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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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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11-21 (화) 23:05 5개월전 251  

본문) 창 6:5~22, 막7:1-18, 롬1:18-25


어느덧 창조절 열세 번째 주일이다. 절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待臨)절 직전 주일이기도 하다. 날씨도 완전한 초겨울에 접어든 느낌이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이기도 한데, 다사다난했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무탈하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몹시 안타까운 일은 지금도 계속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사이의 전쟁이다. 이번 일의 발단은 분명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집단의 일방적인 공격에 의한 것이어서, 지금 이스라엘의 거센 반격이 정당하다고 느끼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당해온 일을 생각하면, 이번 하마스의 공세는 상당한 동정심도 세계인들에게서 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스라엘의 잔인한 공격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량의 살상 행위는 필히 중지되어야 하고, 어서 평화로운 공존과 상생의 길을 열어야만 한다. 


매우 가슴 아픈 일은 저들 두 진영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들 사이의 싸움이라는 데 있다. 아브라함의 적자 출신인 이삭과 서자 출신인 이스마엘로 대변되는 그 후손 간(間)의 싸움이 지금까지 그 후손들 사이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코 동족 간의 전쟁이나 다툼을 엄격히 금하신 하나님의 뜻에도 맞지 아니한 행위이다(신2:9,19절 참조). 동시에 이 세상에 전쟁이나 분열이 아닌 화평(和平)과 평화(平和)를 안겨주시고자 오신 예수님의 뜻에도 반(反)하는 일이다(마5:9, 눅2:14참조)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이래, 그 산하의 종교들 사이에도 서로 분쟁하면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적대시하면서 자신들의 이념이나 사상을 관찰하려고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그런 행위에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오히려 당연히 규탄받아 마땅하다. 종교의 이름이나 자기들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도 일으킨 전쟁들은 그 어떠한 경우라도 당연시될 수 없다. 진정한 신은 서로에게 사랑을 실천하게 하고, 화평하며 살게 하는 평화의 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금 현 정부도 위험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모든 외교적 행위나 국방을 위한 행위나 언사들 모두가 평화지향적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모양세를 고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지금 세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 전쟁 이후에, 가장 위험스러운 곳으로 우리 한반도인 남한과 북한을 보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처지가 위험천만하다. 혹 우리 내부 안에 충돌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부터 제압할 때이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이 세상 분위기와 흡사하다. 창세기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악에 빠져 살고 있어서, 그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마음에 한탄하시면서 결국은 대홍수를 통하여 그들 모두를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을 담은 어둠의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포기할 수가 없으시기에, 그 시대의 의인(義人)으로 남은 자인 노아와 그 가족들만은 빼내어 그 대환란과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시고, 그다음을 대비하게 하시는 희망의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 


복음서에서도 밝은 내용이 아니다. 예수께서 당시의 종교인 그룹의 대표격인 바리새인들의 외식(外飾)하는 모습에 매우 격하게 비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 외식적 종교인의 모습 때문에 당시의 하나님을 향한 경배는 알맹이 빠진 허식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모법(母法)인 율법을 훼손하고, 자기들의 편의를 위하여 시행령(施行令)을 만들어 더욱 모법보다 우선시하게 하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이 아닌 인간적 규례를 더 쫓게 하였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들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탈법 종교로 변질시킨 것이다. 


서신서에서는 앞서 있던 창세기의 타락한 인간상들에 대한 증언과 복음서에도 나타났던 타락한 종교인들의 왜곡된 모습이 이방인에게서도 어떻게 계속되어 나타나는지에 대해 증언해 준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이미 보여졌는데도, 그들 역시 미련한 마음에 어두워진 모습,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모습,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모습을 보이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런 자들에게 나타남도 말한다. 


하지만 ‘법보다는 은혜의 하나님’의 집중적인 관심은 패역하고 타락하여 결국 심판당할 다수의 영혼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망가진 세상과 역사를 힘을 다해 다시 붙들어 세워 줄 살아 있는 인물들에 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당신은 대 심판 후에도 그들을 앞세워 다시금 이 세상을 재건하시겠다는 의지를 품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게 누군가? 바로 남은 자(Remnanat)이다. 오늘의 세 본문에 나타난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같은 이들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고대하는 이들이다(마6:33참조). 그런 존재가 있는 한, 하나님의 생명 구원 역사에 중단은 없다. 


1. 구약 / 창6:5—22 /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


노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에서 담아낼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담 부부의 타락은 결국 그의 후손들의 삶의 내용을 선악 양면으로 형성되게 하는 모양세로 드러나게 했다. 가인과 아벨로서의 양분이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형 가인은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동생 아벨은 하나님 중심으로 섬긴 것이다(창4:3-4참조). 이에 하나님이 아벨을 기뻐하시자 형의 시기로 인한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그 빈자리를 하나님이 <셋>이란 생명으로 보완해 주신 것이다(창4:25참조).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펼칠 인물의 계보가 이어지게 하셨다. 노아는 바로 아담의 7대손(孫)이자(유1:14절), 아벨-셋 계보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범죄한 아담의 후대는 어둠의 세력이 압도적인 위세를 떨치며 세상을 주도하고 있던 때였다. 행위나 계획도 악했다. 부패하고 포악했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지으신 일을 깊이 탄식하고 후회할 정도였다(5-7, 12-13절). 결국 그 꼴을 두고만 볼 수가 없어서, 비장한 심판의 칼을 빼드신 것이다. 대홍수로 그들을 지면에서 쓸어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공경하던 의인과 그 가족은 살려두셔서, 심판 이후의 새 세계를 도모하고자 하셨다. 


1) 당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증언이 길게 소개된다(5-7절). 악행이 세상에 가득했고, 마음의 계획도 항상 악할 뿐이었다(5절). 그 악행의 특성도 소개된다. 바로 부패(腐敗)와 포악(暴惡)이었다. 이는 매사가 극단적 이기주의를 기반으로 한 행동들이 공사에 구분없이 만연된 상태를 말하며, 그것의 관철해 가는 방법도 조폭 수준의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상황이었음을 말한다. 


2) 그러기에 사회정의란 찾아보기 힘들고, 공의로운 정치도 발을 부칠 수 없는 시대였음을 엿보게 한다. 부패란 말이 무려 3번이나 집중해서 표현하고 있을 정도였다(11-12절). 따라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장탄식과 후회를 하실 정도가 된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께서는 새롭고도 근본적인 혁신(革新)적 방안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개혁(改革) 수준이 아닌 혁명(革命) 수준의 대변혁 카드를 대안(代案)으로 내놓으신 것이다. 


3) 그 대변혁을 위한 방법은 물에 의한 대(大) 심판으로 세상의 모든 기존의 가득한 악인들을 일시에 제거(除去)하시는 일이었다(13,17절 참조). 그러면서 심판 후의 세상을 감당하게 될 당신의 사람들은 그런 대 심판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구원해 내시는 일이었다(14-16, 18-21절 참조). 그들 남은 자들이 누군가? 바로 노아와 그의 여덟 가족이었다(18절). 노아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하나님의 신뢰는 그토록 받았는가? 


4) 성경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고 말한다(8절). 그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세 아들을 둔 아비로서(10절), 하나님의 신뢰를 받을만한 확실한 특징을 가진 인물이었다. 의인(義人)으로서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동시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9절). 이는 그가 당시에 어떤 인물이었을까를 말해준다. 일단 그는 당시에 세상의 필요와 요구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뜻 받들기를 더욱 중요시하며 살았던 인물이었음을 말한다. 동시에 그는 매사에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의 감동에 따라 순종하며 지냈던 자였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자녀들까지도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식구가 되도록 이끈 가장이었음도 말한다. 


5) 그런 자였기에, 심판을 앞둔 하나님은 당신의 비밀스러운 계획들을 노아에게 전하고 준비하도록 지시하셨다(13-21절 참조). 그러면서 그들의 보호를 위하여 코페르나무로 된 방주(方舟-Box)를 만들도록 그 구체적인 모형과 함께 지시하셨고, 그들 가족 모두는 반드시 보호하시겠음도 약속하셨으며(18-21절), 노아가 선정한 모든 암수 생물까지도 보존하시겠다고 공언하셨다(19-20절). <참조 ; 1규빗 = 46-52cm>. 이에 노아는 그 명령대로 다 실천하였다(22).


6) 그때 노아의 믿음의 대응에 대하여 신약의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方舟)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2. 복음서 / 막 7:1-18 / ”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예수님은 종종 당대의 대표적인 신앙인들이랄 수 있었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신학자)와도 마찰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과 같아서 모든 신앙의 모법(母法)이라고 한다면, 바리새인이나 학자들의 가르침은 모법과 함께 해석서인 설교문이나 시행령(施行令)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이끈다. 그 결과는 어떤가? 모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모법을 해석하는 가운데에서 적잖이 하나님의 본뜻과는 어긋난 규정이나 조문들(규례들이나 설교들)이 자리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기독교가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바로 이 지점이다. 종교개혁자가 필요한 경우가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1)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계명 자체와 그로 인하여 당시의 유대교 장로들(조상들)에서 만들어 낸 전통의 내용을 놓고, 매우 치열하게 논쟁을 한다. 저들은 전통의 중요성을 내세우면서 예수 집단이 그 점을 소홀히 하는 일을 비난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전통을 지키려는 열심 있는 행위 속에 담겨진 소홀한 내적 취약성과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시는 것으로 맞으셨다. 양면을 모두 도모하면 좋은 것이란 생각도 드는 대목들이다.


2) 첫째는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의 물씻음이 없이 음식을 먹는 문제를 보면서, ‘왜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느냐’라며 스승인 예수께 공세를 펼쳤다(1-5절 참조). 사실 율법에서 정결 규정은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몸과 영혼 모두가 정결함을 유지하며 지내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제자들 문제를 놓고, 공세를 받은 예수님이 보신 그들의 정결 부분의 허점은 매우 심각했다. 


이사야의 예언을 내걸며, 이런 말씀으로 대변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도다. 하나님 계명 버리고, 사랑의 전통을 지키는구나’(6-8절). 그들의 경건에 대한 기만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잘못된 안정감을 품고 사는 그들의 영적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신 것이다. 


3) 주님은 그들이 장로 전통을 엄히 지킨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버린 잘못된 부분을 아주 신랄하게 지적하셨다. 바로 모세 10계명 중의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이 계명과 정신을 ‘고르반(-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그만이다)’라는 인간적 교리를 제정하면서, 늙어서 자식들의 돌봄이 필요한 부모 공경을 회피 내지 외면하고 살 수 있게 변질시킨 것이다. 부모 공경의 준엄한 계명을 장로 전통으로 막아버린 행위였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적 시행령을 내세워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게 한 구체적인 사례이다(9=13절). 


☞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흡사한 일이 많다. 곧 시행 세칙으로 모법을 훼손하는 일이다. 행정부의 일원인 검찰이 입법부인 국회가 만든 모법을 교묘하게 훼손 내지 방해하고, 오히려 시행 세칙 등을 만들어 자신들의 욕망을 관철시키고 있는 일이다. 이는 매우 사악한 일로서, 심판받아 마땅하다. 이런 간계한 행위가 국가 사회의 정의와 공의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 


3. 서신서 / 롬1:18-25 / ”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만 한 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음에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계심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창세로부터 당신의 진리와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가 지으신 만물 속에 담아서 폭넓게 알려주셨기에, 그들도 (그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19-20절).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자아(自我)의 소리를 외면하는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허망하고 미련한 데 마음을 둔 체, 스스로 어리석게 살고 있다. 


그 바람에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대체하였고,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으며,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한다(21-25절).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인가? 노아 시대와 같은 영원한 최후의 심판을 시행하기 전에-, 우선은 그들의 마음과 몸이 그들의 정욕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방법을 취하셨다(24절). 이 일은 마지막 기회, 곧 영원히 찬송할 이에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그들 위해서 남겨두신 일이 아니겠는가(25절,하 참조)! 


o 심판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믿는 자나 불신자나 모두 심판대에 선다.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에 온전히 응답하며 사는 일이다. 가감하면서 말씀의 뜻과 생명을 왜곡시키면, 심판을 면치 못한다. 불신자들도 더더욱 피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경고에 응답하는 일이 살길이다. 대림절이 다가온다. 열린 마음으로 남은 자를 찾아오실 주님을 영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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