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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해외선교주일 & 설주일

관리자 2024-01-30 (화) 17:31 10개월전 761  

본문) 눅 4:16~30, 사61:1-9, 행 4:5-12 


주현절 다섯째 주일이다. 2월의 첫 주일이기도 하다. 나라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어지럽고 힘들다. 상대에 대한 공격이 너무 거칠고, 치킨 게임(단두대 매치)처럼 너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투의 인식이 아주 강하게 깔려있다. 이런 흐름에서 학교 폭력이 계속되고 있고, 가정 폭력이나 정치 폭력도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은 남북간의 진영과 이념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각박하게 되었는가? 


누가 양보하거나 피하는 일은 마치 겁쟁이가 된 것처럼 간주해서, 아예 죽기살기에 매달린다. 이런 싸움으로 누가 살아남을 것인지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모한 자존심 대결이 쌍방 모두를 망하게 할 판이다. 이것도 국가 사이의 대결 양상이 되다 보니,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꼼짝없이 앉아서 피해를 당할 처지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겸손이 힘든 시대이다. 양보와 배려와 섬김이 설 자리를 잃은 상황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이런 때 교회가 할 일을 찾아본다. 특히 우리가 구세주로 믿는 예수를 어떤 분으로 전하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된다. 도대체 세상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께서는 십자가(十字架)로 그 자리에 오르셨는데, 지금의 우리는 왜 그런 십자가의 정신과 그 섬김과 희생의 도리를 외면하고 사는 것일까? 그 바람에 예수 사람을 생산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예수를 물질과 힘의 메시아로 각색(脚色)시켰다. 예수와 기독교회의 색깔을 청색이 아니라 회색으로 분탕질을 하고 말았다. 


실로 큰 죄악이다! 물질의 풍요와 세상 명예의 달성과 인간 욕망의 성취가 신앙의 열매인 양 열심히 전파해 온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께서 광야 시험에서 물리치신 그 마귀 시험들을 한국교회가 구원의 도리인 것처럼 재(再)상품화시킨 결과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그 마귀 시험들을 극복하셔서 세상에 제대로 된 구원의 도리를 세워 주셨는데, 그의 제자들인 교회들은 마귀의 유혹에 다시 매달리는 바람에, 결국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 신자들이 되고 말았다.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 된 것이다(계3:1 참조). 


이런 중에 오늘 우리는 고유 명절인 설 주일과 함께 총회가 제정한 해외 선교주일을 맞는다. 모처럼 맞이하는 년 초의 설 명절에 온 가족들이 함께 모여 풍성한 교제와 사랑을 나누며 한 해를 이겨낼 새 힘을 충전 받게 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이 시간에도 해외 온 선교 전선에서 주님의 파송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계신 모든 선교 동역자들에게도 남다른 하나님의 위로와 강건함으로 채워주심이 있기를 기도드린다. 


오늘은 마침 세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해외 선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매우 적합한 메시지를 주신다. 큰 틀에서 보면, 해외 선교는 그 선교의 내용이 예수님이 지향하신 희년(禧年) 선교여야 하고, 동시에 모퉁이 머릿돌 선교여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 정신적 영적 틀에서 벗어나면, 해외 선교의 열매는 기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 관심하는 모든 이들은 오늘 주신 말씀의 메시지에게 큰 행위의 지침을 받아서 좇아 살아야 한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 회당을 방문하시면서, 당신의 선교가 본질적으로 희년(禧年) 선교임을 명확히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인생의 기쁨과 보람과 가치를 빼앗긴 채 살고 있는 모든 연약한 자들을 가슴에 품으시면서, 그들에게도 인간답게 살아갈 기회를 주시고자 고쳐 주셨다. 그들은 맹인, 못 걷는 자, 나병환자, 못 듣는 자, 죽은 자, 가난한 자 등의 사회적 약자들이었다(마11:4-6). 이사야는 그 희년 선교의 주요 대상들로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 빼앗긴 자, 슬퍼하는 자들로 포괄적으로 지목하기도 했다(사61:1-3). 


이런 희년 선교의 물결은 예수의 오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의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심으로 더욱 강력하게 확산되었다. 이때의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유대인들의 혈통 상의 영역을 훌쩍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님의 희년 복음이 온 세상에서 죄악과 각종 장애로 그늘진 삶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도 전달이 되도록 확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예수는 모퉁잇돌로 전해지게 된다. 온 세상이 그 안에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1. 복음서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은 예수께서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당신의 사역이 전적으로 이사야가 예언했던 바대로 희년(禧年)인 은혜(恩惠)의 해를 이루는 데 목적을 두고 전개되고 있음을 밝히신 내용이다. 이 희년의 복음이 바로 당신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도 밝히셨다. 


하지만 문제도 발생했다. 회중 중에는 ‘예수가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런 예수를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고향 사람으로 격하시키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폐쇄성과 질투와 불신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런 움직임은 예수의 그곳에서의 희년 사역이 더 이상 진척될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고향 사람들의 그런 불신적 대응에 아픔을 느끼신 예수께서는 두 가지로 대응하셨다. 


하나는 구약시대에 이방인이면서도 탁월한 믿음으로 칭찬받았던 인물들을 거론하신 일이다. 두 사람이었는데, 하나는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의 믿음(왕상17장)이었고, 또 하나는 엘리사 시대의 수리아 장군이자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의 믿음이었다(왕하5장). 이들은 모두 이방인이면서도, 그들의 확실한 믿음 때문에,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 결국 주님은 이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하여,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함을 전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유대인이라 신분에서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임을 입증하라고 요구하셨다. 즉 믿음을 신분 뒤에 감추지 말고, 자신이 믿음의 사람임부터 먼저 나타내라고 요구하셨다.


그러자 모욕감을 느낀 나사렛 고향 사람들이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동네 밖 언덕의 낭떠러지로 예수를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란을 뚫고 그곳을 떠나신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그 후에, 모든 선교자의 행동 지침의 틀이 된다. 곧 복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이방인에게로 간다는 지시처럼 된 것이다. 초대 선교사들은 예수의 이 본을 따라, 언제나 맨 먼저 그 지역의 유대교 회당 공동체를 찾아갔고, 그들이 그곳에서 거부되면 이방인에게로 간 것이었다(행13:46-47, 18:4-6, 19:8-9, 28:23-28 참조). 


1) 누가는 예수의 공적인 활동을 맨 앞에 둔다. 16절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기억을 일깨우고(1:26, 2:4, 39,51 참조), 예수를 그의 민족과 그 전통에 확고한 뿌리를 박고 있는 한 인간으로 소개한다. 예수 선교의 출발이 그의 유대인 동포들이었음도 밝혀준다(16절). 


2) 회당에서의 예수가 읽도록 받은 성서의 본문은 놀랍게도 이사야서61:1의 내용이었는데, 이점이 매우 놀라웠던 것은, 이 예언의 말씀이 말하는 바로 그분을 거기에 모인 청중들이 지금 자기들 눈앞에서 하나님 아들인 예수란 인물로 직접 대면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21절). 


3) 예수께서 읽으신 이사야 내용은 그의 지상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해, 곧 희년 사역이 될 것임을 입증할 구체적인 사료(史料)였다(17-19절). 사실 예수께서는 마귀가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들을 묶어놓고 괴롭혀 온 모든 포박(捕縛)들을 모두 풀어주고 제거하는 일에 전력하셨다. 종교란 이름으로 사람을 속박한 일들, 무지와 악법에 시달리는 일들, 잘못된 숙명론적 교리인 인과응보 사상으로 사람을 얽어매놓은 포승줄들, 가난과 질병의 굴레에서 비인간적 취급을 받아오게 한 사회적 통념들, 강자들의 숱한 협박과 죽임의 공포들, 그 모든 것을 제거하시는 일에 전념하셨다. 은혜의 희년이 주는 새로운 환희 속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영접하셨다. 


4) 이 은혜의 희년 사역의 절대 조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희년 생명의 역사가 예수로 인하여 왔고 시작되었음을 믿고, 그 예수를 영접하는 일이었다(요1:12, 3:14). 의심과 불신과 질투와 같은 배척의 마음으로는 절대 희년 세상은 맛볼 수 없었다. 인종이나 신분이나 성별이나 나약함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불신 때문에 배제되었다. 흘러 들어온 축복과 생명의 물줄기가 이방인과 타지로 흘러가게 하고 말았다. 


2. 예언서 / 사 61:1-9 / ”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즐거워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것들을 되찾는 희년의 보상(補償)을 베풀어 주실 때, 그 보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이다. 만일 그 내용이 없이, 그저 보상과 복원의 약속만 주어진 것이라면, 그 약속은 한갓 공염불(空念佛)이 될 수가 있었기에-, 분명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의 해가 왜 진정한 은혜의 해가 될 것인지를 미리 보고 흔들림 없이 기다리도록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1) 그 대상은 이렇다. 가난한 자들에게 들려 줄 반가운 소식들이다. 곧 마음이 상한 자에게 고침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겐 놓임이 제공된다(1절). 이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요 보복(報復)의 날이 될 것인데, 이 은혜를 입게 된 자들의 모습은 이렇다. 모든 슬픈 자가 위로받고, 축하의 화관(花冠)이 제공되며, 슬픔의 재(災)가 아닌 기쁨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찬송하게 되고 의의 옷을 입고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낼 자로 인정받게 된다(2-3절). 


2) 오래 황폐했던 곳은 복원(復元)되고, 무너졌던 곳이 재건(再建)되며, 대대로 무너져서 황폐한 곳은 중수(重修)된다(4절). 그때의 너희 양치기들은 외국인들이고,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맡게 될 것이다(5절). 그 대신 너희는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가 하나님의 봉사자(사역자)라고 칭함을 받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이 수고해서 제공한 재물을 먹고, 그들의 영광을 얻어 누리며 살게 된다(5-6절). 이는 너희가 과거의 수치와 능욕에 대한 보상을 배(倍)나 갑절로 받고 사는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며 살게 된다(7절). 아. 이 얼마나 놀라운 희년의 복인가-!!


3) 선지자는 이런 놀랍고 기이한 배상을 제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 어떤 신(神)인지를 소개함과 동시에, 그들 자손에게까지 부여될 영광에 대하여서도 힘주어 소개한다(8-9절). 

-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 이런 모습을 보면, 지금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결과로, 이 예언의 성취된 희년의 몫을 충분히 받아 누리며 살고 있다고 평가된다. 세계가 놀라는 나라와 융성과 발전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교회의 성장세는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만도 2-3백만 명이 넘칠 만큼, 성장한 우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매우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분에 넘치는 축복을 선용하며 정의롭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깊은 성찰과 회개가 요청된다. 


3. 서신서 / 행 4:5-12 / ”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으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救援)을 받을 수 없나니 “ 


이토록 예수와 그의 복음이 희년의 축복을 전하고, 인간의 삶 전체를 온전하고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모습으로 확인된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제 그 내용들을 온 세상 만민에게 힘써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유훈으로도 당부해 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행1:8). 실제로 제자들은 전 생애를 바쳐서 세계 선교 대장정에 나선 것이다. 


이런 중에 성령의 강한 역사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성전 입구에서 벌떡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의 사건까지 발생하자(7-10절), 온 예루살렘엔 예수께 돌아온 수많은 이들로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그 바람에 당시의 유대교 권력자이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들의 저항과 탄압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때 매우 주목된 대목은 사도 베드로가 이 예수를 ‘건축자에 의하여 버림을 당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지칭한 내용이다(11절, 시118:22참조).


이 머릿돌은 대체 무슨 돌인가? 시편 시인이 언급하고, 선지자들도 지적하다가, 나중에는 복음서의 기자들과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이 예수의 정체성을 소개할 때 말한 이 머릿돌은 대체 무슨 돌인가? 이는 아치나 둥근 천장을 지탱하도록 그 정수리 부분에 놓은 쐐깃돌(capstone)이다. 즉 이 돌은 서로 다른 양쪽을 온몸으로 받아주고 이어주면서 전체가 서로 하나로 연결되고 서로를 한 몸 되게 하는 핵심석(石)이다. 그러기에 이 돌을 빼내면 모든 것이 주저앉게 되지만, 이 돌이 자리하면 모두가 다 살아나게 되는 돌이다. 이런 연고로 저들은 십자가의 예수를 온 세상 만민의 구원을 위한 모퉁잇돌로 전한 것이다(11-12절,요일5:11-12). 


o 해외선교주일인 오늘의 말씀은 예수의 희년 선교에 우리의 관심을 더욱 집중하게 한다. 세상은 지금 마귀의 분열책에 노예가 된 무리들에 의하여 속절없이 갈라져 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찌르고 상처를 주면서 아파하며 산다. 치킨 게임의 승자가 되고자 안달이다. 그 결과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허망한 것인지에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싸움과 미움에 몰두한다. 이를 누가 깨우쳐 줄까? 그래도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셔서,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 되도록 묶어주신 예수의 머릿돌 영성을 품은 우리들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희년의 영과 희년 세상의 비전을 품고 그 싸움터로 들어가야 한다. 저 사도들처럼 거룩한 싸움꾼으로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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