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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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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2-11-09 (수) 00:03 2년전 949  

본문)  왕상 8:12~30, 마 12:1-8, 고전 3:10-17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이다. 겨울에 들어선다는 입동(立冬)도 지나면서, 거리에는 낙엽 천국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지난 주간에 발생한 이태원 대 참사(慘死) 사건으로 온 나라가 슬픔과 분노와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에, 이런 자연이 안겨주는 감동을 제대로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래도 지금처럼 어수선한 때에는 기도해야 하는 때로 보인다. 조물주가 안겨 주실 메시지를 붙잡아야 마음의 중심이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디서 무엇을 기도할까? 사실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제사하며 지낸 역사는 아주 오래다. 창 4장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하나님 찾기와 예배하기는 원초적 역사를 가졌다. 본격적인 관계 맺기는 노아 시대를 거쳐, 아브라함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제사한 일은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서 제단을 쌓고 이루어졌다(12:8 참조). 그 때는 목동이자 나그네 여정의 삶이어서, 고정된 땅이나 집이 없어서 그야말로 발길이 닿는 대로,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고 지냈다. 그러기에 생활 속의 예배요 여호와와 동행하는 순례자의 예배였다. 당연히 고정된 여호와의 성전이나 집은 없었다. 야곱의 경우도 노숙(露宿)하던 벧엘에서의 경험이었다(창28장) 


하나님께서도 그런 제사를 즐겨 받으셨고, 필요시는 당신이 직접 그 족장들을 찾아주시기도 하셨다. 애굽에서의 오랜 종살이 때에는 어땠을까? 거기에서도 제도적인 회당이나 성전을 상상하기는 불가하다. 다만 여호와에 대한 신앙에 따라, 각자의 집이 가장 합리적인 예배 공간이었으리라 본다. 바로의 학대에 대한 탄원의 기도도 역시 히브리인들의 가정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런 백성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주도하는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때는 40년의 광야 생활부터였는데, 그때의 예배처는 메고도 이동할 수 있었던 회막(會幕-거룩한 천막)이었다. 


이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는 지방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둔 성소(聖所)를 두고 경배 생활을 한 후에, 사사 시대와 초기 사울과 다윗의 왕조 시대를 거쳐, 드디어 솔로몬 왕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시온)에 중앙 성소로서의 성전(聖殿)에 봉헌되었다. 결국 이스라엘에는 3대 성전이 존재했는데, 이 솔로몬 성전이 처음 것이었고, 바벨론 포로 후에 귀환하여 재건한 스룹바벨 성전이 두 번째 것이었으며, 후에 헤롯왕이 세운 헤롯 성전이 세 번째 것이었다. 


그후 이스라엘은 평소에는 각 지역에 있는 회당(會堂)에 모여서 예배는 물론이고 재판과 행정업무 등을 집행하기도 했으나, 3대 절기인 유월절-칠칠절-초막절에는 전국에 있는 13세 이상의 남자들은 중앙의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하며 올라가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생활을 지속해 왔다(신16:16참조). 그만큼 모든 유대인들에게 성전(예루살렘)은 그들의 신앙의 거점이며 영적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요4:20). 하지만 그곳이 사실상 이권(利權)을 챙기는 타락의 장소처럼 변질되자(요2장 참조), 그 수명이 끝나게 된다. 그 개혁의 주도자는 바로 나사렛 예수이셨다. 


본래 예루살렘 성전은 회중이 모이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이었다(출26:1,민17:13,수22:19 참조). ‘성막’으로 옮긴 히브리 낱말이 바로 이를 뜻한다. ‘계실 처소’(왕상8:13)였고, ‘거하시는 곳’(대하36:15)이요, ‘여호와의 집’(삼상1:7,시23:6)이었으며, ‘여호와의 성전’(렘26:9,왕하22:8)이었다. 솔로몬 성전은 현관-성소-지성소의 세 부분으로 된 길죽한 건물이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었고(왕상8:21), 그곳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첫 성전은 주전 587년의 바벨론 침공 때 파괴됐고, 515년에 다시 지어졌다. 


헤롯에 의해 46년에 걸쳐 건립된 세 번째 성전은 새 건물로 대체되었는데, 특징은 바깥뜰을 엄청나게 넓혀서 누구든지 비유대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고 각종 모임을 가능하게 했다. 광장 한쪽에는 환전상 및 제물로 드릴 짐승들을 파는 장사꾼들의 판매대가 있어서, 예수님으로부터 ‘기도하는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며 환전상을 뒤엎고 쫓아내시면서, ‘이곳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야단을 치셨던 그런 곳이었다(요2:14-21참조).  


그런 타락한 헤롯 성전,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았던 예루살렘 성전은 결국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철저히 파괴되어서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다. 다만, 그 역사의 유물로 지금까지 ‘통곡의 벽’만이 남아서, 그 때의 비극을 엿보게 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의 세 본문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안겨 주려고 하는가? 


그런 제사와 성전의 변천사를 참고로 하면서, 솔로몬에게서 시작된 성전의 의미도 되새기고, 그 성전이 예수님을 통하여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하였음을 알린다. 곧 보이는 육중한 건물로서의 가시적 성전 시대가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성전에 눈을 뜨게 하신다. 즉 성령과 진리가 기반 된 영적 존재들과 공동체로서의 교회란 성전에 눈을 뜨게 하신다(요4:23-24 참조).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된 우리가 어떤 믿음의 대응을 해야 하는 지도 일깨우려고 하신다. 


1. 구약/ 왕상 8 :12-30 /  “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첫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의 봉헌식 장면이다. 이 건축은 솔로몬 개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삼하7:12-13). 이 봉헌식은 그 동안 다윗 궁에 모셔있던 여호와의 궤(법궤)와 광야시대에 사용되었던 회막(성막)과 모든 기구들이 이 새 성전으로 옮겨져 옴으로서 매듭을 짓게 된 예식이었다.(8:1-5참조). 국가적 대행사였다! 


이 예식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인간 왕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치하(治下)의 백성들임을 공인하게 되고, 동시에 온 백성들도 이 성전 중심의 하나 된 신앙체임을 확인 받게 되었다. 실로 이스라엘이 명실공이 신정(神政)국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에 들어섰음을 온 천하에 공포하는 예전이었다. 그런데 이 예전의 압권은 역시 왕 솔로몬의 연설과 기도였다(대하6:3-40 참조).     


1) 솔로몬은 그 성전을 ‘주가 계실 성전’이요 ‘주가 영원히 계실 처소’라고 규정하였다(12절). 2) 그는 백성들을 향하여, 그가 아버지 다윗 왕을 대신하여 이렇게 자신이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15-20절). 성전 건축의 첫 의지는 다윗에게 있었다. 하지만 다윗의 그 뜻을 아신 여호와는 그런 다윗을 축복하시고 기뻐하셨으나, 그 건축은 다윗이 아닌 그의 후손의 손으로 하도록 정리해 주셨다. (그 까닭은 다윗은 그 동안 숱한 싸움들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에, 당신의 성전 건축은 깨끗한 손을 가진 그의 후손에게 넘기셨던 것이다.)  


3) 여기에서 매우 주목(注目)할만한 증언이 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전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성전을 ‘당신의 이름을 둘만한 집’으로 표명하신 일이다(16절). 곧 ‘당신의 이름을 위한 성전’이 성전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이 된 것이다(18-20절).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어느 한 곳에 당신의 집과 처소를 한정한다는 점은 매우 생경(生硬)한 느낌을 준다. 그런대도 여호와 자신도 이런 표현을 허용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들을 위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이 점에서는 솔로몬 왕이 그 햇갈림을 예방하고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27절). 중요한 점은 이름을 둘만한 집이요 공간이다. 성역이요 방향이다. 본체가 영이신 여호와는 그 좁은 한정된 곳에 제한될 분일 수 없다. 그럼에도 그 크신 분은 어느 지점에 이름만을 걸쳐두셔도, 인간들에게 미치는 그곳의 영향력을 지대하다.  


성도들이 예배하는 처소로서의 성전을 중시하는 까닭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곳에만이 하나님이 꼭 계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소요 그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요 그에게 예배와 기도가 올려지는 성역이며, 함께 주를 섬기는 무리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처소이기에, 그토록 귀중하게 구별된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자기 집 건축보다는 주의 성소 건립을 더 우선시한다. 저 아메리카 청교도들의 뜨거운 신앙도 그런 믿음에서 나온 것 아닌가!  


4) 솔로몬은 그 성전 안의 한 처소에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법궤도 모셨음을 밝힌다(21절). 

5) 솔로몬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시작되었다(22-26절). 그 내용은 상천하지에 여호와와 같은 신이 없다면서, 그에게 충성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임을 찬양한다(23절). 특히 주의 종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날같이 지키셨음을 고백하며(24절). 주의 종 다윗의 씨에서 이스라엘 왕을 잇는 일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그 약속을 꼭 지켜달라고 간구했다(25-26절 참조).   


5) 그리고 솔로몬은 ‘내 이름이 항상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인 이 성전’을 향하여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했고, 주의 백성도 자기처럼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도 주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셔서 응답하여 달라고 빌었다(28-30절). 솔로몬의 이 기도에는 하나님의 눈은 기도하는 자를 향하신다는 깊은 믿음이 담겨 있다. 추후 그의 이 기도는, 저 다니엘의 경우처럼, 그의 백성들의 기도하는 방향까지 지시했다고 본다. (단6:10 참조) 


2. 복음서 / 마 12:1-8 /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


유대인들의 성전 사랑을 유별나다. 엄격한 안식일 개념과 맞물려서, 그들의 성전관은 매우 신성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이러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선언으로 그들과 강하게 맞서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나다!!’(6절). 이는 실로 그들 유대인들에게는 폭탄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선언의 충격과 파장은 엄청났다. 새로운 성전관(觀)이 예수로 인하여 등장한 연고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쩌자고 그런 선언을 하셨는가? 


1) 건물이나 외관(外觀) 만으로서의 성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이 못 된다는 입장이 예수님의 성전이해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확인한대로,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이름을 위한 곳이다(왕상 8장 참조). 그러기에 성전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펼쳐지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죄인에게나 병자들에게나 배고픈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공급처가 되어야 한다. 그런 본질적인 힘이 없이, 겉모습만의 권위로 사람 위에 군림하려거나 제재하면 안 된다.  


2)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나사렛 예수보다 성전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이 점 때문에 예수께서는 담대히 ‘당신이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큰 자’라고 선언하신 것이다(6절). 게다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까지 선언하셨다(8절). 그 말씀도 그렇다. 성전의 전적인 기능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안식일을 온전히 기능하도록 받드는 데 있는데, 그 기능이란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할 때 나온다.  


그런데 성전이 하나님의 선물인 안식 기능을 퇴색시키고 필요와 궁핍을 채우며 부족한 부분을 돕지 못한 체 정죄만을 일삼거나 죄인을 양산시키는 기능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성전과 안식의 순기능에 역행할 뿐이다. 그런 점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과도 상충될 뿐이다(7절, 호6:6참조). 땅의 성전은 살아 움직이는 성전인 예수와 그의 삶을 좇아야 한다(13절). 예수 제자들의 행동을 질책하는 바리새인들의 성전관과 안식일관은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3. 서신서/ 고전3:10-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온 세계를 무대로 선교해온 사도 바울은 성전을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 중심으로 말 할 수 없었고, 특정 공간(空間) 중심으로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공간 중심의 성전 이해는 더 이상 성령의 뜻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면 세계 만민들이 바라볼 새 성전은 어디인가? 성전의 기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였다. 


1) 바울은 당신의 모든 선교와 복음 활동에 의해서 설립된 교회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세워진 공동체임을 말한다(11절). 그러면서 자신이 닦아 논 그 터를 기반으로한 동역자들의 모든 선교 활동들은 다 용인했다. 물론 방법은 다양하고 수고나 수준의 차이의 편차도 크겠지만, 거기에 따른 공적들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보았다(12-15절 참조). 하지만 예수란 터 자체를 부정한 그 어떠한 거짓 시도들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2) 중요한 것은 신자들과 그의 교회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과, 주의 거룩하신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신다는 점을 알고 사는 일이다(16절). 즉 성도와 교회가 바로 이동(移動)형 성전으로서,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사명자들 임을 알고 살아야만 한다. 보라. 세상 사람들은 건물 성전에 실망하지 않는다. 다만 성도들의 그릇된 삶과 행실에 실망하기에, 예수와 그의 교회까지도 외면하거나 등 질 뿐이다. 이게 우리가 정신 차릴 이유이다. 


3) 사도의 당부는 매우 엄중하다. ‘누구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그는 멸망을 당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에, 그의 성전 된 우리 역시 거룩한 삶이 되도록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17절). 내 안에 주님 계시고, 그의 말씀이 담겨 있으며, 성령이 내재하심을 명심하자. 



o 우리는 성전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여러 부류의 성전들이 있다. 보이는 성전, 곧 교회라고 불리는 예배당이 있다. 그곳도 소중하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을 함께 섬기며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성전의 본체이시고 터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는 ‘나’라는 존재와 우리란 공동체가 존립할 기반은 오로지 그 분 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자신과 교회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영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기반도 확고해야 한다. 이 인식이 내 삶의 품질과 내용을 정화시킬 뿐 아니라, 내 구원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공고히 심는 데에 폭넓게 기여하게 한다. 성령의 인도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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