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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5-16 (수) 21:25 5년전 1311  

본문)  행2:1-13, 신5:1-21, 요14:15-31

 

성령강림절에 십계명(十誡命)의 말씀을 받게 된 것은 의외(意外)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성령은 구약 시대의 종결이자 신약 시대의 출발로 인식될 수 있는데, 오늘 세 본문에는 출발부터 이 십계명 말씀이 성령에 관련된 말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구약 율법의 핵심이고 성령은 신약 복음의 동력인데, 이 둘이 어찌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지 궁금하다. 놀랍게도 오순절이라는 유대의 제2 절기를 우산으로 하여, 이 둘인 성령과 십계명이 함께 그 울안에 들어와 있다.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이유는 십계명이란 인류 불멸의 구원의 영적 지침을 예수 이후의 교회시대에서도 폐기처분이 아닌 새롭게 되살려내어야 할 대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성령을 통하여서라도 되살려내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왜 성령의 협력을 받아야만 세계 만민의 것이 될 수가 있었나? 그 자체의 빛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었나? 

 

성령강림으로 빛을 본 (십)계명 :

그렇다. 분명히 십계명은 예수와 그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세계적인 구원의 말씀이 될 수가 없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십계명도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며 믿게 하는 능력을 지닌’ 성령 자체의 협력이 있을 때, 그 계명의 온전함을 드러낼 수 있어서도 그랬지만(요14:25,29절 참조), 십계명이란 계명을 가르치고 전하던 당시의 유대교가 너무도 이방인에게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는 바람에, 십계명이 안고 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인류 보편적 구원의 계명이 진리로서 온 세상에 전파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유대교의 폐쇄적 입장과 이방인의 접근 불가능한 상황으로 인하여, 십계명이 구원의 지침으로 햇빛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회가 왔다. 예수와 성령의 오심으로 이 십계명이 유대교의 오랜 폐쇄 공간에서 벗어나 온 천하에 구원과 진리의 핵심으로 그의 밝은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 만민이 이 십계명을 접하게 되면서 무너진 자기 삶을 올바르게 구축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아시는가? 이 땅에 보혜사로 오신 성령의 목표는 ‘신비한 기적의 사람’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올바른 진리의 사람’을 생산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인류는 에덴의 비극을 경험한 이래, 항상 죄의식에 눌려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보다는 비정상적인 왜곡된 삶을 살아왔다. 그러기에 하는 일마다 범죄하며 왜곡된 시선으로 자기 방어적이며 타인에게는 공격적인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 인간 실존의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인간이 영육간의 건강을 되찾아 구원이 가능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선제적 조치를 은총의 선물을 이 세상에 제공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귀한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매우 불량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물건이 좋아도, 중간에서 배달 사고를 일으키면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잖은가? 그 배달 사고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두 보혜사(保惠師)들이신 예수와 성령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 실례들을 확인하자. 

 

예수께서는 구원이 길을 묻는 자들에게 다른 계명이 아닌 십계명 준수를 요구하셨을 뿐이었다(막10:17-19참조). 성령께서도 십계명 이외에 별도의 삶의 지침을 제시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십계명을 제대로 지켜 행하므로 참 구원 받은 백성이 되도록 도우셨을 뿐이다(요14:26참조). 사실 십계명은 613가지의 모든 율법들의 압축본이며 핵심이 아닌가? 게다가 십계명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요구한다. 그것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해서 말이다. 따라서 십계명은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 받은 자들이라면, 이 두 축의 뼈대 있는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때, 비로소 그가 구원의 자리에 있음을 입증해 주는 지표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장로교의 원조인 칼뱅은 그의 신학의 핵심부분인 그리스도인의 삶(Christian Life)의 문제를 그의 성령론에서 다루었다. 이제 우리는 성령 이해를 제대로 해야 한다. 성령을 더 이상 은사 중심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그 대신 우리의 무질서한 삶을 제대로 세워 주시려고 오신 거룩한 하나님으로 받아야 한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성령을 전달하는 데, 유대교 못잖게 배달사고를 일으킨 과오가 크다. 하지만 이제는 올바르고 건강한 성령론을 통하여 한국교회부터 구원을 해야 할 때이다. 그 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잘못되거나 편협한 성령론 때문에 보이는 교회는 키웠으나, 세상에 건강하고 올바른 진리의 인간들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어 세상을 변화시키고 건강하게 만드는 데는 크게 실패했다. 잊지 말자. 십계명이란 율법은 유대 백성을 탄생시켰다면, 성령의 힘을 받은 십계명은 새 민족 새 인류랄 수 있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그러면 성령은 무슨 연유로 본토인인 히브리인이 아닌 디아스포라(유대인 교포들)를 주 대상으로 겨냥했는가를 주목하자(행2:5이하). 

 

당시 예루살렘에는 오순절 맞이를 위해 해외교포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모국에서 노년과 인생 말년을 보내려고 귀국해 체류하는 교포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가슴엔 오랜 세월 나라 없이 해외에서 떠돌이 생활로 슬픔과 한과 그리움을 품고 살면서, 모국 땅에서 다시 오실 메시아를 목마르게 기다리던 교포들이 많았다. 그들의 메시아 기다림은 분명히 본토 히브리인들의 수준보다도 훨씬 더 강렬했다. 그들은 이미 종말론적 신앙에서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다(2:5절). 그러기에 강림하신 성령이 바로 그들을 겨냥하며 찾으신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 다음의 두 가지 실질적 연유로 인하여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접근하셨다고 본다. 

 

1) 그들은 해외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합당한 능력들을 이미 넉넉히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 능력과 이방인에 대한 개방적 태도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점은 본토 히브리인들에게서는 전혀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은사들이다. 

 

2) 게다가 그들은 진리의 원천인 구약의 계명도 받아들여 살아오면서 그것도 이방 땅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었기에, 십계명 등의 하나님의 구원의 계명들을 유대에서 세계화시키려는 배달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최적(最適)의 인물들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이런 큰 뜻을 헤아려 순종하며 동참하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명(복음)을 세계화시키고 교회의 시대를 온 세계에 여는 일에 역사적인 큰일을 수행하는 주역들이 되게 된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실로 엄청난 역사의 인물들이 되는 샘이다. 오랜 슬픔과 외로움의 질곡도 순식간에 씻어내고 환희와 축복의 세월을 맞이할 절호의 기회도 되는 것이고-!!!

 

그러면 이런 놀라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들이 약15개국에서 모여 온 그들에게 어떻게 통보되었나? 그들이 나서 자라고 성장해 온 현지 언어란 방언(方言)을 통하여 그들에게 통보된 것이다(4-8절). 그것도 그들이 오랜 세월 무시해 왔던 갈릴리 민중들인 예수의 제자들의 유창한 방언을 통하여 그 내용이 전달된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그들을 압도했던 순간이었다(7절). 그 언어의 내용이 더욱 놀랍고 놀라운 것이었다. 자기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결코 쉽지 않으나, 그러나 내용만으로는 엄청난 ‘하나님의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11절). 

  

어떤 큰일이었을까?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모든 정황은 추측이 가능하다. 앞에서 짚었던 대로, 이제부터는 그들 디아수포라들이 인류 구원의 역사에 하나님의 앞잡이들로 쓰임 받게 될 것이라는 통보(通報)였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오랜 세월, 나라 잃고 빼앗긴 떠돌이들로 압박과 설음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그들이 유대인은 물론 해외 모든 백성(만민)들을 구원하는데,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핵심들로 일하는 시대가 왔다는 소식이다. 즉, 습3:16-20의 내용 성취로 보면 좋겠다.

 

문제는 이런 통보를 받았던 자들의 믿음 여부이다. 믿지 못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만일 그들이 그 놀라운 통보를 믿고 받아들이게만 된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그들은 즉시 ‘세계인(世界人)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들 상당수가 그 통보를 믿고 따랐다고 확인한다. 나중에 초대교회 일곱 집사들이 모두 디아스포라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행6장 참조). 그것은 초대교회의 가장 뜨거운 신앙인들이 바로 그들 교포들이었음을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께서 증거 하신 그 ‘큰일’에 대한 통보에 큰 희망을 품고 따랐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제는 성령이 왜 오셨는지에 대하여도 관심해야 한다. 나에게 오신 성령은 무엇을 원하시는 지에도 깊이 관심해야만 한다. 이점은 내가 성령 받았다는 것이나 어떻게 받았다는 점보다도 더 중요하다.. 이 목적에 주목하지 못하면, 내 신앙은 자라지 못하고 늘 유아기적 신앙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우리를 어디에로 이끌어 가시려는 걸까? 오늘의 복음서가 그 대답을 준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진리(眞理)를 좇아 바르게 살게 하시려고 하신다. 그래서 올바르고 건강한 삶이 어떤 삶인지를 온 세상에 증언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다. 성령 받은 사람은 말씀을 받은 사람이요 진리를 좇아 살 사람이며 그 말씀과 계명을 지켜 행하는 사람이다(요14:17). 거짓과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참 진짜와 올바른 것을 세워주시려고 오신 성령이시다. 성령은 본래 진리의 영이시다. 이 진리의 핵심은 역시 십계명에 담겨 있다. 우리는 성령 받았기에 계명을 지켜야한다. 

 

신학자 로흐만은 십계명을 ‘’자유의 종소리‘로 규정했다. 진리의 보고인 십계명을 지키면, 죄에서 자유하고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됨은 물론 불의의 심판에서도 자유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좋은 증언이다. 진정 성령을 받으셨는가? 그 기적과 환상에 머물지 말라. 좁은 길이 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도, 그 십계명 준수만큼 우리가 성령과 동행하는 일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다시없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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