전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하였다(고후5:17-18참조). 사명 감당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살고 있는 주의 종임을 고백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이 된 고백이다. 


2. 구약 / 사52:7-10 / ”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판을 나타내셨으므로 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 


이 말씀 내용은 매우 묘하게 관심을 끌게 한다(10절). 땅끝에서 발생한 일들이 내 시선에 들어와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즈음처럼 인터넷 시대에선 우주의 일들도 우리 시야에 금방 들어오지만, 이사야 시대와 같은 옛적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일은 정말 경이로운 증언이다. 그런데도 그게 가능한 것은 그 일이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일 경우이다. 아무리 멀리에서 발생한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특히 우리 인간에게 구원과 기쁨을 안겨줄 일이라면, 그것은 감출 수 없이 금방 알게 된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옛적 지구촌의 한구석에 불과한 이스라엘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들이 지난 2천년 전에 온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알려지고 전달되어서, 그 소식에 희망을 걸고 기뻐하며 전 생애를 그 복음에 헌신하며 살아가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에 바로 오늘의 우리들도 있다. 그만큼 기쁜 소식인 복음은 그 파급력과 전파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1) 본 이사야서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의 슬픈 역사를 마감하고 이제는 본국으로 귀향하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령(傳令)사를 통하여 본국의 사람들, 특히 오랜 세월 낙심과 절망 속에 살아왔던 예루살렘과 온 유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사40:9-11, 겔43:19참조). 실로 이스라엘에 출애굽 이래로, 이 정도의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것도 그 강한 제국과의 전쟁이나 마찰도 없이, 오직 평화롭게 귀환이 실현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하나님의 큰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2) 그러기에 선지자는 그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전령사로부터 듣고, 앞서서 자기 백성에게 외치며 전하는 파수꾼들을 자랑스러워한다(7~8절). ‘좋은 소식‘, ’평화의 복된 좋은 소식‘, ’구원을 공포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우냐’고 외쳤다. 특히 선지자는 이 놀라운 일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친히 이끌고 시온에로 돌아오시는 일이고, 여호와께서 범죄 했던 이스라엘인 자기들을 용서하시고 위로하신 일이며, 구속(救贖)까지 하신 일이었기에, 백성들을 더욱 더 기쁨으로 소리 내어 함께 노래하자고 외쳤다. 


3)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교까지 말한다. 곧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의 유대인에 대한 자유로운 귀환과 해방을 허락 사건은 그동안 같은 처지에 있었던 또 다른 수많은 주변의 식민지 백성들의 눈에는 전적으로 자기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특별한 편애(偏愛)요 구원의 행위로 보게 하시는 사안이었다는 것이다(18절). 이 일로 여호와는 자기의 택한 백성은 완벽히 보호하시고 지켜내시는 분명한 신(神)임을 온 세상 만민들에게 생생히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그 일은 많은 민족이 자기의 거짓된 우상들을 버리고, 자기들도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었다. 


3. 복음서 / 눅10:1-16 / ”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


하나님의 선교는 아들 예수의 선교로 이어졌고, 제자들과 교회의 선교로 이어졌다.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선교 훈련을 시키신 내용을 전한 곳이다(1-3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군가? 너무 크고 놀라운 세상, 거룩하고 깨끗한 세상, 건강하고 살아 숨쉬게 하는 세상,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이기에, 그곳에 들어선 자들은 못 들어온 자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그들도 모두 이 복된 세상에 들어오도록 안내하는 봉사자의 삶을 요구받고 있다. 


1) 택함 받은 칠십 인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의 수를 상징한다(1절, 창10장). 둘씩 보내시는 까닭은 서로의 도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증거의 신빙성도 보유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개적인 기도는 이렇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2절). 주인이신 하나님에게는 추수터가 문제가 아니라, 일꾼이 부족한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 파송자 주님의 마음이 드러났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3절). 선교자를 향한 우려와 기대가 함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승리에 대한 양들의 믿음이다. 그 근거는 파송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선교사로 나아가는 자와 함께 하셔서, 함께 되도록 돌보시고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마28:20 참조). 그렇다. 이리와의 싸움이 없이는 승리도 열매도 없다. 


3) 기별꾼들에 대한 배척은 반드시 응징이 따른다는 내용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10-12절). 

기별꾼의 권리와 권위는 주님이 보장해 주신다(16절). 오만한 기득권자는 무지한 불신자들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요나의 선교 외침에 회개했던 니느웨도 기억하며 살자. 


o 성령으로 선교인의 영성을 품은 자들에게 세계는 좁다. 어디든 누구에게든 어느 때이든 복음이 있고 보혜사가 있으며 일터가 있기에, 그는 두려움이 없이 그곳에 가야 한다. 특히 양극화의 현장 한 가운데는 우리의 진정한 선교의 터전이다. 우리는 화목과 평화의 전사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곳에 함께 하신다. 특히 농어촌 선교 동역자들이 힘과 응원을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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