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강림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강림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07-10 (월) 23:05 9개월전 340  

본문) 계 21:1~7, 눅13:22-30, 사65:17-25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이다. 금주의 말씀은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려는가? 이 세상의 것과는 차원이 아주 다른 새 세상에로 인도하시려고 한다. 이런 새 것과 새 곳에로의 인도는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겠지만, 세상 사람들로서는 기사(奇事)와 표적(標的)으로 표현될 차원의 놀라운 것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2장 37절 이하의 내용이 그 대표적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형성되기 시작한 원시교회가 보여 준 놀라운 삶의 변화가 생생히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잘못한 일들을 깊이 뉘우쳐 회개하면서, 성령을 받는다. 물세례도 받은 사람들이 교회란 공동체로 모이게 된다. 무려 삼천 명이나 예수께 돌아온 것이다.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2:42참조). 


그러면서 그들이 그 때 새롭게 보여 준 놀라운 삶의 변화는 이것이었다. 모든 물건들을 서로 통용(通用)하고(44절),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으며(45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는 생활을 기꺼이 펼치며 산 것이다(46절). 그들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서 이 세상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상이 있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온 백성들은 교회를 칭송하였고, 구원 받는 사람들도 날마다 폭증했다(47절).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었다. 작가 김훈의 소설 <흑산(黑山)>을 보면, 우리 역사에 들어온 초기의 교회에서도 예수의 복음이 어떻게  백성의 삶 속에 자리하였는지를 소개하는 글이 있다. 그 속에는 말씀을 들은 부자 교우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기 종들에게 나누어주고, 종의 문서를 포기하며 그들에게 넘겨주던 일들이 나타난다(행2:43-47참조). 교회가 세상에 새 구원의 질서를 들여다 놓았던 놀라운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 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음’을 잘 보여 주었다. 


이게 성령과 교회의 힘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재산이나 신분 포기나 나눔의 행동들을 정치적 시각이나 이념적 시각으로 보면서, 극단적인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으로 매도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의 역사는 이런 행동주의자들의 단호한 자기 비움과 이웃 사랑의 헌신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돈키호테적 행태로 치부나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목숨을 내려놓으신 일을, 자기들의 그런 행위를 통하여 뒤따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행위들을 무엇이라 칭할 수 있을까? 주님의 표현대로라면, ‘좁은 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주님이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요구하셨던 그 좁은 문 말이다(눅13:24). 그렇다면 그 좁은 문에 들어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구원(救援)받게 될 자들이 들어와 살게 된, ‘새 하늘과 새 땅’(a new heaven & a new earth)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 살며 대하는 지상의 처음 것들과는 아주 다른 새 것이다. 


그곳은 언젠가 동서남북의 세계인들이 몰려와 참여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 잔치(feast)가 펼쳐지는 곳이다(눅13:29). 따라서 이토록 놀랍고 좋은 세상이기에, 주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미리 지시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24절). 이제 이런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또 다가올 그 나라를 대비하기 위한 우리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다 상세히 찾아보도록 하자. 


1. 복음서 / 눅13:22-30 /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이 좁은 문 출입에 관련된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자가 적겠지요?’라는 질문을 예수께 하는 일로 인하여, 예수께서 그 답변하신 내용이었다(22-24절). 처음부터 질문의 의도가 그 나라의 모습(내용)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들어갈 자격자들의 자격이나 여건 등의 어려움에 관련된 이야기라서, 주님의 답변 속에는 그 나라의 모습에 관한 내용이 거의 거론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없지는 않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잔치’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었을 뿐이다(29절). 다만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이나 그곳에서의 삶의 내용들에 관련해서는 다른 본문들인 구약과 서신서인 계시록에 풍부히 들어있다. 따라서 오늘의 복음서에서는 왜 좁은 문인지,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우려야 하는 지를 집중해서 알아보아야 하겠다.   


1) 주님의 답변에는 분명한 뜻이 담겨 있다. 그곳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좁은 문이 분명하다는 점이다(24절). 대학 입시만 좁은 문이 아니라, 천국 문도 넓지 않아서 경쟁의 문이 분명함을 밝히신 것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일단 천국엔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런 점에서 서로 간에는 선의의 경쟁자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들어가는 자는 적다. 왜 그런가? 그곳은 처음부터 아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곳에 와서 살기에 적합한 자인지 아닌 지를, 그 심사대에서 철저히 검증받고 심판받게 되기 때문이다(행17:31 참조). 그렇다면 그 때의 심판 기준은 무엇인가? 본문에서는 그 기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없다. 다만 심판장 입구에서 배척 받을 때, 집 주인인 심판장으로부터 듣게 되는 한 마디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 뼈아픈 말이 무엇이었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行惡)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절).    


3) 행악자(evildoer)들이었다는 점이다. 무슨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일까? 그것들을 하나하나 따지려들면, 한없다. 따지면 온전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삶의 방향(方向)을 어디에다 두고 살아왔느냐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와 그의 말씀을 좇으며 살아왔느냐, 세상과 그 요구만을 좇아서 살아왔느냐는 점이다. 예수를 좇는다고 해서 다 완전한 것은 없다. 많은 착오와 실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주인을 예수께로 두고 사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 그게 아주 중요하다.  


4) 배척당하는 자들의 항의의 내용도 주목된다. 자기들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으로부터 교육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이렇게 물리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다(26절).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 항의이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출입 허락의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일까? 그들은 배워도 행치 않았고, 함께 살아도 마음은 세상의 유혹을 좇아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율배반적 존재는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면 살아야할 천국 잔치에는 절대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배척당한 것이었다.  


5) 그러기에 예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들어가기를 힘써야만 한다’. 지금 주님과 함께 있고, 지금 그의 말씀을 배운다고 다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원문에는 ‘싸우라’는 뜻도 있다(고전9:25,딤전6:12,히12:1참조). 다른 본문들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이기는 자’로 표현했고(계21:7), ‘수고한 자’로도 표현했다(사65:23).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몫이다. 안일하고 은혜만 이야기한다고 확보되는 곳이 아니다. 


6) 특히 이 심판의 기준이 우리의 행위(行爲)에 따른 것이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믿음만이 아니었다.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신 것이다(약2:14-참조). 특히 이 행악의 문제는 이웃 사랑이 무너져 사는 자들의 신앙의 허상에 대하여 날카로운 경고가 담겨 있음도 알아야 한다(롬2:16, 14:10참조). 앞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고 교육도 받았음에도 최후에도 그 나라에서 제외당한 자도, 바로 주변의 이웃 사랑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에서 밀려난 것이었다! 


7) 이 좁은 문은 세상 만민 모두에게는 활짝 열려있다. 유대인 우선주의도 없다. 주님과 그의 복음을 좇아서 선한 싸움을 싸우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그 하늘 잔칫상에 참여할 기회가 부여된다(29절). 또한 정해진 우선순위도 없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하는 곳이다(30절). 그렇다면 이제 그 새 하늘 새 땅에 대해서 살펴보자. 


2. 예언서 / 사 65:17-25 / “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은 여기에서 최초로 나온 표현으로 보인다.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표현은 두 가지의 특징을 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이다(17-18절). 그리고 이 세계는 오로지 예루살렘 도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성도 예루살렘이 수난과 오랜 시련에 시달려온 점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다시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19절).  


그러면서 이 새 예루살렘에서의 삶에는 마치 희년의 세상을 맞이하듯 온갖 빼앗긴 것을 되찾아 누리는 기쁨의 도성과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삶을 누리는 평화(平和)의 도성이 될 것을 예고하셨다(19-25절 참조). 그 때의 특성들을 잠시 살펴본다.  


1) 아파서 우는 소리와 억울해서 부르짖는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다(19절). 

2) 모든 인간이 제 수명을 제대로 누리게 될 것이다. 소위 천수를 누리리라는 것이다(20절). 100세에 죽는 자는 젊은이가 죽었다 할 것이며, 그것도 못되어 죽으면 저주 받았다 할 것이다. 여호와의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환과 같은 것이다(22절,하) 


3) 수고의 열매를 제대로 취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자기가 건축한 집에서 살게 될 것이고, 자기가 농사한 열매도 먹게 될 것이다(21-23절). 어려운 시절에는 꿈만 같은 말이다. 

4) 하나님으로부터의 극진한 사랑까지 받게 되면서, 그들이 부르기 전에 여호와가 응답하시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들어 주실 것이다(24절).  


5) 모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나 생명체들 사이에서, 가진 힘과 능력의 차이로 인한 차별과 배제도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예컨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그 구멍에서 어린 아이와 함께 노는 그런 세상이 펼쳐져서, 그야말로 해함이나 상함이 전혀 없는 평화(平和)의 세상이 펼쳐질 것을 예고하였다(25절, 11:6-9 참조). 


그런데 이런 힘 있는 사자가 소를 위하여, 허리 굽혀 그의 음식 짚을 먹는 세상은 예수의 성육신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존귀하신 어린 양이 이 세상에 인간되어 오셔서 가난을 걸머쥐며 사신 모습에서, 그 예언이 일차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재론은 그 어린 양의 영원한 잔칫상에 누가 초대받게 될 지를 예고한 말씀이 아니겠는가! 


3. 서신서 / 계 21:1-7 /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없고,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늘나라에 인도받은 요한 장로는 그곳에서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세상을 목격한다. 분명한 하늘과 땅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본 그 하늘과 땅이 아닌 전혀 새로운 하늘과 땅이 펼쳐진 곳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늘과 땅과 바다가 없는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불가하다. 날 때부터 우리는 그 하나님의 피조물들인 자연 환경의 늪 속에서 평생을 살았고, 또 그 안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이 아예 없는 곳을 만난다는 것과 그것들이 아예 처음의 것들로 치부되면서 한낱 옛 것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우리 앞에 등장한다면(1절), 우리는 과연 얼마나 놀라운 충격을 받겠는가! 그것도 처음 것들인 세상의 것들이 아예 보이지 아니함에도 전혀 다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그저 새롭고 놀랍고 신선한 곳이라면, 이 얼마나 흠모할만한 곳이겠는가! 그곳을 본 자들의 인간적 표현은 저 바울처럼 불가할 것이다(고후12:1-4). 


1) 요한은 그곳을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성으로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었다고 증언한다(2절). 그곳으로 하나님은 좁은 문을 통과한 이들을 들어서게 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곳에 들어온 인간들과의 거처를 함께 하신다(3절,상). 여기에 모인 이들에게는 어떤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선사될 건가? 처음 세상에서의 피할 수 없었던 그 죽음의 극복과 영원한 위로가 그들에게 부여된다. 한마디로, 모든 처음 것들인 세상의 것들이 다 지나간 것이며, 만물이 새롭게 된 세상의 영원한 시민이 된 것이다(4-5절). 


2) 그 때의 새 예루살렘의 단장된 모습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면서 그 단장 속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과 친히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신다(3절). 그래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도 받는다. 억울한 눈물들을 다 씻어주시고, 사망의 그늘로 없애주시며, 이별이나 아픔 같은 땅의 상처들도 모두 지워버려 주신다. 바로 그곳에서 사25:8에서 예고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그렇게 확정해 주신 것이다(6절).  


3) 이것들을 상속(相續)으로 받게 될 자들을 밝힌다. 바로 ‘이기는 자’이다. 모든 도전과 유혹과 시험과 박해에서도 주님과 그의 말씀에 의지하면서 견디고 극복해낸 승리자들에게 주어진 상속물이다. 그들에게는 최후의 영예도 부여된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7절). 이제 남은 것은 이 메시지를 들은 우리들의 몫이다. 새 하늘 새 땅을 소유하자.


o 세상은 짧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잠깐을 못 견디고 휩쓸려 살면 안 된다. 잘 싸우고 견디어내어서 좁은 문을 통과해내자. 반드시 이긴 자들이 되자. 그 이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세상이 영광스럽게 주어질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