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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12-19 (화) 17:28 4개월전 227  

본문) 사 40:1~11, 눅 1:57-66, 빌 4:4-7 


대림절 넷째 주일이다. 절기로는 마지막 주일이고, 성탄(聖誕) 직전 주일이기도 하다. 날씨는 매우 강한 추위가 찾아와서, 겨울의 한기(寒氣)를 잘 안겨주고 있다. 날씨로 말하자면, 요즈음의 날씨는 길을 잃은 듯하다. 이상 기온으로 인한 지구촌의 온도 상승에 따른 계절 변화가 온 지구촌의 평상 리듬을 크게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요즈음 유튜브 전파에 따르면, 전 지구촌에 불어닥친 사나운 날씨들로 인한 물질, 인적, 경제적 피해들은 상상을 넘어선 상황이다. 


여러모로 종말적 징후들이 우리의 숨을 옥죄어 온 것을 실감한다. 그런 점에서 한 해를 이렇게라도 무난히 넘어가고 있음이 큰 은혜요 축복이다. 무엇보다도 어리석은 위정자의 등장으로 남북의 군사적 충돌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의 생존과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무능과 무책임, 강고한 사대주의, 가진 자 위주의 정책, 검사 독재 체제 구축, 언론자유 말살 등은 우리 국가의 민주주의 수준을 완전 후진국형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매주마다 실시되는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전 국민의 약 60-70%는 대통령과 그 정부에 반대와 불신을 표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집권 후부터 2년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 거기에다 매주 주말이면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집회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이 정권은 국민의 그런 요구에 대응할 줄도 모르고, 잘해보려는 가미도 보이질 않는다. 정말 탁하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백성들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힘들어하는 민족이다. 아이큐는 세계 정상급이지만,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 1위 가는 모습들도 많다. 자살율이 가장 높다. 아이 출산율이 세계 최저(最低)이다. 이미 인구 소멸 예상 국가 1위로 떠오른 나라이다. 그 밖에도 여러 면에서 부끄러운 1위들이 많다. 대체 이 어쩌다 이런 나라가 되었나?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개신교회가 활발하게 부흥한 나라라고 소문도 났는데-, 어찌 국민 삶은 이렇게 무너졌는가? 


이런 현상을 뒤집어 보면, 우리는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이 험한 경쟁사회를 이루면서 상처(傷處)투성이가 되어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온 지금의 우리 백성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고 건강한 비전을 통하여 가슴에 안겨 줄 기쁨이 필요하다. 이런 아픔과 슬픔의 원인을 파악하고 분석해서 심판하려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선할 일은 서로를 용서하고 소중히 여기며, 상대에게 얼룩져 있는 상처를 어루만져 줄 손길이 필요하다. 분석과 원인 규명만으로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게 인간 세상의 실제적인 판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마침 오늘 대림절 세 본문으로 주어진 내용들을 보면, 더욱 우리에게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신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책망과 심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래서 범죄와 잘못에 대한 대가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전체를 이어 가면 안 된다. 반드시 용서가 있고, 위로가 있고, 관용도 함께 있어야만 한다. 찬물이 필요할 때도 있고 따뜻한 물이 필요할 때도 있음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절기상으로 보면, 지금의 우리는 위로와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때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여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로에게 채찍질하기보다는 위로하고 등을 두드려 주는 따스함을 나누면 좋을 때이다. 이런 일은 아쉬움이 클수록, 미련이 깊이 남아 있을수록 더욱 그리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주께서 가까이 오신 성탄의 때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혹 주변 사정이나 개인적 환경 여건이 매우 좋지 않다는 이유로, 그런 긍정적인 견해 표명을 거부하거나 외면하려 들 수도 있다. 지금은 자중할 때라거나 반성하고 있어야 할 때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들을 다시 보아야 한다. 오늘의 말씀들이 나온 상황들도 모두 그 배경은 깊은 외로움과 좌절과 힘겨움의 현실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재보다도 그것을 극복하게 할 복음의 능력과 그로 인하여 다가올 미래를 우선해서 생각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서인 이사야서를 보자. 배경은 여전히 바벨론 포로의 오랜 삶에 지쳐서 탄식하고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장이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 백성들에게 위로와 함께 기쁜 소식을 소리 높여 전한다. 그들은 이제 징벌을 갑절로 받았음으로 인하여 노역(奴役)의 때도 끝났고, 그들 죄악도 사(赦)함을 받았기 때문이다(2절). 그러면서 이제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목자가 양무리를 먹임같이 그들을 먹일 것이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듯 온순히 인도하실 것임을 예고한다(11절). 그러기에 이제 백성들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여, 그의 나타날 영광을 보라고 외친다(3,5,9절 참조). 


복음서도 보자. 본문은 오실 메시아의 선발대원이자 예비자인 세례 요한의 탄생을 전한다. 그는 이미 눅1:13-17에서 예고된 대로(첫 주일 본문), 때가 차자 모친 엘리사벳을 통해서 태어난다. 노파의 몸에서 첫 아기가 태어난 일에 이웃과 친족의 기쁨은 컸다(58절). 그런데 본문은 그가 팔 일이 되어 할례(割禮)식에 참여하게 되면서, 아기 작명(作名)을 놓고 발생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함께 전한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주의 손이 함께하심을 본 까닭이었다. 


서신서도 보자.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그가 개척한 교회인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그것도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당한 몸으로 보낸 옥중(獄中)서신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고한다(4절). 옥중 생활이 어떤 생활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도의 당부가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그에게는 세상의 억압을 넘어서게 하는 주님의 임재의 능력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탄을 어떻게 맞이할까? 나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오셔서 나와 임마누엘로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는 확실하게 차이(差異)가 나는 인생으로 살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서 성탄은 주님을 알리는 확실한 계절이 되도록 해야 한다. 


1. 구약 / 사 40:1-11 / “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삶에 지쳐 있는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慰勞)와 희망의 반가움을 안겨 줄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그들을 새롭게 인도해 주실 여호와를 소개하면서, ‘그를 보라’고 외친다. 이는 지금까지 계속 외쳐왔던 회개와 심판의 기조와는 확연히 달라진 말씀이다(1-39장 참조). 저들 어깨에 메여져 있었던 무거운 짐을 이제는 벗겨 주려는 의지가 가득한 기쁨의 메시지였다.


1) 그 위로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들의 바벨론 포로기가 마치 복역자의 구속기간이 만료(滿了)됨으로서, 이제는 유죄한 자가 아닌 무죄한 자의 신분을 획득한 연유에서 찾는다(2절). 세상은 전과자(前科者)란 딱지로 복역한 후에도 여전히 당사자를 끊임없이 옥죄지만, 여호와는 전혀 결백한 자의 일원으로 간주하여 그에게 새 삶과 기회를 부여하실 것임을 통보하신 것이다. 


2) 이런 획기적인 영광과 축복의 기회를 누리기 위해서는 이제 그들은 예전 죄악의 현장과는 완전히 절연(絶緣)해야 하고, 오직 새로운 영광과 힘을 안겨주실 여호와의 길에 들어서고 그가 마련하신 말씀의 대로(大路)에 올라와야 한다(3절). 그곳 여호와의 길은 대체 어떤 곳인가?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언덕은 낮아지며, 고르지 못한 곳은 평탄해지고, 험한 곳은 평지가 되는 세상으로서,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 곳이다’(4-5절) 


3) 그러면서 선지자는 인간과 세상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각성(覺醒)과 함께, 오직 영원하신 여호와의 말씀만을 좇아 살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준다. 

- ‘모든 육체(인간)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을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6-8절) 


4) 그러면서 선지자는 이런 생명의 기쁜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자들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자세와 전할 메시지의 내용에 대하여서도 언급한다(9절). 전달자가 설 곳은 어디인가? 높은 산이다! 모든 생명이 귀담아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곳이다. 예루살렘과 유대 성읍 사람들이다. 이는 믿다가 시름에 빠진 연약한 영혼들이다. 바로 그들에게 소리를 높여 말하되, 두려워 말고 외치라 하신다. 너희에게 오실 하나님을 보라고 하신다!


5) 그렇다면 외치는 증언자들이 보여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강한 자이시다. 그 능력이 크셔서 그 누구도 상대할 자가 없을 강한 자이시다. 그러면서 그를 좇은 자들에게 상급(賞給)과 보상(報償)을 안겨주실 분이시다(10절). 아울러 선한 목자와 같으셔서(요10:14참조), 그의 양무리를 먹이시고 나약한 양들은 품에 안아 주시며, 인도자를 보살피시는 분이시다(11절). 


이렇게 오실 분의 내용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그를 사랑하게 되고, 의지하게 되며, 그를 따르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좋은 메시아의 오심을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음의 복음서는 이분의 실제적 오심이 임박하자. 그의 선발대로 오신 이의 등장부터 보여준다. 


2. 복음서 / 눅 1:57-66 / “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


신이 인간이 되어 오신 이가 바로 예수이시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오시는 모양세의 코드가 닮았던 또 다른 인간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요한과 예수는 탄생 과정에서부터 닮은 데가 많았다. 비록 ‘큰 자’의 당사자와 ‘주 앞의 큰 자’의 차이는 분명했지만-!


1) 약 6개월 간격이긴 하지만, 동일한 천사인 가브리엘로부터 두 아기 탄생이 각각 예고(豫告)되었다. 요한은 그 아비인 제사장 사가랴를 통하여 통보받았고(1:13), 예수는 그 어미 마리아를 통하여 통보받았다(1:30-31). 이 과정에서 이들은 모두 태어날 아기의 이름들까지 미리 부여받았다.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여 보내신 생명들임을 확실히 해주신 것이다. 


2) 그리고 이들은 이 세상에 와서 자신들이 어떤 소명을 수행하며 살아갈 존재인지를 이미 택정(擇定)되어 오셨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요한은 ‘주 앞에 큰 자’로서, 이스라엘 자손을 많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자였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를 위하여 세운 많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고 준비케 할 자였다(1:15-18). 반면에 예수님은 ‘큰 자’ 자신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다윗의 왕위로 그 백성들을 무궁히 다스릴 분이였다(1:31-33).


3) 이들의 탄생은 모두 성령(聖靈)의 신령한 작업과 개입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온 인물이었다(1:15). 그 바람에 모태에서부터 아기 예수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태에 계시면서, 자기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오자 그를 먼저 알아보고 기뻐 뛰는 행동까지 취하기도 했다((1:44).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신가?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시며 그의 능력이 그를 덮으셔서, 잉태되어 오신 분이시다(1:35). 그러기에, 바울은 성령의 절대 필요성을 역설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롬8:9). 


4) 그 날, 곧 요한이 태어날 때도 사가랴 집에는 아기의 작명을 놓고, 한 번의 요동이 있었다. 성령 받지 못한 친족들은 그 아기가 당연히 가계 이름인 사가랴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던 그 부모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천사가 통보해 준 이름인 요한을 택한 것이다. 그 이름이 확정되자, 지난 10개월간 벙어리로 말 봉쇄를 당해왔던 아버지 사가랴의 입술이 열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경이로운 일들이 발생하였다(64절). 이에 많은 이들이 그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며, 아이의 미래를 주목하게 됐다(65-66절). 


3. 서신서 / 빌 4:4-7 /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본문은 인간이 세상이 주는 숱한 곤경과 시련에서도 어떻게 탁월한 지각과 분별력으로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비법(秘法)을 소개해 주는 내용이다. 그 비법을 깊이 알고 살아가던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중심으로, 성도들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이 비법을 알고 좇으면, 그는 옥중에서도 기쁜 생활을 할 것이지만, 이 비법을 모르고 살면 그는 좋은 환경에서도 항상 불행하게 살게 될 뿐이다. 그 비법은 무엇인가? 바울은 세 가지 내용으로 압축해서 전한다. 


1) 성령을 통하여 주께서 주신 기쁨을 항상 생활 속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일이다(4절). 

2) 주께서 임마누엘로 나에게 늘 가까이 계심을 깨닫고,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관용(寬容-gentleness)을 전하면서 너그러움과 평화를 펼치며 사는 일이다(5절). 


3) 매사에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근심 걱정을 물리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일이다(6절). 

그런 삶을 누리면서, 나는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와 함께 살고 있음을 자신과 세상에 꾸준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화가 나(마음과 생각)를 주관하시면서, 내 존재가 세상 사람과 차이 나는 영생의 인생을 살고 있음을 입증해 줄 것이다(7절). 또한 그럴 때, 전도와 선교도 발생하면서, 날 위해 성탄(聖誕)하신 주님께도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o 성탄이 임박했다. 과제는 이것이다. 나를 위한 성탄으로 맞을 것인가, 기념의 날로만 끝낼 것인가? 진정 그가 주신 기쁨으로 내 안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이론과 생각만으로 듣고 말 것인가? 다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내 안에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을 다시 온전히 모신 삶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세상을 이길 기쁨과 평화의 샘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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