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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청년주일

관리자 2023-03-07 (화) 23:38 1년전 913  

본문) 요 18:28~40, 사 60:9-14, 빌 3:17-4 : 1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경칩(驚蟄)도 지났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나 벌레들 등 만물이 깨어 일어나는 계절이 된 것이다. 우리 농부들도 점점 분주해지는 때이다. 이런 자연의 새로운 변화에 따라 우리나라와 백성들 모두의 삶에도 긍정적인 변화의 삶들이 개화되기를 소망한다.  


교회력에 따르면, 우리 주님께서는 고난의 현장에 깊숙이 들어가시는 때이다. 지난 두 주간에는 그의 제자들이 스승 예수를 배신하던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셋째 주일인 오늘에는 그 관심의 대상이 고난의 당사자이신 예수 자신에게로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 이제는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관정(官庭)에로 넘겨져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한다.  


유대교가 예수를 체포하여 로마의 총독에게 넘겨준 이유는, 사람을 죽일 권한 없는 자기들을 대신하여 ‘예수를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장 흉악한 정치범에게 내려 질 십자가형(刑)으로 죽여 달라고 했다(19:6). 그래서 빌라도에게 넘어 온 예수에 대한 죄목(罪目)은 예수가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33-35, 5:18절 참조). 그러면 이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죄목이 왜 그리 중요했나? 당시에 로마제국의 식민지 하에서의 왕의 행세나 반란자는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자체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反逆)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를 심문하게 된 빌라도의 첫 질문은 당연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였다.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올린 송사(訟事)가 사실인지를 본인으로부터 직접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그때 예수님은 비로소 빌라도에게 당신이 진짜 왕이심을 공개하셨다(36-37절). 이는 예수께서 로마 제국과 이방 세계의 대표자 앞에서 자기를 공포(公布)하신 마지막 계시(啓示)였다.    


그런데 그가 진짜 왕이라면, 그에게는 백성이 있어야 하고, 영토가 있어야 하며, 나라를 유지할 법과 윤리가 있어야 당연했다. 빌라도는 그 점이 궁금했다. 이 점을 헤아리신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자청하여 당신의 나라가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이며, 당신의 백성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상세히 진술하셨다. 이런 주님의 증언은 지금 그를 구세주로 믿고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중요한 내용이기에, 우리 모두 깊이 경청하고 가슴에 새겨 두어야만 한다. 


먼저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셨다(36절). 이는 당신의 나라가 세상과 같지 않음을 고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진리(眞理)를 전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당신은 거짓이나 위선이 아닌 진리만을 말씀하는 이시고, 당신의 백성들은 그 진리를 듣고 실천하며 사는 세상 모든 사람들임을 밝히셨다(37절). 그러자 빌라도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진리가 무엇이냐’(What is truth?‘(38절). 

   

그 순간 빌라도가 확인한 바가 있었다. 재판관인 자신은 진리에는 무지한 자라는 사실과 함께, 피의자인 진리를 말하는 나사렛 예수는 도리어 ‘무죄(無罪)한 자’라는 점을 인지한 것이다(38절,하). 그럼에도 그 재판을 끝내야하는 그의 결론은, 그가 왕이라는 데에 초점에 맞추어서 정치적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왕은, 어떤 왕이 되었건, 살려둘 수 없다는 취지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 정치인인 그에게는 진리의 편에 설 힘이 없었다. 그 바람에 결국 예수는 십자가 처형에 넘겨지게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수용하셨다. 저항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하여 열릴 진리의 세계의 결론과 열매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보여 줄 것이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가슴에는 마치 씨를 뿌린 농부가 그 이후에 전개될 새 세상을 보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는 그 모습으로 당신의 몸 전체를 내어 놓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진리는 과연 무엇이었나? 그의 진리는 한마디 말이 아닌 그의 생 전체로 입증된 것들이다. 


1. 복음서 / 요 18:28-40 / “ 내가 왕(王)이니라.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


분문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자신이 왕임을 밝히신 예수님께서, 그에 따른 세부적(細部的)인 내용을 밝히신 것들이 소개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당신이 왕으로서 가진 왕도(王道)였다. 즉 왕의 도리, 왕의 길과 법도였다. 그것이 무엇이었나? 


예수께서 가지신 왕도(王道)는 바로 ‘진리(眞理)’였다. 빌라도 같은 거짓과 눈치 속에서 사는 왕들에게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그런 차원의 왕도를 보유한 왕 예수였다. 실재로 예수의 말씀과 인격을 접한 빌라도는, 그 자리가 자신이 예수를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자기가 재판을 받고 있는 자리라는 묘한 감정을 피할 수도 없었다.  

     

특히 예수의 이 증언, 곧 ‘당신은 그 진리를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기에,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라는 말씀에서는(37절), 예수는 그 왕도인 진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죽음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있으며, 그러기에 그 시간도 예수는 고발당한 신분이 아니라 고발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고발한 모든 유대 종교인들과 세상의 왕들을 심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셨다! 이 점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신 바 있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이 시점에서 이제 우리는 진리가 왕도임을 이 세상에 오셔서 줄기차게 펼쳐 보이신 그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던 지를 잠시 추스려 보아야 되겠다. 그 분은 진리를 탁상에서 거론하신 분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삶으로 친히 보여주시고 사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이 삶에서 진리를 보여주지 못하고 살았던 유대교도들에게 매우 질시와 미움과 배척을 받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삶에서 증언한 진리의 모습은 대략 어떤 것들이었나?  


예수님의 모습에는, ‘세상은 이렇게 가야하고,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된다’고 줄기차게 가르치고 생활로서 보여주셨던 가치가 있었다.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늘의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곧 힘센 자 중심이 아닌 약한 자 중심이었다. 의인이 아닌 죄인부터 살리시려는 방식이었다. 건강한 자 중심이 아닌 병든 자 중심이었다. 한쪽만의 승리가 아닌 양쪽 모두의 승리 방식이었다. 하나님 사랑만이 아닌 인간 사랑도 함께하는 방식이었다. 정죄가 아닌 회복이었다. 억압이 아닌 격려였다. 따돌림이 아닌 함께였다. 한마디로 정의, 평화, 생명의 축을 견고히 이 땅위에 세우시고자 하신 방식이었다. 그게 바로 예수가 왕도로서 취하신 진리의 굵은 실체였다.


성부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이시면서 생각하신 뜻은, 바로 그들을 온 세상에서 ‘큰 나라와 큰 백성으로 세우시는 일’이었다(신4:6-8절). 여기에서의 ‘큰’이란 표현은 국토나 인구나 광물이나 군사력 같은 가시적인 큰 것이 아니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에서, 그리고 생각과 마음에서 큰 백성이었다. 그래야 그들이 온 세상을 품고 도우며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영어로는 ‘big’이 아니라 ‘great’였다. 

    

생각해보라. 인류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이들이 누군가? 성서의 인물인 모세와 예수였고, 그들이 전달한 율법과 복음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세와 예수는 그 배후에 제국인 이집트가 있었고, 로마가 있었다. 애굽은 처음에 연약했던 모세와 그의 백성을 지배하였고, 로마는 예수와 그의 백성을 통치했다. 심지어 그 제국들은 이 두 위인들을 죽이려고 했고, 또 실재로 죽였다. 하지만  그들 제국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 율법과 복음을 가진 모세와 예수의 품에 안겼고, 그들에게 경배를 드린 자들이 되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제 비참하게 망했던가? 그들 제국에게 매달렸을 때였다. 여호와가 가장 경계하셨던 일인 제국의 옷자락에 매달렸을 때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매달리다가 그 앗수로에게 참담히 짓밟혔고, 유다가 바벨론과 애굽에 매달리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다가, 바벨론에 참담하게 무너졌다. 그게 실재 이 세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우리 분단의 고통에 신음하는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해법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북한은 원수요, 미.일은 친구>라는 현 정부의 논리와 행태가 해법일까? 이런 힘의 논리나 이념 대결이 과연 우리를 자유하게 할 해법이 될까-? 그들을 향한 지금의 굴욕적인 접근은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국방, 경제, 외교에서의 국력 손실은 천정부지이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고 있는 우리의 자존심은 너무도 비참하다. 왜 우리가 그들 나라에게 목을 매야하는가-?


전쟁 연습에 투입되는 경비의 일부만이라도 북한과의 관계회복과 신뢰를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 7천만 백성들은 여유롭게 어깨 펴고 세계 일류국가를 노래할 것이다. 남북은 하나 될 때 강해지고 함께 영화를 누린다. 경제문제, 일자리문제, 출산문제, 역사문제 다 해결될 것이다. 이 길은 분명 쉽지 않지만, 그래도 기도하며 가야 되는 길이다. 이게 결국은 지름길이다.


한국교회의 매우 불행한 현실은 우리의 신앙이 세속 정치의 이념(理念)의 틀에 완전히 갇혀 있는 일이다. 조국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려는 일은 그 자체가 진리와 생명인데도, 이 문제를 이념의 편 가르기로 접근하고 있다. 평화 통일 문제에는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빨갱이냐 아니냐’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남북 분단문제의 해결는 정치권에만 맡길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와 종교인과 시민사회가 함께 그 해결위해 앞장 서야할 일이다. 


이 점에서 관한 주의 말씀을 보자. 광야 40년을 마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때, 여호와는 모세에게 특별 명령을 하셨다. 주변에 흩어져 사는 동족과의 전쟁이나 마찰을 엄중하게 금지하신 것이다(신2:5,9,19 참조). 이런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 분단으로 고통 하는 우리나라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엄수해야할 진리요 지상명령이 아니겠는가! 


동족의 문제는 반드시 서로 평화로이 해결할 과제로 삼고 접근해야지, 원수 관계로 보면 잘못된 시각이다. 만일 동족전쟁이 또 다시 발생하면 어찌될까? 누가 지고 이기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가장 부끄러운 민족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남북이 함께 가까워지면, 주변 나라들이나 온 세계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지만, 우리끼리 서로 싸우면 우리는 그들의 종속 국가가 되고 말 것이다. 옆집 일본은 더욱 그러길 바랄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진리의 빛을 발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명 공동체이다. 세상이 하는 일이 진리에 맞으면 협력하지만, 불의를 행사하면 저항해야 한다. 진리는 중심을 잘 잡은 자들의 몫이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인식의 내용이자, 한결같음, 성실함, 기댈 수 있는 현실을 말한다. 민족의 하나 됨은 만고의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다. 교회가 필히 주도해야한다. 


2. 구약 / 사 60:9-14 / “ 너를 괴롭혔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본문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과 위로의 말씀이다.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외면하고 이방 우상종교에 심취하고 강대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그 징벌 기간이 끝나면서 회복의 문이 열린 것이다. 곧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리의 삶에 들어서자, 그때부터 세계의 중심이 될 모습을 예고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과 마음을 드러내기를 소원하는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진리를 드러내는 백성들에게 세상의 모든 사람, 경제, 안전, 영화, 명예를 누리도록 모아 주신다. 그 점에서는 특별한 민족이나 백성은 없다. 그야말로 예수의 진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면 누구나, 택한 백성의 영화와 축복을 누리게 해 주신다. 본문은 그 구체적인 약속들이다.  


3. 서신서 / 빌3:17-4:1 /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우리를 본받은 자들을 눈여겨보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들을 향하여 매우 담대한 요구를 한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러면서 당신을 본받아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들도 눈여겨볼 것도 권한다(17절,고전11:1).


이 요구의 배경에는 그곳 빌립보교회 안에 율법주의로 무장한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여, 할례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면서 그곳 이방인 교우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면서 교회에 막대한 피해를 준 일 때문이었다. 그러자 바울은 교회와 복음을 지키기 위한 배수진으로서, 양측의 삶의 모습을 비교해 보도록 교우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예수의 진리가 누구에게 나타났는지, 바울에게인지 율법주의자들에게 인지를 비교해서 선택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아 율법주의자에서 복음주의자로 바뀐 바울에게는 항상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 가득했다. 교회를 살리고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기도와 눈물과 시련이 끝이 없었다. 그래도 감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므로, 지금의 빌립보교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행16장참조). 


교회에 이렇게 진리의 사람, 확실한 천국 시민권을 보유한 이들이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보여 줄만한 진리와 믿음을 보유한 이들을 들어서, 교회를 지키고 그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o 오늘은 마침 총회제정 청년주일이다. 우리는 진리의 사람이 되어 살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요14:16—17,15:26), 진리를 보여줄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예수와 동행이 가능하다. 진리의 사람은 세상과 진리를 모르는 자들로부터 비난이나 미움과 배척도 받는다. 진리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못하는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드러내는 모습에 시기와 질투를 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리의 편에 서야 한다. 거기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에게는 다시 오실 주님께서 입혀 주실 하늘 영광의 변화된 형체를 입게 될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주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들께 충만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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