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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남신도회주일

관리자 2022-09-13 (화) 09:59 1년전 246  

본문) 창 12:1~9, 요 8:53-59, 갈 3:1-14


창조절 셋째 주일이다. 마침 우리 총회는 오늘을 남신도회주일로 지킨다. 모든 교회의 강건한 뼈대를 이루고 있는 우리 남신도 회원을 생각하고 축복하며 제정한 주일이다. 오늘을 맞이하여 부디 남신도 회원들의 영적 위치와 역할이 더욱 확실해 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게다가 이번 주간은 본 교단이 경북 경주에서 제107회기의 전국 총회를 개최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 교단의 새 역사가 지난 1953년 6월 10일에 출범한 지, 벌써 70년에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총회는 <새 역사 70년, 주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소서>(창50:15-21,요13:31-35,엡4:3-4)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한국교회와 함께 하는 우리 교단도 많은 시련기를 보내고 있다. 부디 의미 있는 때를 보내면서, 우리 교단이 한층 성숙하는 때가 되길 기도한다.  


마침 오늘에 우리가 받게 된 세 본문 말씀은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관련된 기사로 가득하다. 이것은 이 창조절기 시작 무렵에서, 우리 신앙의 뿌리를 다시 재확인해 보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구원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구원의 핵심 내용인 믿음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를 다시 보고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구원을 안겨 주는 믿음-, 그 믿음은 과연 무엇이며 진정 어떤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믿음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성서의 또 다른 큰 상대적 축(軸)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율법(律法)이다. 법(法)이다. 믿음과 율법, 이 둘은 성경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 매체들로 서로 맞물려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믿음은 예수 시대를 맞이하면서 복음(福音)이라는 옷을 입고 더욱 확산되었다면, 율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전히 성도들의 생활의 규범으로서 통제력을 계속 행사해 왔다. 


마침 현재의 대한민국이 법 기술자들의 집단인 검사(檢事)시대에 들어가 있어서, 이 율법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력적인지를 우리가 엿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오랜 검사 권력의 공고한 카르텔에 도전했던 주역인 조국이 지금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잖은가! 지금도 그들은 여전하다. 대통령 부부와 그 일족에게는 무혐의(無嫌疑), 그리고 정적들에게는 기소(起訴)를 남발하면서, 자신들의 배타적 권력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계속 과시하고 있다. 


당시 유대 사회도 아주 오랜 세월을 율법지상주의, 율법 만능주의 체제 아래에서 지내왔다. 그것의 횡포를 깨려는 것은 정말 죽기를 각오해야만 했다. 그 일을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나사렛 예수가 맡으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모습으로 맡으셨다(요1:29). 그의 대응은 무력과 폭력이 아닌, 믿음과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법으로 맞서셨다. 그래서 당하신 형벌이 바로 십자가 처형당하심이었다. 최후엔 부활의 능력으로 맞섰다. 


하지만 이 생명과 구원의 캠페인은 저 완고한 유대 사회의 벽을 뚫어낼 수 없었다. 새 인물, 새 무대, 새 환경이 필요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넘어선 믿음의 법, 율법이 아닌 복음이 참 구원의 문임을 입증할 새 무대가 필요했다.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가 그래서 필요했고, 그런 예수와 그의 새 믿음의 법을 온 세상 만민에게까지 전하고 확산시킬 디아스포라들이 필요했다. 율법을 넘어선 믿음이 준 자유와 해방의 능력을 알게 된 새 인류(人類)들이 필요했다.   


오늘의 세 본문들은 이렇게 전개된다. 이런 믿음의 역사의 시작과 실상(창세기)과 그것을 잘못 받아들인 유대인들의 잘못된 대응과 그에 따른 예수의 도전과 마찰을 담아냈으며(복음서), 나중에는 흩어져 있는 교회 공동체 안에까지도 자리한 율법주의자들의 실상과 그 부작용의 모습, 그것의 대안으로서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환기시키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서신서). 


우리 남신도들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 공동체 속에서 매우 막중한 위치를 점하는 이들이다. 그러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그를 통한 이웃들이 함께 복을 받아야할 위치를 점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실체를 잘 배우자. 그리고 유대인과 갈라디아 성도들의 우에서도 벗어나자. 


1. 구약 / 창12:1-9 / “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호와 하나님의 새 인류 공동체 창조 작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벨탑 문화를 쫓던 인간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인물상을 창안해내시는 방법을 취하신 데에서 나왔다. 전자는 하나님 없어도 자신들의 힘만으로 생존할 수 있음을 지향하는 부류들이라면, 후자의 새 인류는 오직 창조주 여호와를 좇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주신 복을 누리고 전하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즉 ‘하나님 중심의 인생이냐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냐’로 확연히 갈린 것이다. 


본문에 등장한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의 인물상의 표본이다.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 일로 인하여 그가 받게 된 복은 어떤 것인지를 상세히 전한다. 우선 궁금한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실 때, 과연 ‘어떤 수준의 인물이었을까’라는 점이다. 자녀와 같이 완전히 믿음과 신뢰를 나눌 수 있는 자유로운 관계였을까, 아니면 종과 노예처럼 당신의 지시와 규제를 일일이 받고 사는 종속적 존재였을까? 


전적으로 전자(前者)였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이 결코 종이나 하인과 같은 존재이기를 원치 않으셨다. 완전히 믿음과 신뢰를 나눌 자유롭고 성숙한 존재이기를 원하셨다. 이런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믿음과 신뢰가 둘 사이에 가장 큰 법이 된 경우이다. (물론 그것이 깨질 때는, 계약 문서나 약정 문서 같은 상호 계약서가 필요해질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 법이 최상이 아니라, 믿음이 최상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수준은 예수의 제자들을 향한 관계 정립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기도하려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지시하셨다(눅11:2). 법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모든 관계가 유지되는 차원으로 하나님과 당신의 제자들을 격상(格上)시키신 것이다. 소위 아브라함의 수준처럼 제자들을 끌어올리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첫 걸음이 있었다. 비로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여호와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는 일이었다(1절).  


1) 무슨 의미인가? 혈육과 육정의 본능을 쫓는 힘이 아닌 말씀과 뜻을 좇은 의지의 인생 길에 들어서는 일이었다. 즉 육적(肉的) 인생이 아닌 영적(靈的) 인생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복하는 삶을 택하라는 지엄한 명령을 좇는 삶이었다. 인간의 계획표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구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삶의 선택이었다. 


2) 이 지시와 함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言約)이 하나 더 부여되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民族)을 이루고 네게 복(福)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2-3절). 이 언약의 내용에는 어떤 뜻이 있나? 


3) 먼저 아브라함을 복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다(2절). 복의 주도자다. 하지만 그 복은 혼자 누릴 복이 아니다. 땅의 모든 족속과 함께 나누어야만할 복이다(3절). 받기만 하고, 나눌 줄 모르는 그런 형태의 복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일종에 옵션과 패키지형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복은 세상 일반인들이 추구하는 복과는 차원이 아주 다르다. 받기만 하고 줄줄 모르는 탐욕이 자리할 수 여지가 아예 없는 복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이런 복이 자신에게 성사(成事)되려면,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의 절대 신임을 얻어야 한다. 힘과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사랑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한히 베풀어 주시는 복을 받아야 한다. 그런 후에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복을 나누며 전하며 사는 것이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래서 받은 자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5) 이는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 사항이기도 하다. 나중에 등장한 모세의 십계명(十誡命)의 핵심적 틀이기도 하다. 하나님 사랑(1-4계명)과 이웃 사랑(5-10계명)이 집합적 계명으로서의 십계명 말이다. 후에 예수께서도 이 십계명 준수가 영생을 얻게 하는 기본 조건임을 인정하실 정도였다(눅10:25-28참조).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런 복의 조건 제시에 ‘아멘’하였고, 그 자신이 여호와의 복의 진원(震源)지의 역할이 제대로 되도록 헌신한다.   


6)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그런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고 전하려고 선택받은 성민이었다(신28:9). 그러기에 본질적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 사랑에 열린 민족이 되게 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복을 담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받기만하고 줄줄 몰랐다. 세상 제국주의의 정체 체재에 물들 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다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징벌을 끊임없이 당하였다.  


7)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명분은 오직 혈통 자랑뿐이었다. 믿음을 저버리고 모세의 율법도 정신이 아닌 문자주의에 빠져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던 시절, 그래서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이 못되고, 도리어 당시의 법 기술자들인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인위적 법 해석으로 인하여 세상에 죄인들만 양산되고 있는 절망의 시절에, 나사렛 예수가 그들의 폭주(暴注)를 저지하고 만민을 살리시려고, 역사 개혁과 구원의 앞잡이로 등장하셨다.  


2. 복음서 / 요 8:53-59 / “ 예수께서 이르시되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


요 8장은 예수님과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의 가장 치열했던 영적 대결장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집단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맹비난하셨다(44절). 그들 가슴에 들어있는 연약한 이들을 향한 정죄와 그것을 비판하는 당신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들이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부르는 일에도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셨다. 그들에게서는 아브라함의 후손(後孫)다움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39절).   


1)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공세는 전혀 거침이 없으셨다. 생사의 위협을 초월하는 진리의 자유로움을 한껏 드러내셨을 뿐이다(요8:32). 그러기에 그의 압도하는 말씀에는 평소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한 의심과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 줄, 예수의 자기 증언이 풍성히 쏟아져 나왔다.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서로 영광을 돌리는 관계임을 밝히셨다(54절). 이는 삼위(三位) 하나님의 특별한 상호관계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이라고 밝히셨다(55절). 당신 역시 하나님과 같이 선재(先在)하신 분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58절). 


-아브라함과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낳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있는 자’이셨다(58절). 그 뿐 아니다.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던 그 분이셨다(출3:14- I AM THAT I AM). 아브라함은 그런 주님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주님의 세상 출현하실 때를 미리 알고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도 했었다(56절). 그런데, 그의 후손들임을 치부하는 그곳 바리새인들은 그런 예수를 전혀 몰라본 체, 오히려 미워하고 죽이려고 덤벼 든 것이다.

   

문제는 분명해졌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결코 혈육(핏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보여 드렸던 그 믿음과 그 의(義)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유대인은 실패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믿고 영접하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구원의 새 방정식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 고비를 넘고 있었다. 


3. 서신서 / 갈 3:1-14 /  “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니라 ”


이방인 교회인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유대인 교사들의 꾀임으로, 자신들의 구원이 믿음이 아닌 율법을 쫓아야 된다는 논리에 빠져들면서, 시험에 빠져 들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하면서, 다시금 확실한 구원관을 제시하며 그들의 회복을 도왔다(1절). 


1) 율법을 쫓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임 당하셔서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은혜를 완전 무효화시키는 일이다(1절). 율법에 의한 구원은 행위로 인한 구원관이기에, 용서와 회복을 바탕으로 한 죄인들의 구원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2) 성령을 주셔서 믿음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신 놀라운 은혜를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2-3절). 구원은 본질상 인간의 공로나 자랑을 배재한다. 은혜와 대속과 낮아짐과 겸손한 믿음으로 받는다. 따라서 율법 구원의 강조는 성령의 역사를 외면하게 한다(5절).   


3) 아브라함의 구원관과도 맞지 않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으로 오직 신실한 믿음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의롭다 인정받았으며, 하늘과 땅의 복을 받았고, 구원의 문을 연 주인공이었다. 또한 그의 ‘믿음 만으로의 구원’은 유대인은 물론, 모든 이방인들도 함께 율법 없이도 구원을 받는 일이 가능함을 입증해 주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인종이나 성별이나 빈부귀천 따위의 인간적 조건에 개의치 않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오직 믿음만으로도!!    


o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바로 그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는 일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하늘과 땅의 복을 받아 누리고, 또 이웃에게까지 그 복을 나누고 전하며 사는 것이다. 이 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을 상속하는 일이다. 이런 자리에 모두가 참여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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