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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1-10 (수) 10:51 3개월전 221  

본문) 마 12:22~32, 겔37:15-23, 엡 2:11-22 


주현절 둘째 주일에 접어들었다. 지난 첫 주일에 우리는, 예수께서 당시 세상 권세를 장악했던 마귀가 준 각종 시험을 이겨내면서 취득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격증을 보유하신 일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예수께서 그때 취하신 그 자격자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따라서 이제부터 예수님에게는 남다른 강한 모습을 외부에 확실히 보여주신다. 그 모습은 무엇인가?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자의 새 면모(面貌)이다. 


강자의 새 면모, 그게 무엇인가? 예수가 보여줄 세상의 강자 모습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강자의 논리에 따른 우격다짐이나 이해타산으로 눈치 보면서 모두를 줄 세우게 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말 잘 듣는 사람들만 모아서, 자기편(自己便)을 만들어 그들만 사랑하고 혜택을 부여하는 식의 자기 과시용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보여주시려는 강자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이번 주현절에 우리는 예수께서 진정으로 강한 자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바로 그 모습들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될 것이다. 


우선 오늘 만나게 될 강자의 첫 모습은 서로 다른 자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모습이다. 곧 자기와 다른 자들을 내치고 물리치며 자기 앞에 무릎을 꿇려서 강압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식의 모습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까지도 포용해서 결국엔 하모니를 이루게 하는 조화와 조율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유형의 능력에서, 진정한 강자를 보게 되는 일이다. 어찌 보면, 이런 모습은 참 부모 밑에서 서로 다른 자녀들이 그 누구도 배제나 차별을 당하지 아니하고, 모두가 하나로 인정받고 존중되며, 서로 보완하여 하나 되어 사는 모습과 유사하다. 


이런 모습은 사실 가족 사이에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국가 단위에서 이루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놀랍고 엄청난 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정치가 필요하고 훌륭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救世主)로 시인하고 그를 통하여 서로 다른 온 세상과 만민이 자기를 양보하고 서로 하나 될 수 있게 된 까닭은, 예수 바로 그가 이런 불가능한 차원의 갈라진 세상을 하나로 묶어 평화를 이루려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극심한 분열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는 현 정부의 극우적인 정책들, 이념과 계층과 편견과 대립을 지향하는 극심한 갈라치기 정책이 초래한 면이 너무 크다. 그 바람에, 우리는 내부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아올랐고, 대북 관계도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으며, 국민경제 상황도 극심한 추락상태에 빠져들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살인적 테러 행위가 그런 상황을 극명하게 대변해 준다. 실로 진정한 메시아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중에 우리는 지금 고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와 그의 철학을 다시 주목한다. 그것은 그가 우리 민족과 백성의 양극화 해소를 위하여 온몸을 다 바쳐 선한 싸움을 싸워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의 토대를 놓았을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면서 용서와 화해로 하나 될 수 있도록 토대를 놓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할 정도의 평화(平和)의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되어, 마귀가 만들어 논 편견과 치우침으로 불구가 된 나라의 정치판에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씨를 뿌리며 희망의 토대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는가? 모든 차이와 차별과 다름을 하나로 묶어낼 진정한 강자(强者)가 이 세상에 오셨음을 선포하려 한다. 그래서 다름과 차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악하고 부패하고 파괴적인 부작용(副作用)들을 그분 안에서 모두 해결되게 하는 구원의 일이 시작되었음을 전하려 한다. 그 강자는 누군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의 하나 되게 하시는 영역은 인간 삶의 전체 영역에 미친다. 종교에서도 그렇고(복음서), 민족과 국가에서도 그러하며(구약), 인종과 문화 영역에서도(서신서) 적용된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일은 우리가 이 진정한 강자를 제대로 바라보고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며, 그의 백성의 일원이 되어, 그의 지시를 좇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1. 복음서 / 마 12:22-32 / “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scatters)니라 ”


분문은 예수께서 그 시대와 세상에 만연한 분쟁과 대립을 종식할 수 있는 강한 자(strong man)로 오셨음을 매우 담대하게 선포하신 내용이다. 이 선포는 일종의 신이 자신을 세상 만민에게 계시(啓示)하신 차원의 선포이기도 하다. 이는 어린 아기에게 그를 생산한 엄마가 스스로를 그의 엄마임을 알리면서, 엄마로서의 주도적인 역할에 들어간 차원과 흡사하다. 따라서 그때부터 아기는 자신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먹이를 주려는 이를 엄마로 알고 수용하기만 하면 편안히 살게 된다. 만일 아기가 엄마임을 의심하거나 거리를 두려고 한다면,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강한 자’론이 왜 나왔는가?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면서 그가 말하게 되고 보게 되자, 백성들은 치유자 예수를 ‘다윗의 자손(메시아)이 아니냐’라며 그를 좇으려 한다(22-23절).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축하의 마음 대신에 시기에 사로잡힌 것이다. 게다가 자기들이 못하는 일을 예수가 하였고, 백성들이 그에게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비난이 바로 예수의 행위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받아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며 그 가치를 격하시켰다(24절). 이는 예수의 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오판(誤判)이었고, 자신들이 어떤 힘에 붙들려 살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자신이 왜 ‘강한 자’인지를 밝히셨다. 우선 그들 율법종교인의 문제점은 매사에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시각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곧 귀신 들린 자들은 자신의 죄악이나 조상 죄악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상대를 죄인이고 벌 받아 마땅한 존재로 보았다. 자비나 긍휼의 마음이 없었고 동정심도 없었으며, 심판과 정죄가 전부였다. 그러니 어찌 그곳에 치유나 구원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자들의 불행을 안타까이 보셨다.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귀신은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 보셨고, 그것들로 얻은 각종 질환은 치료받아야 할 부분으로 보셨다. 동시에 그런 일들로 인생의 행복을 빼앗기고 사는 일을 동정하시면서, 새로운 회복의 기회를 부여하고 싶어 하셨다.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도와 줄 대상으로 보신 것이다. 그래서 당신 안에 내주하고 계신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28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불행한 이들을 가슴에 품고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시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주셨다. 


사정이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매우 격노하시며 경고하셨다. 한쪽 눈(시각)만 가진 약한 자가 어찌 양쪽 눈을 가진 강한 자의 온전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으시면서, 결국 귀신이 좋아하는 어둠의 시각을 가지고, 빛을 보게 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수행하고 계신 당신의 행위에 대하여, 바알세불(왕 마귀)의 힘을 빌려서 일을 한다고 매도하고 비난하는 일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란 점을 경고하셨다(28-32절 참조).


결국 강한 자란 온전한 자란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에 약한 자란 좌우의 한편으로 치우쳐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이 편견과 균형을 상실하여 객관성이 무너진 자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창조주이신 예수는 절대 강자이시다. 반면에 조물주인 우리 인간들은 한계를 가진 약자들이다. 그러면 이 거리 간격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가 큰 과제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 스스로는 안 된다. 절대 온전하신 예수를 의지하고 그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30절). 인간 사랑을 상실한 율법 종교는 안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랑을 함께 가진 복음의 종교여야 된다. 


2. 구약 / 겔 37:15-23 / “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


본문은 바벨론 포로기 중에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하나 되는 문제를 얼마나 깊이 생각하며 조율하고 계셨는지를 생생히 보여준 내용이다. 그들 유다와 이스라엘은 나라가 오래전 이미 망했고 백성들은 오랜 세월 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짓밟혀 살고 있었던 때였기에-, 그런 남북이 하나 되는 문제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지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분문에서의 하나님은 매우 구체적으로 통일을 기획하고 계셨다. 그러면 그때가 언제였나? 


바벨론 유수기(幽囚期)를 끝내고 본국으로 귀환할 때였다! 여호와는 이때를 예고하시면서부터 그들을 계속해서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시작하셨다(사40:27, 41:8,14, 42:24, 43:1-3,22, 44:1-2,6,21 참조). 이는 그들이 예전의 남북 분단의 아픈 흔적에서 벗어나 한 나라를 이루고 한 임금이신 여호와의 지배 아래에서, 통일된 민족이 되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발산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1) 여호와는 당신의 사자인 예언자 에스겔을 흩어졌던 민족이 어떻게 하나 되게 하시려는 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시연(試演-performance)의 주역으로 세우셨다. 그 방법은 매우 특이하다. 곧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함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쓴 후,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合)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이었다(16-17절). 둘의 하나 됨이 그의 손안에서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 시연은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가? 


2)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미래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그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일이었다. 회복될 이스라엘은 더 이상, 민족의 분열로 인한 수치와 패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아니하리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18-19절). 이 예언은 일차로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 칙령(勅令)에 따른 유대인의 본국에로의 귀환으로 이루어졌으나,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대변되는 온 세상 그의 백성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통한 큰 손길에 의하여 이루어질 일이었다(22절). 


3) 에스겔은 앞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잣대에 들어맞는 한 목자를 예고하셔서, 그로 하여금 나누어지고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로 묶어 다스릴 것을 예고한바 있다(34:23-24, 왕상12장 참조). 그런데 여기서 말한 다윗은 옛날 다윗왕 자체는 아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 나와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물론,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새 이스라엘까지도 하나로 묶어내실 참 목자를 말한다. 그 목자가 바로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0:14-16참조). 


3. 서신서 / 엡 2:11-22 / “ 그는 우리의 화평(和平)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十字架)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하심이라 ”


이방인의 사도로 택함을 받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심을 외친다(14절). 이 외침과 증언은 그의 선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예수님을 우리의 평화(화평)라고 규정하면서, 우리 모두를 그 안 에로 끌어들이려 하는가? 그는 예수만이 서로 다른 이질적 존재들을 하나 되게 하고, 화목하게 하며, 그것도 조화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유일한 마스터키(Master-Key)와 같은 해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성별이나 계층이 달라도, 빈부격차가 심하고 소유 문제가 엄혹해도, 예수가 그들 중심에만 들어가시면, 그곳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곧 예수만 중심에 계시면 그곳엔 싸움이나 갈등이나 증오나 독선이나 독주와 같은 부정적인 기운이 사라지고 그 대신 섬김과 화해와 겸손과 나눔과 공유와 공존과 화평 같은 긍정적 기운으로 채워지는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유대교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주의자였다. 그때의 그는 자신이 늘 상대를 심판하고 정죄하며 얕잡아보고 차별화시키면서 교만한 자로 살았다. 특히 그는 할례주의자로서,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한없이 얕잡아 보았다. 예수 믿는 자를 유대교의 장애물로 보면서 그 안에 역사하는 성령을 이해하지 못하여 증오도 하다가 스테반 집사를 처형하는 데에도 가담했고, 믿는 자를 체포하고자 이방 땅 시리아에까지 영장을 들고 쫓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십자가의 영성인 모퉁잇돌(the chief cornerstone)이 들어가시자, 그의 완전히 거듭난 새사람이 되었다(행9장). 성령과 은혜의 큰 인물이 되었다. 정죄의 율법을 내려놓고, 말씀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용서와 사랑에 의한 감동에 따라, 예수를 본받아 모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고, 원근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평안과 생명을 전하는 복음의 전사가 되었다(16-20절).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세계 곳곳에 세워서, 예수의 복음과 하늘 백성들을 편만하게 하는 일에 온 생애를 바쳤다(20-21절). 에스겔의 예언대로 한 목자의 다스림으로 세상 만민이 한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세계를 여는 주역이 된 것이다. 


o 예수는 진정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다(요14:6). 그를 잃으면 우리는 금방 길을 잃은 양이 된다. 들짐승의 밥이 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마귀의 종이 되고 노예가 되고 앞잡이도 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양무리는 길잡이이신 목자만을 절대 붙들고 좇아야 한다. 예수와 그의 말씀만을 잘 붙잡고 가면, 우리는 부족하지만, 큰 자가 된다. 그의 다스림에 참여하게도 된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아서 주변의 모두를 돕고 인도하며 살리는 인물로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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