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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1-23 (화) 22:19 3개월전 208  

본문)  마 11:2~15, 사 44:1-8, 행 5:27-42


주현절 넷째 주일이다. 벌써 2024 갑진년 첫 달이 지나고 있다. 모쪼록 주현절에 예수의 가족들에게 내리시는 은혜와 인도하심이 여러분에게 더욱 크고 풍성해지길 빈다. 세속의 어지러움이 강할수록, 우리의 믿음의 영성(靈性)은 더욱 깊고 강해져야 하겠다. 그게 망가지는 세상을 살리는 균형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특별한 관계에 들어선 이들에 대한 소중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상기(想起)시켜 주는 내용들로 보인다. 물론 모든 관계(關係)는 다 소중하고 귀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차이가 큰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관계라도 가족과 이웃과의 차이는 크다. 가족은 같은 조상 아래에서 피를 공유하면서 맺은 혈맹 차원의 관계라서, 어떤 특별한 어긋남이 없으면 본능적 사랑과 돌봄 관계를 평생 나누게 된다. 하지만 이웃은 아주 다르다. 강한 의지의 맹세나 서약이나 신앙과 같은 약속이 없으면, 그 관계는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소위 형편대로 나아가는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관계 차원에서 주목하고 눈여겨보아야 할 영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이자 조물자이신 하나님이 유별나게 애정을 갖고 대하시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범(凡)우주적이고 인류 전체를 포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에게는 마치 당신의 가족처럼 사랑하시고 어떻게 하든 끌어안고 가시려는 대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은 우리 모두가 함께 관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초(焦)관심 대상은 누군가? 두말할 것 없는 초관심 대상 1호가 있다. 바로 그의 유일한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럴 수밖에 없음은 그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창조 사역을 수행하신 분이시고, 동시에 그의 마음과 뜻을 이 세상 현장까지도 펼치시기 위하여 파송되어 오신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서의 아들은 그가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정도의 초관심적 사랑의 대상이셨다(요3:16참조). 


그러면 그다음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이 누구인가? 그리스도 이전엔 성부(聖父)이신 하나님이 직접 지명한 대상이 있었다. 바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아주 뜨거운 관심 대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요 보호자로 처신하셨는데, 그들의 다양한 반응 때문에 가슴도 아프셨고, 기뻐도 하셨다. 실로 애증(愛憎)을 나눈 무리들이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당신을 온 세상에 알릴 통로로서도, 그들 이스라엘을 당신의 증인(證人)으로 사용하셨다.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는, 하나님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아들을 돕기 위해 일하고 목숨과 생명을 다하여 충성한 자들이다. 예컨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이 파견하신 자와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들이었고, 당신의 주변에서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모든 이들이 그들이었다. 오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세례 요한을 향한 놀라운 칭찬과 평가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생생히 알려준 확실한 정보였다. 


그리고 당신의 성령(聖靈)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를 믿어서 구원을 얻으라’고 외치는 일에 헌신한 무리들을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들의 사역이 중단없이 잘되도록 최선을 다한 손길로 그들을 돌보시고 지켜 주셨다. 그래서 그의 교회와 복음이 온 세상에 편만하도록 이끌어주셨다. 


이런 존재들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거의 절대적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해와 행위에 대한 인식이 미흡해도 여전히 사랑하셨고(복음서),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거역하여 모진 시련과 아픔의 벌칙을 당하면서도 계속 사랑하셨으며(예언서), 그들이 예수와 복음 때문에 당국에 끌려가 환란과 고문을 당하며 생명의 위험에 빠졌어도 여전히 돕는 손길을 주셔서 그들을 살리시고 더욱 힘을 내게 하시는 조치를 베풀어 주셨다(서신서). 


이제 나를 성찰하자. 과연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 사랑을 받고 사는 존재인가?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더욱 강하고 진실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감으로써 우리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절대 신뢰를 받게 되고, 어떤 경우라도 돌보심을 받으며, 종국에는 영원한 나라에까지 영접받게 되는 대상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 누구든 완벽할 순 없다. 하지만 중심이 여호와께 붙잡혀 사는 자들임을 인정받게 된다면, 우리는 영생을 약속받는 자들이 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이 ‘여수론’으로 부름을 받은 것처럼(사44:2), 솔로몬이 ‘여디디야’(여호와의 사랑을 받은 자)가 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불변(不變)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게 하자. 


1. 복음서 / 마 11:2-15 /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


본문은 성자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어떤 인물로 보고 계신 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이다. 그것도 요한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각종 행태에 대하여 자기가 오랫동안 기대했던 메시아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나온 의구심과 갈등을 해소하고자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당신이 진정한 오실 이냐 아니면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느냐’를 묻고 확인한 일 직후에 나온 예수의 요한에 대한 평가였기에, 더 큰 놀라움을 준다.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요한의 이해의 미흡성에 대한 실망이나 책망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메시아에 대한 인식에서 챙겨야 할 부분을 소상히 보완하여 주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사람들이 (순교로 인하여 다시 못 보게 될) 요한을 어떤 인물로 평가해야 할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요한이 이 땅에서 수행해 온 노력에 대한 평가였고, 그를 인하여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황이었으며, 그가 누구인지를 밝혀주신 일이었다. 


1) 요한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확실히 알아보고 싶은 내용은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였다(2-3절). 요한의 이런 심각한 궁금증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요한이 품은 오실 메시아는 대체 어떤 메시아였는가? 세상의 죄악과 거짓과 불의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형의 메시아였다. 그런데 예수가 보여주고 계신 메시아의 모습은 그런 기대와는 달랐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하여지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이었다(5절). 


2) 예수의 이런 모습은 요한의 기대와는 분명 차이가 나는 행보였다. 야단치고 저주하며 혼내고 심판하여 세상을 선악으로 구별 짓는 메시아여야 했는데, 예수는 그런 유형의 역할보다는 망가진 삶을 살고 있던 모든 이들이, 먼저 고침받고 회복되어 새로운 기쁨과 감사의 삶을 누려며 살게 하는 일이 메시아로서 우선 해야 할 일로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심판은 그런 생활을 해 본 후에, 있어도 된다고 보신 것이다. 그런 인간답게 살아볼 기회마저 아예 없이 살던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못 살았냐‘고 따져 보는 일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보신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慈悲)가, 심판과 형벌의 힘보다 우선하는 순간이 열렸음을 확인해 주신 것이다. 예수로 복음의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3) 그리고 주님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을 남기심으로써, 요한도 이 부분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6절). 요한의 이러한 한계는 그의 사명의 몫이 선지자와 율법까지였다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13절). 


4) 대신 예수님은 요한의 사신이 떠나간 직후, 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내리셨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使者)로서, 당신 앞에서 당신의 오실 길을 준비하러 온 사자였다(10절). 실제로 그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옛 선지자인 엘리야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14절, 말3:1 참조). 그러면서 예수님은 요한이란 존재의 무게에 대한 평가도 이렇게 내리셨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11절). 하나님이 그가 보내신 종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셨는지를 매우 생생히 전한 입장이었다.


5) 주님은 그의 활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 지평(地平)도 크게 달라졌음도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절). 이는 무슨 말씀인가? 세례 요한의 선교의 주제는 ’회개와 임박한 천국‘이었다(마3:3참조). 그의 회개를 통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전국에 파장을 일으켰고, 숱한 이들이 찾아와서 물세례 받으면서 새 삶을 시작했으며, 그로 인하여 열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은 그 뒤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천국의 실제를 보여주시며 사역하기에 큰 도움이 됐다. 


2. 구약 / 사 44:1-8 / “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


본문은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의 새로운 관계 회복을 약속하셨던 내용이다. 그것은 예전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지난 70년의 오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통하여 사실상 망했다가, 이제는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회개와 반성을 통해서 거듭난 새 백성으로 새순(筍)처럼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새 역사를 시작하려 하셨다. 먼저 그들은 더 이상 남북으로 분열된 두 국민이 아니라 12지파로 된 하나의 유대인으로 출발한다. 그러기에 여호와는 그들을 격려하시며 당신의 영을 부어 주셔서, 새 생명 된 자손의 복을 선사하고자 하신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음성의 내용 자체가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완전히 새롭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부르신다. 그것도 그들을 하나 된 소중한 이름인 ’여수론‘으로 부르신다(1-2절, 신32:15, 33:5 참조).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자인 여호와‘이심을 밝히시면서, 아직도 위축해 있는 백성에게 마치 오랜 세월 잃어버렸던 자식을 되찾은 감격의 음성으로, 그들을 격려(激勵)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2) 그리고 그들의 삶의 부족을 채워주실 다양한 축복(祝福)의 약속도 전하신다(3-5절). 생존하기에 풍성한 물을 제공하시고, 당신의 복을 받은 자손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영적, 물적인 복들을 부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시냇가의 버들나무와 같게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자신은 하나님께 속한 존재요 이스라엘 사람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증언하고, 그 일로 인하여 세상으로부터 존귀히 여김도 받게 되리라고 예고하셨다.


3) 무엇보다도 여호와 당신은 그의 백성들의 왕이요 구원자로서, 세상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이끄시는 주이시다. 그런 점에서 이 여호와가 그들을 ’영원한 백성(ancient people)‘으로 세우신 이래(7절), 장차 올 일까지 그들에게 알리고자, 그 어떤 신들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인 ’외치고 알리며 설명해‘ 오셨다(6-7절). 실로 반석(盤石)이신 완벽하신 여호와이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결코 그 어떤 세상 권세들에게도 두려워 말아야 하고, 겁내지도 말아야 한다. 동시에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證人)임도 기억하고 당당히 대처해야만 한다(8절). 


3. 서신서 / 행 5:27-42 / “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


본문은 앞에서 소개된 세례 요한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아서 일하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얼마나 받으면서 복음을 위해 일하였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한 내용이다(29-32절 참조). 


1) 이들은 지금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다가 체포되어, 공회 앞에 끌려가 혹독한 집단 심문을 받는 중이다. 그들의 죄명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 무엇도 가르치지 말라’는 유대교 당국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온 예루살렘에 퍼지게 한 일이었다. 유대교 당국자들은 크게 염려하였다. 제자들의 말을 따르게 된 추종자들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자기들이 이제 피의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크게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27-28절). 


2) 하지만 베드로와 사도들은 아주 담대하였다. 자신들의 사역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저항하였다. 무슨 정당성이었나? 자기들이 지금 인간의 말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까닭은,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이스라엘의 회개와 사죄를 견인하고자 그를 세상 만민의 임금과 구주(救主)로 삼으셨음을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였고, 주의 성령까지도 그 일에 증인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었다(29-32절). 


3) 이 말에 더욱 격분한 공회원들은 아예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중에 유력한 율법교사요 모든 백성에게 존경도 받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을 앞세워서 지혜로운 대처를 주문받게 되면서, 그들의 흥분을 잠재우고 더는 그들의 일을 상관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채찍질만을 한 후에 석방 받게 하였다(33-39절 참조). 위기를 모면하게 된 것이다! 


4) 이에 석방된 이들은 자신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게 됨을 기뻐하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힘을 내어 성전에서든 집에서든,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초대교회 부흥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41-42절). 


o 우리의 믿음에는 신실성과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형식이나 관습적인 겉치레의 신앙은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내 지식이나 이해가 미흡한 것은 괜찮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의 공경과 사랑은 분명해야 한다. 내 믿음의 행보에 실수나 착오도 괜찮다. 수준이 낮아도 괜찮다. 그분의 은혜로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온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의 확실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고픈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게 간절하면 할수록 주님께서도 나와 언제나 함께하실 것이다. 믿음의 수준을 높이고 힘을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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