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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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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2-11-22 (화) 14:29 2년전 950  

본문)  단 3:13~28, 마 10:16-33, 계 18:21-24


오늘은 대림절 셋째 해의 첫 주일이다. 날씨는 초겨울 치고 비교적 원만한데, 세상 일기가 더욱 싸늘한 느낌이어서 안타깝다. 새 대통령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지금의 우리나라는 완전히 퇴진파와 옹호파로 첨예하게 양분되어진 느낌이다. 이런 역사는 처음이라서, 한없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대통령 자신도 정치력이 없이, 정치적 대치자들에게 오로지 강경한 대처의 입장만을 취하는 것 같아서 매우 우려된다. 특히 남북관계 악화도 더욱 우려스럽다 


대림(待臨)은 분명히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고대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기다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인간의 온전한 삶이 어떠해야 되는 것인지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존재로 살아야 되는 지를 매우 자세히 가르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그의 사역을 위탁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남기시고 하늘 본향 길로 떠나셨다. 


그 바람에 오늘의 우리의 대림절은 다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되었다. 첫 번째 대림은 회개와 구원(救援)이 목표였다면, 두 번째 대림은 심판(審判)의 때가 되리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내용에 따라 –지난 주 마25장의 말씀처럼 – 오른편과 왼편에 설 자들을 판가름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의 무게나 의미는 크다. 언제 그 날이 임하든, 항상 그 날을 기다린 자처럼 맞이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오늘 대림절 첫 주일의 말씀들은 대체로 하나님을 향한 그의 백성들의 준비되고 깨어 있는 신앙을 격려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면서 어떤 내용의 신앙인이어야 마지막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자들이 될 것인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세 본문이 보여주려는 최고의 신앙인의 모습은 이 세상 어떤 권력의 힘에서도, 박해와 탄압과 조롱과 박해 앞에서도, 세상의 경제, 문화, 예술의 화려한 유혹 앞에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의 순결을 지켜낸 이들이었음을 알린다. 


구약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이야기는 신앙의 힘이 모든 힘 중에서 가장 센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내용이다. 그 때 그들 세 친구를 덮쳐 온 세상의 힘은 대제국 바벨론의 우상종교의 힘이었고, 왕의 고압적인 압박과 그의 제의를 거절할 때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앗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오직 여호와였다. 그들의 그런 세속적인 자랑들을 일거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로 있겠다는 것이었다. 

   

복음서의 예수의 제자들을 향한 말씀도 매우 긴장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 당신의 부름에 따라나선 제자들(사도들)과 그의 백성된 이들에게, 당신 이후의 교회 박해시대를 어떻게 대응하며 끝내 살아남아 하늘 아버지 앞에 서게 될 것인지를 매우 소상하게 훈련시킨 일종의 교안(敎案)과 같은 내용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 교육내용은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신앙 내용을 참조로 삼아서 주신 것처럼 느낌도 준다. 승리의 방식이 같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내용은 그 시련의 마지막에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질 최후의 모습들을 보여준 것이다. 세상의 억압자요 의로운 이들을 살해해온 큰 성 바벨론(로마제국)과 그를 추종하며 세상 삶을 즐기던 아류(亞流)들에게는 비참한 심판의 결론으로, 하지만 그들에 의해서 억압을 당하고 피 흘림을 당하여 이 세상을 떠났던 의인들과 성도들에게는 생명의 부활(피가 발견됨-24절)로 정리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곧 세상에서 웃던 자들은 슬피 울게 하고, 억울함으로 통곡하던 이들은 영원한 위로가 부여되는 모습을 약속한 내용이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큰 위기에 봉착했다는 경고음이 크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예배가 3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적잖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집회 참석에 소극적이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전광훈을 비롯한 거짓 예언자들의 정치적 광폭 행보와 이 악령의 영향을 받은 교회 지도자들의 무분별한 행보와 일그러진 모습들로 인한 교인들의 실망과 신뢰 추락 등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해방 후 처음으로 성장이 크게 퇴보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다가 앞에서 말한 국가 최고지도자의 난감한 처신으로 인한 국론분열이 겹치면서 우리는 또 다시 목마른 가슴으로 다시 주님의 대림절을 맞는다. 특히 무속신앙에 푹 빠진 듯한 대통령 부부의 처신(?)은 우리 국가 미래에 큰 우려를 안겨준다. ‘마라나타’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여, 어서 오셔서, 나라를 정상화시켜 주시고, 남북관계도 회복시켜 주시며, 한국교회의 부흥도 이끌어 주시라는 기도의 마음으로 우리는 이 주님의 대림절을 맞고자 한다.  


사실 본래 교회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부침(浮沈)을 계속해 왔다. 정치와 시대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 집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 신실한 주님 예수이시다. 변덕이 없고, 우리가 타락해도 그 분은 그의 구원과 심판의 역할을 신실히 집행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주님을 확실히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된다.  


1. 구약 / 단 3:13-28 /  “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 


본문에 나타난 세 사람의 주인공들인 사드락-메삭-아벳느고는 바벨론 제국에 포로 되어 끌려왔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친구인 유대인 다니엘의 추천을 통하여 지방 일을 맞아서, 바벨론의 일을 하던 관리들이었다(2:49). 다니엘은 그의 탁월한 지혜에 매료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나라의 최 고위직의 일원으로 임명되어 일하는 중이었다.   


문제는 왕이 당신의 권위를 대변할 금 신상을 만들어서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 같은 각종 악기가 소리를 낼 때는 모든 백성은 즉시 그 앞에 엎드려 절해야 되는 법령을 만들고, 위반자는 즉시 체포되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도록 하는 법령이 공포된 일이었다.(3:4-5절 참조). 그 때의 이들 세 사람들은 기로에 섰다. 하나님의 법(출20:4-5)을 좇을건가, 바벨론 법을 좇을건가? 그들은 분명했다. 우상숭배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랐다.


그들은 결국 갈대아인들에 의하여 고발되어, 왕에게 끌려 나와서 심문대에 섰다(8,13절). 평소 그들을 총해했던 왕은 이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면서, 신상에게 절할 것을 회유하기까지 했다(15절). ‘저 맹렬히 타는 풀무 속에서 너희를 건져낼 신이 누구냐’라며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은 단호했다. 전혀 두려움이 없이 왕에게,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저 풀무불 속에서 건져내시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이지만, 혹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은 결코 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터이니, 그런 줄 아시라고 통보했다(17-18절). 


그 말에 격분한 왕은 그 풀무불을 평소보다 7배를 뜨겁게 하면서, 저들을 결박해 그 속에 던졌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들을 데려가던 용사가 오히려 태워 죽는 일도 발생하였다(22절). 더 놀라운 일은 그 풀무불 속에서는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상하지도 아니한 듯했고, 낯선 넷째 인물의 모습은 신(神)들의 아들처럼 보였다(24-25절). 실제 불러서 나온 그들은, 몸이나 머리털이나 겉옷이나 완전 멀쩡하였다. 불에 탄 냄새도 없었다. 왕과 모든 신하들이 그 기적을 함께 확인하였다(27절).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나왔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신에게 절하지도 아니한 그의 종들을 구원하셨다면서 그 여호와를 찬송한 것이다(28절). 이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하나님의 능력인가-! 


결국 그때부터 바벨론에서의 유대인들은 그 제국의 왕의 명령에 따라서, 그 나라의 기존 종교들과 나란히 자신들의 신인 여호와를 향한 종교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공적이고 국가적인 승인을 받아내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그 후의 다니엘의 사자굴 사건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그곳 제국에 확인시킨 일이 되어서, 바사(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선 원년엔 고레스 왕의 특명으로 유대인들이 고국의 귀향길에 오르게 하는 자산들이 되기도 했다고 보인다. 

( ☞ 동시에 이들의 우상 신상을 향한 숭배거부는 주후 첫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의 황제 신상 경배거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계13:14-15 참조). ) 


2. 복음서 / 마 10:16-33 / “ 누구든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의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


이 세 사람의 유대 신앙인들이 이방의 땅인 바벨론에서 보여주었던 탁월했던 신앙인의 모습은 오랜 후,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派送)하시는 바로 그 때에, 그들이 취할 행동 지침으로 되살아났음을 생각나게 해 준다. 본문의 내용 전반이 그렇다.   

여기에서 주님은 당신이 보낸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당할 것을 내다보시면서, 이런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면서, 그러기에 ‘뱀 같이 지혜롭고 비들기 같이 순결(純潔)하라’는 양 날개 중심의 행동을 요구하셨다.(16절). 이는 매사에 이치와 순리를 좇아 행하되, 난관에 부딪쳤다고 해서 간교한 속임수를 취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 담백하고 당당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이었다. 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말이다.   


1) 먼저 사람 조심을 일깨우셨다(17-18절). 그들이 너희를 배신하고 당국에 끌어갈 것이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형제도 있고,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21절). 


2) 하지만, 두려워하거나 염려는 말아야 된다.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을 말할까도 염려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인 성령을 보혜사나 변호사로서 그런 종들에게 따라 붙여주셔서 순간순간을 돕고 대응하게 해 주실 터이기 때문이다(19-20절, 26절, 마28:20 참조). 따라서 그 때 그 순간 유의할 것은 인간들에게 받는 미움의 공세에도 흔들림 없이 견디어내어야만 하는 일이다. 까닭은 바로 그 너머에 대망의 구원(救援)이 있기 때문이다(22절). 


3) 그러면서도 주님은 제자들이 주어진 고난의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안들을 안겨 주셨다. 그것은 ‘우리 스승(예수)이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 나의 이 고난은 아주 가볍고 헐거운 것이다. 우리 스승님은 사람들로부터 ’왕 귀신 들린 자’라는 공격까지 받았지 않았나-!‘를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24-26절, 막3:22 참조). 

- 사실 주님의 이 말씀은 후에 사도들과 숱한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박해와 고문과 처형당하게 되면서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추억하고 이 말씀을 의지하면서 그 박해를 견디게 한 방패막이가 되기도 했다. 저 유명한 베드로의 순교의 길을 전하는 ‘쿼바디스 도미네’도 그랬다! 


4) 주님의 복음 전파로 인한 박해자와 고난자를 향한 미리 돕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고난을 견디게 될 사람들의 영적 마음과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는 문제였다(27-31절). 그들은 ‘비록 몸은 죽여도 자기의 영혼까지는 죽일 수 없는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함께 영혼까지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그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행동하면 된다는 점이다. (반드시 세상과 어둠의 권세가 주는 두려움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동시에 인간이란 귀한 존재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신 하나님이 허락이 없으면,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지켜질 것이고, 혹 그 과정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으로 알고 겸손히 ‘아멘’으로 받으면 된다는 말씀이다. 이런 마음은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왕을 향한 최후의 통보와도 같은 내용으로도 보인다(단3:18절 참조).  


그렇게 끝까지 견뎌내어서 하늘 아버지 앞에 서게 되는 자는 주님의 영접을 받게 된다. 만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주님을 부인하게 되면, 그는 심판대 앞에서 주님으로부터도 부인을 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32-33절 참조). 실로 영원한 갈림길을 보게 하는 장면이다. 나의 지금은 어느 곳을 향해 살아가는가!   


3. 서신서 / 계 18:21-24 / “ 큰 성 바벨론이 다시 보이지 아니하고,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 ”


본문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끝내 생존할 무리들이 누구냐에 대한 증언이다. 그 대상은 원래부터 하늘에 존재하는 무리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에 심판대를 통과해서 들어온 무리들이다. 그러기에 그 날과 그 때를 대비하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할 현장 증언일 수밖에 없다. 과연 그곳에서도 발견되어 살아남게 될 자가 누군가?  


1) 그곳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자들’이 먼저 소개되어 있다(21-23절). 큰 성 바벨론이 사라졌다. 그곳은 누군가? 온 세상의 권세를 좌지우지한 로마 대제국이요 그 권세들이다. 그들이 하늘 심판대에서 바다에 던져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거기에 기생하여 세상에서 잘 나간 삶을 살던 예술인, 기업인, 상공인들도 사라졌다. 귄세를 누리던 세도가들과 사술로 만국을 미혹해온 복술인(점쟁이)도 사라져 안보였다. 세상 빛이나 결혼식도 그곳엔 보이지 않았다.   


2) 그런데, 그 안에서 ‘발견된 자들’이 있었다(24, 20절). 그들은 세상에서는 제대로 살지 못하고 미움과 죽임을 당하고, 그것도 각종 오명을 써서 억울하게 제거된 바 있던 자들이 바로 하늘 영원한 성에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선지자-성도들-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들이 바로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의 피(생명)가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고 있었다(창4:10참조). 이 부분은 피의 중요성과 보전성이 강조된 이유이기도 하다(신12:16, 23-25참조).  


o 우리는 다시 재림절을 맞는다. 어떤 주님이신가? 다시 오실 심판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삶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선택받고 파송 받은 하늘 백성들이다. 이에 우리는 하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 심판은 엄중하고 공정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지혜와 순결로 예수의 삶을 본받고 증언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자. 그런 것은 영생의 삶과는 전혀 무관하다.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영혼으로 살자. 그런 삶을 추구할 때, 보혜사 성령의 도움이 임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의 짧은 인생이 하늘의 영생하는 인생으로 영접 받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니, 거기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힘쓰며 살자.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람들에게 항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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