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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한가위감사주일

관리자 2023-09-20 (수) 11:33 7개월전 277  

본문) 욥37:14-24, 마14:22-33, 롬9:14-26


오늘은 창조절 넷째 주일이다. 가을의 선선함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이다. 더위와 시원함, 그 변화무쌍한 날씨 변화에 우리가 들어섰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바가 있다. 바로 인간이 자연 섭리를 대하는 모습과 같은 인간을 대하는 모습이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전자는 너무 순종적이며 체념적이라면, 후자는 공격적이고 계산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지구촌의 다양한 변화 앞에서는 그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못하다. 모로코의 대지진, 수단의 대홍수로 인한 가공할만한 피해들 앞에 인간은 두려워할 뿐이다. 그보다는 좀 가벼워 보이는 일들, 곧 비오고 바람이 불어도, 덥거나 추워도, 꼼짝달싹 하지 못한 체 체념하고 수용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왜 그럴까? 보이지 않는 신의 영역이라고 인식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하지만 인간들끼리는 조금만 손해가 되고 힘들게 하면 전혀 참지 못하면서 공격하고 싸우려하고 전쟁이라도 하려고 든다. 참 흥미로운 현상이다. 신적인 일에는 약하고, 인간적인 일에는 강한 면모를 보인 것이다.  


문제는 이 세상살이가 자기 뜻대로 되는 일보다는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간적 일보다도 신적인 일이 더 빈번하다고 것이다. 결국 그 차이에 대한 인간들의 대응하는 능력이 그 사람의 존재 역량을 드러내게 해 준다. 이게 바로 종교와 신앙의 힘을 더욱 필요한 이유다. 무엇에 대응하며 싸워야 하는 지, 무엇에 피하며 침묵하고 지내야 하는 지, 그런 차이에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하는 건지가 우리의 삶의 과제들이다. 이런 부분에서 슬기롭고 현명하게 대처할 능력을 가진 자라면, 그의 생애는 매우 행복할 것이다. 


그런 중에 우리 교단 총회는 금주 간에 전남 신안의 섬인 자은도에서 제108회 총회로 모인다. 크고 작은 섬들을 무려 1,004개나 품고 있어서,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섬마을에 가서 우리 교단에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새 출발을 도모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분별없는 현 위정자의 폭정에 나라의 모양세가 너무 흉흉해진 때여서, 주님의 도우심을 많이 구하며 응답받은 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면 이 주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세계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주권과 그것에 응답해야 하는 피조물인 인간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다룬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선 이들이 삶의 과정에서 간혹 경험할 수 있는 시련과 곤경을 놓고, 과연 그들은 하나님께 어떤 요구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입장과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입장이 같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주 다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생각하면서, 우리는 본문 메시지를 더욱 주밀(綢密)하게 살펴보아야 하겠다. 하나님은 만민과 만물의 주관자요 아버지이시기에, 그들 중의 하나인 나를 대하시는 기준은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를 수 있음은 분명하다. 마치 다수의 자녀를 둔 부모가 자식 하나하나를 대하는 마음과, 자식들 각자가 그런 부모에게서 바라는 바가 같지 아니함과 흡사하다. 


부모는 분명히 모든 자식을 다 사랑한다. 하지만 부모의 자식 사랑의 표현은 아주 다를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더 사랑하는 자식도 있을 수 있고 덜 사랑하는 자식같이 보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사랑을 받을 자식의 수준과 사정도 고려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무시하고 왜 자기를 다른 자식과 차별하며 똑 같이 대우하지 않느냐고 반발하는 자식이라면, 그 부모도 힘들겠지만 그 당사자도 불행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또 자신이 구한 일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이 와도 감사히 소화시킬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게 성숙한 믿음이다. 소위 바울이 증언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롬8:28참조). 


1. 구약 / 욥 37:14-24 / “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


오늘의 욥기는 자신과 가족에서 몰려 든 엄청난 시련과 상실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아서 몸부림한 자였다. 흔히 말해서, ‘어찌 나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실 수 있느냐’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 것이다. 어찌 보면, 마치 탕자의 비유 속에 나타난 아버지에 대한 장자의 지워지지 아니한 불만 같은 것과 흡사하다(눅15장). 이런 경우는 그만큼 하나님과 오랜 세월 좋은 관계를 유지한 이들일수록 품게 될 의문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심하게 소화불량에 걸리면, 그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배신감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욥에게 미안해 하셨나? 전혀 아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여전하시다. 다만 하나님이 욥에게 깊이에서 더욱 바라시는 더 높은 차원의 바램이 있으시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욥을 통해서 해결할 더 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싶으신 까닭이었다. 마치 십자가에서 그의 아버지를 향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며 부르짖으신 예수의 고뇌의 의미를 드러내시는 데에 디딤돌과 같은 자료로 하나님이 그의 것을 사용하시고 싶으셨던 까닭이다(마27:46참조). 하나님은 욥에게도 그럴만한 전권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욥은 그 고비를 넘기고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될 뿐이었다.   


욥에게 요청되는 신앙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 자기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도우미가 되어달라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세상 인류에게 그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 일을 입증해 줄만한 모델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아멘’하는 수준의 신앙이었다. 그 요구하신 까닭은 하나님에게는 그만한 절대적 선택권을 행사하실 위치에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에서 정말 온전히 하나님의 요구하신 수준에 응답한 이들이 있다.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욥은 그때에 깊이 깨달아야만 했다. 자신이 받아 누렸던 하나님의 그런 큰 복은 꼭 자기만 받아야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에게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받아 누려도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했다. 특정인만을 위한 사랑이 이제 모든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보편 확대되는 일에 욥은 남다른 디딤돌이 되어야 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바로 이점을 함께 생각하며,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2. 복음서 / 마 14: 22-33 /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시고 ”


본문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도 순간순간 난관과 어려운 시련이 온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면서 동시에 그때마다 어떻게 믿음의 대처를 해야 하는 지를 일깨우시는 내용이다. 그것도 주님과 동행한다고 생각하는 데에도, 시련과 시험이 왔다는 점에서, 더 당황이 되고 또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거나, ‘주님은 이런 일에 나를 지켜주시지 아니하시는가’라고 나, ‘아시는 대도 이런 환란에 침묵하시는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등의 궁금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 영적인 처지가 어떤 지도 감안하면서, 본문의 메시지를 듣도록 하자.  


1) 예수께서는 종종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셨다. 주로 하늘 아버지와의 친교로 인한 기도시간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숱한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피고하셔서 휴식이 필요하실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휴식은 다음의 일들을 위해 아주 필요한 과정이었다. 


2) 이 날도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祈禱)하실 시간을 위하여, 제자들을 재촉하여 앞서 건너 편 마을로 보내셨다(22-23절).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항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제자들의 배타기는 전혀 힘들거나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곳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아온 인물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데도 그날의 항해는 너무 힘겨웠다. 그날따라 풍랑으로 인한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서, 한발자국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천하의 바다 사람들(?)도 공포에 사로잡힐 날씨였다(24절). 


3) 그런데 너무도 놀라운 일이 목격되었다. 한밤중인데, 예수께서 그런 거친 바다 위를 걸어서 자기들에게 오셨기 때문이다(25절). 제자들은 너무 놀라서 ‘유령이다’라며 소동(騷動)했다(26절). 유령 아니고서는 선생 예수가 저럴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예수에 대한 인식의 빈곤함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 자기들에게는 바다가 거대하고 커서 자기들을 언제나 위협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바다와 파도를 발로 밟고 오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 바로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라는 정보를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기회에 제자들에게 당신이 진정 누구시라는 현실을 일깨우고자 하셨다. 모두를 순간 삼킬 수 있는 위력의 바다나 바람도 그의 다스림에 복종하며 그의 종에 불과함을 확인시켜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요1:3참조). 그래야 그런 처지를 알 리가 없어서 예수를 단지 자기와 같은 인간이요 자기의 스승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새로워지면서, 그들의 삶에도 큰 새힘을 얻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4) 이런 현실적 차이와 간격의 골을 해소하고자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말라’(27절). 이런 표현은 마치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란 표현을 모세에게 사용하신, 내용과 흡사하다(출3:14참조). 그 아버지의 아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자기 계시였다. 그것도 풍랑을 발로 밟고 계시면서 말이다. 이 주님을 믿고 알게 되면 우린 어찌될까? 담대해지리라.   


5) 용기 있던 제자 베드로가 직접 확인에 나섰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주님께서 ‘오라’고 허락하셨다. 그러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전개되었다. 인간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러 물 위를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금방 물속에 빠져들면서, 붙잡아 건져주지 않으면 익사하고 말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려 달라’는 급박한 요청에 주님은 그를 건져서 함께 배위로 승선하셨다. 그때는 모든 풍랑도 그쳤다(28-32절).  


6) 주님의 교훈 한마디만 남는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절). 이런 차원의 믿음은 소박한 믿음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의 주이시고, 모든 만물이 그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믿는 큰 믿음을 소유해야만 맛볼 수 있다. 만물은 주님의 지시와 뜻을 벗어나서 활동하지 못한다는 것도 믿어야 맛볼 수 있다. 그래야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우리도 모든 세상 환란과 풍랑에서도 구원을 받게 된다. 


3. 서신서 / 롬 9:14-26 / “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  


본문은 세상 만물과 온 만민을 향한 선하신 하나님의 불가침적인 주권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제재되거나 악평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사도 바울도 매우 강하게 지지하며 강조한 내용이다. 이를 위하여 바울이 강력히 제시한 예가 바로 토기장이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토기장이는 자신의 그릇을 만들 때,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의 선택을 그의 독자적 결단에 따라 한다는 것을 비유로 든다. 그래서 그릇을 자신의 필요한 대로, 만들어 사용한다.  


이런 점들은 유대인들의 독자적인 선민의식이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들의 하나님 독점의식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신앙의 독점과 독단에 대한 저항이자 경고에 해당된다. 또한 제자 요한이 자기들처럼 예수를 좇지 아니하는 자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나 병 고치는 일을 저지하려는 모습에 대한 예수의 거부와도 상통하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분명 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너와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모든 세상 사람들의 구주도 되신다는 점을 확실히 믿고 사는 일이다.  


자칫하면, 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차단될 위험성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심이다. 그러면 어떻게 믿고 섬겨야 하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열린 사랑에 감사하고 그의 사랑이 나 외에도 더 많은 세상과 만민을 향해서도 무한히 뻗쳐가도록 기도하며 협력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나만 사용하실 분이 아니라, 필요하면 애굽의 바로도 사용하셨듯이 세상의 악인도 얼마든지 당신의 뜻을 알리는 데에 사용하실 수 있음을 겸손히 수용하는 것이다.  


o 오늘의 말씀은 우리의 건강한 신앙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요구들이 담긴 내용이다. 내가 바라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되기를 더 원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의 폭넓은 사랑과 은혜를 제대로 받아 누릴 수 있어야 하겠다. 작은 믿음은 끝없이 우리 자신을 소진시킨다. 주님과 그의 말씀 중심의 큰 신앙을 위해 더 기도하자. 큰 신앙의 그릇이 마련되면 그만큼 나는 주님의 필요한 큰 그릇으로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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