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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교개혁주일

관리자 2023-10-24 (화) 23:44 7개월전 359  

본문) 사 6:1~8, 요8:12-20, 계15:1-4


오늘은 창조절 아홉째 주일이다. 단풍의 계절 10월을 보내면서, 맞이한 주일이다. 아름다운 창조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진정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아무래도 부정적인 판단을 면치 못할 듯하다. 사람들이 너무 강퍅해져 있고, 더불어 사는 삶의 리듬을 훼손당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전선도 확대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지배하는 팔레스틴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로 세계는 크게 긴장하고 있다. 혹 이 전쟁이 전체의 중동전으로 확대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우려 때문이다. 이 전쟁이 왜 위험한가? 종교전쟁에다 종파 전쟁도 가미되면서, 중동 전체가 안고 있는 석유 자원으로 인한 자원(경제)전쟁까지로 확산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 한반도에서의 돌발 전쟁의 가능성까지도 회자하는 상황이다. 현재는 남북의 통신망도 완전히 불통한 상태여서, 조그만 국지전도 순간 전면전으로 확산할 우려마저 크기 때문이다. 자칫하여 한반도마저 전쟁에 휘말리게 되면, 세계는 금방 ’불타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런 전쟁의 발발 모습은 최근에 잇따르는 기후 및 자연환경에서 발생하는 재해들로 인한 세계적인 재앙 수준의 피해들과 함께, 인류의 종말에 대한 우려를 한층 고조시킨다. 게다가 일본의 후꾸시마 원전 폐기물 방사의 건도 바다에 의존해서 살아오는 인류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한다. 실로 인류의 도덕과 이성의 장벽이 무너진 연고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런 세기말적인 현상을 어떻게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을까?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 상황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생명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교회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특히 오늘은 한국교회가 온 세계교회와 함께 종교개혁(宗敎改革) 기념 주일로 맞이한다. 


루터가 시작한 1517년의 종교개혁운동이 어연 506주년을 맞이한 셈이다. 종교개혁이란 말은 원래 교회만 있었던 서구적인 표현으로서, 타 종교를 향한 말이 아니라, 교회개혁을 말한다. 그 표현 속에는 교회의 올바른 정립이 곧장 세상을 바르게 세우는 잣대란 말과 상통함을 담고 있다. 인간의 가슴에는 양심과 마음이라는 핵심 그릇이 있어서, 그의 삶 전체를 조정 및 조율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사회의 양심 역할을 잘 감당하는 곳이란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루터가 제시한 종교개혁의 주제들을 잠시 살펴보자. 1544년 10월 5일에 독일의 트루가우 교회당이 개신교 최초 교회로 봉헌되고 루터가 그곳에서 설교하면서,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골자들 세 가지를 제시했다. (그 내용은 그 후 설교대 중앙과 좌우에 걸쳐 종교 개혁의 세 가지 신학 원리로 부조(浮彫)에 새겨져 오늘까지 전해온다). 중앙에는 ’오직 말씀‘(Sola Scriptula), 좌측에는 ’오직 은총‘(Sola Gratia), 그리고 우측에는 ’오직 믿음‘(Sola Fide)’로 되어 있다. 이런 개신교 전통의 뼈대가 든든한 힘을 가진 독일교회가 존재하기에, 지금의 견고한 독일의 통일 사회를 세워 온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비록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와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대학살 시대의 부끄러운 역사를 남겼어도, 그들은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을 온 세계에 보여주었고, 비록 이념 때문에 동서독의 분단 시대를 수십 년 보냈을지라도, 그들은 교회의 사랑과 기도의 강력한 힘을 통하여 순식간에 베를린 분단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초능력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에 이웃 일본을 보라. 그들에게는 이런 독일의 신앙 정신과 그 힘이 없다. 무속신앙들에 사로잡혀 산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할 줄 모르고, 저토록 가해자의 속성으로 우리에게 지금도 고통을 가하고 있잖나? 여전히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서, 방사능 폐기물까지도 바다에 버리지 않는가-?


진정한 신앙의 힘은 나라와 민족을 살린다. 역사를 구원하고 새롭게 한다. 국민의 의식과 생각을 깨운다. 가정과 사회를 정의롭고 평화롭게 한다. 모든 공동체를 공생, 공영, 공존의 영역으로 바꾸게 한다. 어찌 이뿐이랴? 바른 신앙은 생명과 평화와 건강을 제공한다. 하지만 거짓 신앙이나 이단은 분열과 거짓과 허상의 나락으로 모두를 몰고 간다. 지옥의 문을 열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회를 새롭고 바르고 온전하게 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이다. 


지금 이 정권의 흐름을 보면, 우려되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상식과 이성이 실종된 모습이다. 국민과 국권을 철저히 무시한 모습이다. 종종 대통령 부부의 무속 신앙에 관련된 풍문들을 많이 듣는데, 이들의 행태를 보면 ‘헛튼 소리들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옛적 이스라엘의 바알신앙 숭배자인 아합과 이세벨이 우리 안에 찾아왔는지 의심될 정도이다. 거짓 영과 악령을 쫓는 자에게는 온전한 것을 기대할 수 없는데, 많은 국민이 지금 이 정권의 모습에서 ‘정말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하게 된 것을 보면, 정말 고통스럽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세상의 더러움과 어두운 현실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부터 먼저 정결하고 온전한 제 모습을 세우는 일에 더욱 집중해야 하겠다. 우리가 바르게 되는 것은 실로 모두를 위한 것이 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 점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세 본문 내용에서 그 길을 제대로 찾고 배우고 익히며 살도록 해야 하겠다.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우리들이 다시 깨어야 하겠다. 


첫째는 우리의 세상과 육신의 근심 걱정거리들은 모두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면서,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하는 일이어야 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자기 부족과 잘못을 항상 깊이 성찰하고 회개하여 그 죄악에서 씻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파송자의 신분을 취득하여 말씀과 뜻을 살피고 전하는 증언자들의 자리에 서도록 헌신해 한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을 중심으로 이제 세 본문의 틀을 다시 보겠다. 


1. 구약 / 사 6:1-8 /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종으로 소명을 부여받은 장면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받았던 소명을 이사야도 받은 것이다. 때가 중요하다.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왕하15:1-7참조)의 죽음으로 나라에 아수르 제국의 위세로 말미암은 어려움이 몰려오자(B.C740-735), 이사야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거기에서 여호와는 당신 앞에 나아온 이사야를 그 환상(幻像) 중에서 만나주신다. ‘누미노재’ 체험 속에서 소명(召命)을 받게 된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차 있었고, 그분 위로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며, 남은 두 날개로는 날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큰 소리로 찬양하였는데, 그 우렁찬 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했다(1-4절). 


그러자 이사야는 이 거룩함과 영광스러움의 환상(幻像)에 압도되면서, 자신의 부정(不淨)한 존재의 모습을 새삼스럽게 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이제 죽게 되었다’는 두려운 깨달음과 함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살아왔구나’라며 탄식하며 부르짖게 된다(5절). 매우 격한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사람이 적나라한 자신의 치부와 더러움을 직접 목격할 때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 될 것임을 본문이 강하게 보여준다. 


그러자 주께서 개입하셨다. 그것은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 있는 부집게로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집어 들고 그에게 날아와 이사야의 그 부정한 입술에 대면서,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며 사죄(赦罪)의 은혜를 선포해 주셨기 때문이다(7절). 그 순간 사죄받은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런데 은혜받은 자의 마음은 언제나 받은 것으로 끝나는 법이 없다. 반드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또 다른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 상). 사람을 찾고 계신 주님의 음성이었다. 이는 하늘 보좌 회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여야 하겠는데, 거기에 합당한 자를 찾고 계셨음을 드러내신 것이다(왕상22:19-22 참조). 이는 깨끗한 영혼을 갖게 된 자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게 된 놀라운 영적 기능이다. 곧 더러운 영혼을 가진 자들에게는 절대 들을 수 없던 하늘의 음성을 이제 이사야는 깨끗해진 영혼의 귀로 들을 수 있었음이다. 


결국,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 하는 열린 심령의 소유자와 당신의 뜻과 명령을 세상에 전달할 적합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둘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이나 불신의 장벽이 없었기에 가능한 만남이었다. 이사야는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소서’라며 용기 있게 자기 손을 높이 들고 자원(自願)한 것이다(8절,후).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중 하나인 이사야는 이런 과정으로,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대 예언자의 사역을 펼치게 된다. 


2. 복음서 / 요 8:12-20 /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초막절(=추수감사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서, 당신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신다(12절). 이런 빛에 대한 선포는 초막절 밤에 예루살렘 성전 주변을 밝히기 위하여 밝힌 주변 등불들을 보시면서, 당신의 존재가 세상을 밝히는 실질적인 빛이심을 강조하신 데에서 나온 선포였다. 여기에서 세상의 빛은 세상을 위한 빛을 의미하고, 생명의 빛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빛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자신을 세상의 빛이며, 생명을 부여하는 빛이시라는 자기 증언(계시)은 금방 주변에 있는 시비(是非)꾼들인 바리새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자기가 자기를 향하여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참되지 못한 주장일뿐더러 허구(虛構)라는 논리이기에, 누가 그 말을 수용할 수 있겠느냐’라며 반박을 한 것이다(13절).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선언에 아주 단호하셨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였어도 내 증언은 참되다’라고 강조하셨다. 그 까닭은 당신은 당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말씀하기 때문이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이유를 대셨다(14절). 이는 예수가 근본적으로 세상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밝힌 내용이어서, 자신의 출발지에 무지한 인간들로서는 대응하기가 불가한 증언이기도 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로부터 오신 이‘요, ’하늘로부터 오신 이로서, 만물 위에 계신 이‘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자기를 알고 계신 이였다(요3:31-36 참조).


그러니 이 어찌 차원이 저급한 존재인 바리새인들이 감히 반박할 수 있겠는가? 유구무언(有口無言)일 뿐이다. 게다가 주님은 당신의 판단이 왜 정당한 것인지도 논증하고 나오셨다. 첫째는 당신의 판단은 세상적인 척도에서 나온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따른 하늘의 것이기에 정당하다고 하셨다(15-16절, 3:6, 6:62 참조). 둘째는 당신의 증언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항상 함께 계셔서 나온 것이기에(18절), 모세의 율법과는 부합되는 것임을 소명하셨다. 모세는 일찍이 ’모든 증언에는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근거하여, 그렇게 해명하신 것이다(17-18절, 신17:6,19:15참조). 


당신이 말씀하실 때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가 항상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은 정말 새롭다-! 그런 마음과 자세에서 나온 선포였기에, 주님은 항상 진리만을 증언하실 수 있었다고 보인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의 무감각한 자세에도 큰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주님의 이런 자기 계시에 대한 순환논법적 해명에 대하여 더 이상 논쟁이 불가함을 느낀 바리새인들은 최후로 이렇게 질문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19절). 이는 자신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없음을 토로한 무기력한 질문이었다. 주님 역시 그런 자들과의 더 이상의 토론이 불가함을 아시고, 그들의 영적 무지를 이렇게 안타까워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20절). 


3. 서신서 / 계 15:1-4 / ”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모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


본문은 지상에서의 온갖 불의와 거짓, 불신과 박해와 탄압의 바벨론 세력(세상 폭압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견디어 내어서, 하늘의 뜨거운 영접을 받으며 영생의 자리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승리의 노래를 부른 영광스러운 모습을 전한다. 


1) 박해자 향한 심판은 일곱 천사가 전할 일곱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전달된다(1절). 

2)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주인공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다. 그들의 노래의 주제(主題)는 홍해 바다를 건너고 불렀던 모세의 노래와(출15:11절), 땅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속량함을 받은 무리들의 노래인 어린 양의 노래였다. 세상의 억압과 탄압을 뚫고 새 하늘 새 땅의 밟게 된 데에서 터져 나온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한껏 담은 승리와 생명을 담고 있는 감사의 찬양이었다(2-3절). 이는 실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절박한 순간에 목숨을 걸고 불렀던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585장)를 생각하게 하는 찬양이다. 


o 이제 우리 모두도 그곳의 하늘 찬양대의 일원이 된 심정으로, 또 언젠가 우리도 그곳에서 함께 부르게 될 것을 믿으면서, 그들이 불렀던 본문의 찬양들을 함께 소리 내어 읊어보자. 

-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3-4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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