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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2-13 (화) 19:39 2개월전 218  

본문) 눅 9:51~62, 욜 2:12-17, 딤후 2:11-13


2024년에 접어든 사순절(四旬節) 첫째 주일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의 완성을 위하여 마지막 행진에 오르신 매우 엄중한 시간대이다. 이때 우리는 여섯 주간에 걸친 40일간의 순례길에 오르신 예수님을 뵙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말씀만이 아니라, 취하신 행동 하나하나, 만나신 대상들, 바라보시던 시선들, 그리고 가슴에서 쏟아내시는 증언들 모두를 새롭게 우리 속에 채우면서, 우리의 무너진 삶을 새롭게 회복하고자 그의 뒤를 따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2024년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대적인 예수의 구원이 필요한 때이다. 그것은 지난 2년 가까이 나라를 집권해 온 세력들이 우리나라를 온통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상식적인 세상으로 이끌어와서, 나라의 기반이 급속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옛날 북왕국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신앙을 버리고 우상인 바알 신에 사로잡혀 통치했던 아합과 이세벨 부부의 현신(現身)이란 느낌이 들게 한다. 


이는 시대의 무속인(巫俗人)인 천궁의 제자들인 대통령 부부의 지휘 아래(최재영-김종대 대화록 참조), 청와대를 용산으로 이전한 일로부터, 친일(親日)과 종미(從美)정권의 탄생과 북한과의 최악의 대립각을 세우면서 언제든지 전쟁을 불사하려는 듯한 황당한 모습과, 외교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거침없는 무시 전략을 통한 경제 구조 붕괴, 내부적으로는 검찰 독재정권 수립으로 인한 정적 제거와 언론 장악, 부자 중심의 경제구도 확립으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 현상 등등-, 실로 헤아릴 수 없는 헷갈리는 나라 운용 및 국민 대결 구도의 심화 현상들이 갈수록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자고 일어나 보니 후진국’이요 부끄러운 나라가 된 상황이다. 온 세계가 대한민국의 이러한 급격한 변신에 의아해할 정도이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4월 10일(수)에 있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맞이한다. 이날은 이런 거짓 세력의 횡포와 왜곡 상황을 중단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다. 물론 깨어 있는 국민의 모습을 되찾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 기회를 살리려면, 먼저는 하나님을 향한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겠고, 국민과 교회들의 깨어 있음도 잇따라야 한다. 거짓 세력들의 완강한 저항도 더욱 격렬할 것이기에, 우리의 대응 역시 치밀해야만 한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교회는 사순절을 맞이한다. 무너져 내리는 대한민국의 회생을 위하여 십자가 한복판을 겨냥해 오실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그의 길과 말씀이 결국 우리의 역사와 생명을 되살려 주실 것이다. 오늘은 그 첫 주일이다. 주님의 첫 걸음걸이가 어느 곳, 어떤 사람들에게로 향하시는지를 살펴봄이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그런 주님을 따르려는 우리들의 마음가짐도 비장(悲壯)해야 한다. 


오늘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시는 예수님의 첫걸음은 어디인가? 바로 사마리아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족속이요 땅이었던 사마리아가 예수님이 방문하고자 하신 첫 장소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마리아 선택은 결코 관광(觀光)이 목적일 리가 없었다. 그곳은 북 왕국이 B.C722 앗수르 제국에게 패망한 이래(왕하17:7-이하), 예수 당시까지도 줄곧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그곳과의 접촉을 피하고 외면하며 지내던 일종의 버림당한 영역이었다. 그러기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왕래는커녕 불통 및 차단된 관계이었는데, 바로 그런 곳을 예수께서 그의 첫 방문지로 삼으신 것이다. 


이 사마리아는 본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었으나, 앗수르 제국의 잔인한 혼혈(混血)정책에 의하여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기게 되는 바람에, 제 3지대의 사람들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매우 가슴 아픈 무리들이었다. 그러기에 예수의 방문 목적은 철저히 선교(宣敎)였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메시아 예수만이 펼치실 하나님 선교의 요지(要地)였다. 


대체 어떤 마음 때문이셨을까? 앞에서 우리는 예수의 선교가 빼앗긴 것을 되찾게 해주는 희년(禧年) 선교였고,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선교였으며, 모퉁이 머릿돌 선교임을 확인한 바 있는데(눅4:16-30참조), 여기 사마리아가 예수님에게는 완전히 버린 대상이 아니라, 되찾고 회복되어야 할 희년 선교와 잃은 자 선교의 일차적인 대상이었다. 당시의 백성들이 외면하였다고 해서 당신도 함께 외면할 대상이 아니라, 그러기에 더욱 찾아서 품고 살아야만 할 대상이었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미쁘심을 그토록 찬양한다(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니라’ 이는 무슨 말인가? 삼위일체 주님은 이랬다저랬다 하며 흔들리는 인간과는 아주 다르게, 한번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시고 한번 결정하시면 상대와는 상관없이 일관되게 밀어주시는 분이라는 고백이다. 그 점에서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믿음의 대상이 되셨음을 선언한다. 사마리아인도 바로 그 대상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마지막 여정에서, 사마리아인들을 만나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시고, 놀라운 희년의 은혜도 베풀고 싶어 하셨다. 특히 당신의 선교를 계승하게 될 제자들을 위해서도 이 사마리아 선교 행보는 매우 중요했다. 예수의 선교는 늘 찾아다니는 곳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기피 하는 어둠의 땅까지도 끌어안는 선교임을 보여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한번 실패했어도, 다시 기회를 주어서 돌이키게 하는 선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세계가 하나님 구원의 빛으로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만 했다. 


1. 복음서 / 눅 9:51-62 / “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 


문제는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사마리아가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곧 예수의 부름에 그들이 어떻게 응답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결과는 통과 거부(拒否)였다. 그 바람에 그들은 예수를 통해 주실 하늘의 절호의 축복과 은혜를 외면하고 만 것이다. 그 까닭은 예수 자체에 대한 거부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땅을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53절). 실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서로에 대한 상한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참으로 아픔이었고 유감이었다. 예수께서도 그런 점을 모르실 리가 없었으리라 추측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시도 자체를 밀고 가셨던 이유는 있었다고 보인다. 비록 저지당했더라도, 사마리아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행렬은 항상 계속되어야 하고, 그래서 그들과 유대인들 모두는 서로 적개심과 미움을 포기하고, 그 대신 서로 용납하고 더불어 소통하며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주님은 추후 승천(昇天)하실 때에도 유훈으로 사마리아 선교를 제자들에게 명령하셨고(행1:8), 제자들과 교회는 실제로 사마리아 선교에 참여하여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였다(행8:4-25 참조). 


1) 이 과정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일도 있었다. 바로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의 통과 요청을 거부한 일을 두고, 마음에 어이없어하면서 스승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절)라는 특별 요청을 한 것이다. 이는 옛날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 정상에서 특별한 기도로 그곳에 놓인 제물을 하늘의 불을 끌어들여서 태웠던 사례를 기억하며(왕하1:10,12 참조), 그런 불로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는 저 사마리아를 혼내주면 어떠하겠느냐’고 의사를 물었던 것이다. 


2) 그러자 그런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응은 마치 마귀를 질책하듯 제자들을 꾸짖으셨다(55절, 9:42 참조). 다른 사본에서는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人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는 말씀이 추가되었다. 그렇다. 주님의 이런 질책은 그의 지배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님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만일 주께서 당신의 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자들을 계속 혼내신다면, 그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겠는가? 


3)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를 자들이 진정 어떤 자들인지를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주셨다(57-62절 참조). 이는 당신을 거부한 사마리아인의 경우 이외에도 숱하게 적합하지 못한 사례들이 많이 있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동시에 당신과의 동행하는 일은 그 어떠한 경우보다도 최(最)우선적인 위치에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만 되는 것임을 밝히셨다. 


4) 우선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은 마음을 이 세상 어디에도 두고 살지 아니함을 밝히셨다(57-58절). 따라서 주님은 ‘손에 쟁가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따를 자들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다 맞추어야 함을 알리셨다(59-62절). 그만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아 나선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급박하고 우선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부모의 장례식 참석이나, 자기 가족들과의 작별 인사 행위들은 매우 부수적인 일에 불과할 뿐이다. 


2. 구약 / 욜 2:12-17 / “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仁愛)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냐니 ”


본문은 여호와를 떠난 무리들, 특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서 돌아올 것을 촉구하시면서, 돌아오되 어떤 자세와 마음을 가지고 돌아올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신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앞서서 언급된 사마리아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보인다. 동시에 숱하게 많은 여호와의 떠나간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호소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모습을 확인한다. 정작 매달릴 자(인간)는 뻐기고, 가진 자(하나님)는 더 갈급해하는 모습 때문이다. 이게 하나님과 인간의 확연한 차이이다. 인간들의 한없는 변덕과 변질에 휘둘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오뚜기같이 구원자인 당신의 길과 자리를 굳게 지키고 계심을 확실히 보여주신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 방황하는 인간들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본향’이 있고, ‘그 열린 품’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압도적이며 절대적인 은총(恩寵)인가!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바울의 ‘미쁘신 하나님’ 찬양이 더욱 돋보인다(딤후2:13)! 하나님은 우리들의 대응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돌아올 인간들 맞이를 위하여, 마치 탕자의 이유에서 나타난 아버지처럼, 항상 열린 마음으로 모든 채비를 갖추고 집 나갔던 아들의 돌아올 그날을 생각하며 24시간 대비하고 있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눅15:20, 22-24, 31-32참조). 


우리가 더욱 주목할 내용은, 돌아온 자를 위해서 대비하신 모습이다. 그게 무엇인가? 회초리와 채찍인가, 아니면 잔치상과 좋은 대우인가? 인간의 행위로만 따진다면, 당연히 징벌과 채찍이어야 한다. 하지만 하늘 아버지에게는 그런 일은 전혀 없다. 마치 죽었다 살아온 자식 맞이처럼, 돌아온 자를 최선을 다하여 선대하고 우대만 해주신다. 잔칫상을 마련하여 이웃들과 기쁨을 함께 나눈다. 이 얼마나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우대(優待)인가! 


바로 이런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요엘 선지자는 여호와를 떠나간 자들 모두를 향하여, 뜨겁게 외친다. “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12-14절). 여기에서는 형식이 아닌 마음(heart)을 다한 회개와 돌이킴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겉치레의 회개가 아닌 진정성 있는 회개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새 출발의 절대 조건이다! 거만이나 흥정은 안 된다. 마음을 다한 후에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겸손히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품성을 이렇게 요약해 전한다. ’그는 은혜(恩惠)로우시며 자비(慈悲)로우시며 노(怒)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仁愛)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냐니‘(13절,하). 이 점 역시 미쁘신 여호와의 분명한 품격이다. 왜 우리가 주저 없이 믿음으로 여호와께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이유이다. 


요엘은 말씀의 후반부에서 돌아와야 할 시급(時急)성과 간구(懇求)해야 할 내용들에 대하여서도 언급한다(15-17절). 시온에서의 소집(召集) 나팔을 불어야 하고,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여 성회를 시급히 소집해야 한다. 이 소집에 응할 대상은 백성들이되, 지도자들과 젖먹이를 포함한 어린이들과 심지어 갓 결혼한 신혼(新婚)부부까지도 소집에 응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을 모아서, 제사장의 인도로 함께 울부짖어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을 욕되게 하여 나라들로 우리를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며 부르짖어야 한다. 이 간구의 내용은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상통하기에, 울부짖어야 할 우리 외침의 내용들이다! 


3. 서신서 / 딤후 2:11-13 / ”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 


이 본문은 바울 사도의 고난 신학의 요약으로도 알려져 있다(고후4:11 참조). 우리의 운명은 결국 주를 향한 우리의 믿음과 충성에 달려 있다. 인간은 신의를 저버릴지라도, 그리스도는 절대 다르다. 자기 약속에 전적으로 신실하시다. 우리는 주를 부인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부인하시는 일은 없다. 그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확고한 이유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는 당신의 복음이 실패하게 하거나 패배당하게 하시는 법이 없다. 그리스도는 의심 없이 그를 믿고 돌아온 자들에게 영원한 피난처이며 구원자이시다. 


o 사순절 첫째 주일이다. 우리의 믿음의 현재를 점검해야 할 때이다. 형식적인지 마음을 다한 믿음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저 사마리아인들처럼, 지엽적인 문제로 예수와의 만남을 못 갖게 되는 자리에 들어가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나의 믿음과 시선은 오직 예수와 그를 쫓는 일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머뭇거리는 위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예수와 내 마음이 일치되도록 신뢰와 사랑의 걸음걸이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그의 미쁘심에 깊이 빠져들어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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