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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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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03-22 (수) 00:16 1년전 923  

본문) 눅 23:39~43, 겔18:1-4, 21-32, 갈2:15-21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다. 완연한 봄이 되었지만, 전국은 지금 가뭄 상태여서 비가 매우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기도해야할 일이다. 온 나라는 지난 번 대통령의 방일외교의 후유증으로 크게 진통중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위정자들 언행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어서, 매우 염려된다. 선거 잘못한 대가를 우리 국민들이 혹독하게 치루고 있다. 앞으로가 문제이다. 지금의 행태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더 미궁(迷宮)으로 떨어질지 모르겠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뿐이다.  


오늘 사순절 다섯 주일에 뵙게 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에서 뵙게 된다. 민망하기 그지없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만나야만 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주님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에 매달리신 후, 오후 3시에 그곳에서 별세하시게 되기까지 6시간을 고통하고 계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곳 십자가에서 7마디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셨다. 한마디 한마디가 유언 이상의 무척 소중한 메시지들이었다.  


4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십자가상의 7언(言)>을 먼저 소개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1)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를, 누가복음서(3)에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를, 그리고 요한복음(3)에서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 ‘내가 목마르다’(19:26), ‘다 이루었다’(19:30)이었다.  


오늘 본문은 그 십자가상의 7언(言) 중에, 누가복음이 전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주님의 좌우(左右)에 함께 매달려 있었던(막15:27) 또 다른 십자가 동행자들 중의 하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를 비방하던 다른 사람과는 달리, 예수를 옹호하며 죽게 된 자기를 예수께 부탁하는 요청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오직 누가만 전하는 매우 특별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부분이 오늘의 세 본문 중의 핵심 주제로 오른 까닭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십자가 동행자인 죄수의 구원 요청에 대하여, 예수께서 그 요청을 수용하시면서, 지금의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주목할 수밖에 없는 대목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in paradise)에 있으리라’라는 약속을 그에게 하셨기 때문이다(43절). 즉 최후의 순간에 확실히 구원을 받게 되는 사람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예수께서 그에게 매우 선명히 확언해 주신 일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 받게 될 사람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그 행악자(行惡者) 중의 한 사람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획득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사람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흉악범으로 인식되었던 바라바의 동료들로 인식된 자이었고, 지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정치범(政治犯)들 중의 일원들로서 상당히 과격히 살아온 자들 있었을 터인데도(25절 참조), 그렇게 구원을 득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도대체 사람이 어느 정도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져 준 사안도 된다. 그 행악자가 얻어낸 구원의 실상 때문이다. 비록 죽음 직전까지 죄인이었어도, 결정적인 순간이라도, 회개하고 은혜를 입으면 하늘 입성이 가능하단 말인가라는 희망을 던져 준 사건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점과 함께 우리는 구원의 결정적인 조건에 대한 궁금증도 다시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머지 본문들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명료한 해답과 해석을 제공해 준다. 


마침 구약 에스겔서의 말씀은 그 점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단호한 지침을 제시해 주셨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 구원 받게 된 행악자의 이유도 확인하게 된다. 아울러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본심이 어디에 있는 지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두려운 부분도 발견하게 된다. 자칫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사는 이들 중에서, 잘못된 자가 진단을 한 자들도 많이 있을 것 같은 진단 카드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에스겔서는 매우 중요한 구원 진단카드이다. 


아울러 서신서의 증언은 명료하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그렇다. 이 행악자가 생의 마지막에 남긴 삶의 메시지가 정말 놀랍고 크고 은혜롭다. 잘 배워 두자. 


1. 복음서 / 눅 23:39-43 /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본문이 중요한 까닭은 세상에서 흉악한 죄인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점을 보여 준 데에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좀 더 묵상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다. 즉 이들 십자가에 매달린 행악자들이 누구냐는 점이다. 막15:7에 보면, 그들은 ‘바라바 예수’와 함께 민란을 꾸미고 살인하며 체포된 자들이었다. 당시로 보면, 일종의 로마 권력에 대한 저항 세력(혹,게릴라)이라고 보인다. 일종의 정치범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살인도 로마인이나 그들의 추종자일 수 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그들은 대체로 동족들로부터는 환대를 받거나 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다. 자기들이 못하는 나라 지키는 일을 그들이 해주고 있다는 보기 때문이다. 우리들 경우도 그렇다. 우리 독립 운동하던 분들은 과거에 본의 아니게 일본 경찰이나 군인, 혹은 그쪽의 복역(僕役)자들인 우리 동족들을 죽이기도 했잖은가? 물론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폭도, 게릴라, 전복세력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다. 안중근, 윤봉길들이다. 


이 점에서 유독 세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가 한 분 있다. 바로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회퍼(Bonhoeffer) 목사였다. 그는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당시 자기 나라의 집권자인 히틀러가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켜서, 유럽을 비롯한 처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미국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하여 행동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한 체 체포되어 교수형장에서 처형되었으나, 그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가장 존경받는 신앙인이다. 그런 그를 누가 행악자이니 지옥행임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여건에서 그 날 나사렛 예수 때문에, 구원받은 행악자들이 둘이나 나왔다. 하나는 사형수에서 예수 대신에 사면(赦免)되어 석방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 바라바였고(막15:15), 또 하나는 예수와 함께 하늘나라로 동행해서 떠난 무명의 이 행악자였다(43절).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들을 어떻게 보셨을까? 예수님은 이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과격한 행동을 하고 살던 투사들을 어떻게 보았을 지가 궁금하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특정인이 아닌 죄인들을 향한 보편적 마음가짐은 확인할 수 있다. 그 마음은 바로 이 마음이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1-23). 


이렇듯 주님은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상대하시지만, 문제는 상대이다. 그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행악자는 열린 주님의 그 마음에 화답(和答)하는 마음을 보여 준 것이었다. 적어도 그의 주님을 향한 마음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첫째 그는 주님의 평생의 사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40절).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0-41절).  


이 내용을 보면, 그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지켜보고 살았으며, 그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갖고 지냈다. 그러면서 그런 존귀한 분과 자신들같이 죄인들이 함께 매달려 죽게 되는 일 자체에 죄송함을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그런 예수를 향하여 동료가 험담하고 나오자, 그를 책망하였다. 동시에 예수의 무흠하고 의로우심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모두가 예수께 등 돌리는 순간이었는데, 그의 입으로 예수께서 뜻밖의 위로를 받으신 것이다. 얼마나 반가 우셨을까!


또 하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가 예수께 놀라운 요청을 드렸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2절). 그는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다. 예수께는 가실 나라가 있고, 자기도 그 나라에 함께 가길 원한 것이다. 이 내용 역시, 당신의 12제자들에게서까지도 듣지 못한 놀라운 차원의 식견(識見)이었고 믿음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니, 주님은 그런 그를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한마디 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구원이나 영생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을 보면, 비록 자신은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거친 삶을 살고 있어도, 예수에 대한 관심과 그가 주신 말씀과 그의 소유된 나라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함께 하며 살아온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도 그의 생 막판인 십자가에서 그런 놀라운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 그가 직전까지 큰 죄악에 빠져 살아왔음에도, 이런 구원의 은혜와 기회가 그에게 임한 것이다. 사모하는 자와 구하는 자에게 그런 기회가 임한 것이다.


2. 예언서 / 겔 18:1-4, 21-32 / “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 


본문을 보면, 포로기 시절을 한탄하고 후회하며 보내던 유대인들에게 몇 가지 구원론에 관련된 신학적 주제들이 회자(膾炙)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다. 


1) 죄와 그 형벌의 연좌제(連坐制)에 대한 금지이다(1-4절). 포로생활에 젖어 살던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에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란 속담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오래 전부터 전해온 선조들의 죗값은 후세대가 치르게 된다는 집단책임론, 죄의 연좌제에 기인한 것이었다(출20:5,신7:9-10). 이 점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단호하게 재정리를 해 주셨다. 더 이상 죄의 연좌제는 없다! 모든 영혼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자기의 죄는 자기에게 속한 것이고 자기 책임일 뿐이지, 조상의 죄까지 안고 사는 일은 없다고 하셨다.

   

2)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시간(時間)문제이다. 사람은 한결같지 못하다. 수시로 변절한다. 내내 잘하다가도 잘못으로 빠지기도 하고, 내내 잘못하다가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화되어 돌아왔을 때, 심판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이다. 특히 그 동안 쌓아온 업적이나 공로들이 감안이 되는가, 아니면 전혀 무효화되는가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 모두가 실효(失效)된다. 지금이 잘못되어 있으면, 이전의 공로나 업적 모두는 무효이다. 반면에 이전에 엉망으로 살았는데 이제라도 돌아오면, 그간의 잘못도 다 무효가 된다. 바로 이런 경우가 오늘 십자가의 행악자에게 적용된 원리였다. 지금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이전까지의 모든 죄악의 행적들이 모두 용서를 받고, 주의 영접을 받았던 것이다.  


3) 이런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불공정하다며 강한 불평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쌓아왔던 공로와 업적을 지금 좀 탈선했다고 어떻게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회개했다고, 그 동안의 저지른 범죄를 전혀 없었던 것으로 처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25-29절 참조). 그래도 하나님의 심판 원칙은 ‘지금 여기에서’(Now & Here)이다. 신앙은 지금이 죽어있으면, 아무런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본심은 죽을 자라도 최후에라도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23, 31-32절 참조).  


4) 이 대목은 요즈음의 한국교회 내부의 심각해진 문제들, 곧 교회의 다양한 공로자들에 대한 문제들 처리에 큰 지침서가 된다. 교회를 세우고 키우고 성장시킨 공로자(?)들이 후에는 교회에 숱한 문제를 야기 시키면서, 교회를 몰락시키는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심할 일이다. 


3. 서신서 / 갈 2:15-21 / “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은 ---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유대인이면서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요, 율법주의자에서 복음주의자와 예수주의자로 전향해 온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일관되게 <오직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구원론>을 강조한다. 결코 율법에 의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역설한 것이다(15-16절, 20-21절).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기에(죽었기에)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자신은 육체를 입고는 있지만, 실재로는 자신을 사랑하시고 위하셔서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음을 뜨겁게 고백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없고,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할 수 없기에, 다시는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20-21절). 이는 저 십자가에서 예수를 향하여 뜨거운 고백을 드린 그 행악자의 고백과 함께한 증인이기도 하다.  


o 우리는 십자가에서까지 우리에게 구원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도록 일깨워주신 예수님을 다시 뵙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항상 살아있어야 한다. 구원의 진단카드에 적합한 신앙인이어야 된다. 이를 위해 항상 생산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하고 부실한 신앙인이면 안 된다. 특히 나태하고 게을러져서, 옛적 업적만 자랑하며 지내는 자들이 되면, 매우 불행해진다. 그런 사람은 교회와 성도들의 근심거리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늘 깨어 있는 사람이 되자. 십자가의 행악자처럼 늘 예수에 깨어 살고, 그의 나라도 사모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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