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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11-08 (수) 11:55 11개월전 772  

본문) 사 40:27~31, 눅 18:1-8, 계 7:9-17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이다. 11월의 날씨답지 않게 더웠으나, 순간 내린 푹풍우의 비로 싸늘한 초겨울 날씨를 맞이하였다. 어찌 그리 창조 질서의 위엄이 대단한지, 정말 경이롭다. 전국엔 단풍철을 한창 보내는 중이지만, 이 또한 금방 지나갈 것이다. 창조주께서 정해주신 생애와 그 질서를 누가 훼손할 수 있으랴! 거스름이 아닌 순종함으로, 그분 앞에 서기를 원한다. 


지난 주일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새겨보았다. 그분과의 건강한 교제와 관계만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 속에는 평생을 그분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창조적 역사가 계속됨을 알게 되었다. 성장하는 자녀는 스스로의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공급해 주는 은혜와 힘으로 성장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은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어떤 차원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일까? 지난 주일에 이어진 내용이되 더욱 심화(深化)된 내용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실 힘과 능력의 길로 우리를 안내해 주시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현재 모습들은, 대략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어떤 이에게는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는 안 계신 분처럼 느껴지게 사는 이들이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지금 하나님이 그를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랑하고 계시는 분처럼 간주 될 정도로, 아주 좋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며 지내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이런 차이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해야 좋겠는가? 


그런데 이 둘의 경우를 보면서, 보다 확실한 것이 확인된다. 하나님은 확실히 살아계신다는 점이다. 비록 내게는 없는 분처럼 느껴지고 있다고 해도, 저쪽 사람에게는 지금 한창 뜨겁게 사랑하고 교제하며 당신의 살아계심을 생생히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문제는 이것이다. 왜 저쪽 인물에게는 저토록 당신을 보여주고 계신 데, 왜 나에게는 이토록 차디찬 돌무덤같이 대하시느냐는 것이다. 이점에서는 당연히 그 이유가 있음을 시인해야 하고. 다만 그 문제가 무엇이냐며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런 냉랭한 상태가 계속되면, 절대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혹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인가? 차별하신다면 어떤 것으로 하시는가? 돈이나 인물됨이나 인간의 자랑거리 같은 것들로 차별하실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그토록 차별하시거나 구별하신단 말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면서, 이제 오늘의 말씀을 듣도록 하자. 그리고 나는 지금 창조주와의 관계가 냉랭(冷冷)한가, 아니면 사랑하는 중 인가도 함께 성찰해 보면서, 이 말씀을 듣도록 하자.


여러분도 인정할 것이다. 냉랭한 관계에서는 아무런 창조나 생산이 발생할 리 없다. 하지만 열애가 진행되는 곳에서는 놀라운 새로운 것들이 계속 나오고 창조물이 생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일은 가정이나 교회나 직정이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관계가 냉랭해지면 얻을 것은 없다. 아니, 있는 것마저도 다 무너진다. 하지만 사랑이 불붙어 있고 지속되고 있으면, 그곳엔 계속 새 창조와 새 역사가 생성(生成)되고 기적도 발생한다. 이런 시각으로 오늘의 본문을 살피고, 그 핵심이 될 생명의 말씀들을 확인해 보자. 


구약에서는 30-31절의 내용이다. 함께 읽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복음서에서는 6-7절의 내용이다. 함께 읽자.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서신서(계시록)에서는 13-14절 내용이다. 역시 함께 읽자.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 예언서 / 사 40:27-31 / “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困憊)하지 않으시며 명철(明哲)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이 대목의 뜻을 파악을 위해서는, 지난 주일의 증언과 연결해서 들으시면 이해하기에 좋다. 즉 이사야 선지자는 지난 70여 년의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하여, 낙심과 슬픈 속에 빠져 지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는 여호와께서 본격적으로 일하실 때가 되었으니 백성들은 오직 그를 앙망하며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가 주실 힘과 기운(strength)을 받아, 그가 비로소 활짝 열어주실 새 역사인 본국(本國)에로의 귀환할 일을 대비하라고 강력히 선포한 것이다. 


1) 이때 선지자는 그들을 ‘야곱아’, ‘이스라엘아’라고 함께 부른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고 새롭다. 그것은 그동안 그들 유대인들은 포로 되기 전에 12지파(支派)로 함께 살다가, 솔로몬 왕조 이후에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단되면서, 아주 오랜 세월을 서로 견제하고 증오하며, 이웃 강대국에 매달리고 그들의 우상 종교들까지 수입하여 믿는 등의 큰 죄악을 범하며 지내오다가, 결국은 그들 모두가 그들의 추종하던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 지금처럼 망하여 살아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 먼저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잔악한 앗수르 제국에 패망했고(주전722), 다음은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 제국에 패망하였다(주전587년). 그러면서 그때부터 그들은 세계 처처에서 타향살이를 하게 되면서, 디아스포라(교포)가 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한번 분열된 민족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하나 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도 이미 70년이 훌쩍 넘지 아니한가! 하지만 뜻하지 않은 때, 하나 될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포로 삶을 끝내고 귀환할 때가 그때였다. 

3) 하나님이 그런 그들을 지금 ‘야곱아,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신 때가, 바로 수백 년 동안 둘로 갈라진 그들을 하나로 부르고 계신 때였다(고레스 측령에 따른 첫 귀환-B.C 538년). 참으로 놀랍고 기이하게 그들이 비로소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그들의 귀환은 전쟁도 없이 오직 평화의 방법이었고, 분열된 민족이 약184년 만에 하나 된 족속으로 다시 만나서 함께 돌아오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은총의 선물인가-!!!


4) 이때 선지자는 믿음이 나약한 백성들을 책망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엉뚱한 생각들을 하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당시의 그들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라면서(27절), 그런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불신하고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뜨겁게 소개한다(28-31절 참조) : 부디 여러분들도 가슴에 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영접하시기를 바란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는 조금만 어려워도 금방 피곤하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인간들과는 다르셔서, 전혀 피곤하거나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도 한이 없으신 분으로서, 특히 오직 그를 마음에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셔서, 그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감 같게 하시고, 아무리 달려도 곤비하지 않게 하시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5) 여기서 우리가 관심할 부분은 하나님이 그를 앙망하는 자에게 주시는 힘은 과연 무슨 힘일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이 힘은 그때마다의 필요한 자원이나 에너지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은, 그런 순간적 필요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힘 자체 이신 하나님이 그의 삶의 모든 정황에 함께하심으로서 거기서 나오는 총체적인 힘을 말한다(시145:15-19), 곧 여호와가 그에게 힘이 되어주신 모습이다(사18:1). 마치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힘이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 그러기에 여기에서 절대 중요한 부분은, 내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내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그 부분을 복음서의 사례가 대답해 준다. 곧 예수의 비유에 담긴 과부의 모습 속에 다 담겨있다. 


2. 복음서 / 눅18:1-8 / “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怨恨)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는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내가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도로 매달려서 목표한 것을 받아내게 되는 사례를 구체적인 비유로 전하신 내용이다. 그것도 그 지방에서 가장 불쌍한 과부가 이뤄낸 성공적 사례였다. 과부는 본래 힘이 없고 의지할 것도 없는 불쌍한 여인의 표상이다. 그런 여인이 스스로가 해결할 수 없을 만한 억울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인 원통함에 날을 지새우고 있었다. 원한(怨恨)이란 표현이 무려 세 번이나 올라와 있을 만큼의 가슴 아픈 여인이었다(3,7-8절). 


그런 그가 결국 그 원한을 해결 받는 통쾌한 승리를 움켜쥐게 된 것이다. 그 비법(秘法)이 무엇이었나? 간단했다. 그 도시에 있는 재판장을 찾아가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라며 계속 간청을 드린 것이다. 처음에는 재판장에 의해서 무시당하곤 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럴수록 더욱 간절하고도 꾸준하게 찾아와 재판장에게 매달렸다. 결국 그 재판장은 그 과부의 간절한 마음과 태도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일 그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자기가 계속 괴롭게 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2-5절 참조). 결국 그의 승리는 그 끈질긴 매달림의 열매였다. 


예수님은 바로 그녀의 그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확실한 응답을 받아낼 비법도 바로 거기에 있음을 지적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이 응답받기 위한 성도들의 대응 지침을 이렇게 밝혀주셨다. 


1) 항상 기도(祈禱)해야 하는데 낙심(落心)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1절). 기도가 기도로서 확실할 수 있으려면, 믿음이 밑받침될 때이다. 기도자는 반드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을 주신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서 기도에 임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응답은 내 판단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판단에 따라 해 주신다. 하지만 응답이 지체될 때도 우리는 계속 요구할 수는 있다. 오직 당신만이 나의 원한을 풀어 주실 분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갖고 매달리는 것이다. 


2) 이에 관한 주님의 교훈을 더욱 주목하자. 그토록 불의한 재판장이라도 과부의 그러한 끈기 있는 청원에 응답하는 데-, 하물며 자비하고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찌 그의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擇)한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라며 반문(反問)하신다(6-7절). 그러면서 주님은 단호히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속(速)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8절). 


3) 문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구하고 찾아야 할 우리들에게 있다. 즉 답이 있고 해결책도 가지신 분이 나의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연 그럴까’, ‘정말 내 기도 들어주실까’라고 의심하거나 외면하거나 미적거리며 믿음의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다. 그 바람에 우리도 체험할 수 있는 홍해바다 도강(渡江)체험이나 바벨론에서의 본국에로의 귀환 체험 같은 생의 놀라운 일들이 나에게는 없거나 일어나자 않고 있는 것이다. 


4) 결국 믿음 싸움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낼 믿음이 내게 있느거냐의 싸움이 우리에게 남은 것이다. 바로 주님이 오늘의 말씀 말미에서 주신 내용도 그것이다.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3. 서신서 / 계 7:9-17 / “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계시록 본문은 그런 확실한 믿음을 소중히 간직하며 끝까지 살아낸 이들의 최후(最後)가 어떠한지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 일차 대상은 로마 권력의 무자비한 박해 앞에서도 끝내 굴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전하다가 박해를 당하거나 순교한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의 주되심을 믿음으로 증언하다가 세상을 떠나온 많은 성도도 여기에 합류되어 있다(9, 14절 참조). 


이들은 하늘에서 입혀 준 유니폼인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흰옷은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의 속죄(贖罪)의 피로 자신들의 더러운 죄들을 씻어내어서 얻어낸 깨끗한 영혼이 된 증표로서의 흰옷이다(14절). 천국에서의 그들은 매우 특별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 보좌와 어린 양 앞에서 종려 가지를 들고, 환호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10절). 


2) 하늘 보좌 앞과 하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셔서 보호하시기에, 그들은 주림도 사라졌으며 목마름도 끝났고, 해나 그 어떠한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는 일도 없이 안전하다(15-16절). 그뿐만 아니라, 어린 양이 그들의 친 목자(牧者)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17절). 실로 죽음이나 슬픔은 영원히 떠나갔고, 영원한 생명과 평화 만이 가득한 곳이다. 할렐루야!


o 이 계시록의 증언이 우리 믿는 자들의 영원한 비전이며 약속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우리 믿음은 살아 있어야 한다. 사화산이 아닌 활화산이어야 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믿음으로 뜨거워야 한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믿음,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힘이요 방패요 산성이시다는 믿음, 그러기에 기도와 말씀 속에서 그와의 교제가 항상 생활화된 믿음이 내 삶의 최고의 자산이어야 한다. 이런 믿음의 생활로 무장되면, 우리의 세상 삶도 형통하며 충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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