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부활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어버이주일 & 5.18민주화기념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부활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어버이주일 & 5.18민주화기념주일

관리자 2018-05-09 (수) 14:39 6년전 1239  

본문) 요17:1-11, 단7:9-14, 고후5:14-21 / 어버이주일,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이며 성령강림절을 앞 둔 주일이다. 스승 예수를 떠나보낸 제자들에게는 주님 없는 세상에서의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순간에 접어들었다. 그러기에 그들만 남게 된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시선을 끈다. 그들이 무엇과 같이 보이나? 분명한 것은 고아(孤兒)와 같이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뭔가 묘한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 올 새 질서를 열심히 대비하는 깨어 있는 모습이다. 마치 땅의 씨앗들이 새 순(筍)으로 변화의 옷을 입고, 굳었던 땅을 뚫고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연한 식물의 모습과도 같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무언가? 그 시간 이후의 그들의 모습은 그 시간까지의 그들의 모습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의 존재이었기 때문이다. 마음가짐에서, 활동하는 모습에서, 삶의 태도와 목표에서, 존재감이 주는 무게와 가치에서, 그리고 세상에 주는 그들의 놀랍고 무서운 영향력 등에서-, 그들의 삶의 차원이 그 직전과는 너무도 다른 변화된 존재로 역사 무대에 홀연히 등장하게 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한 카이로스의 개입(介入)을 그들이 오순절 아침 성령강림을 통하여 경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금주 한 주간,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그토록 고대(苦待)했던바 하나님의 자녀들이 탄생할 그  막(幕)을 열기 위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롬8장 참조). 온 세상이 진정으로 바라는 새 인간, 새 존재, 새 것, 새 인류가 탄생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새 역사의 산실이 될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전혀 힘쓰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변화의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성령 시대의 일원이 되고자 최종적인 영적 단장(리허설)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 이후의 예수들’로 그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위임을 받게 될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물론 예수의 12제자들이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다. 그들과 새 역사 참여를 함께 한 120여명의 다락방 동지들도 그들이다. 그리고 또 있었다. 그들을 매체로 성령의 사역에 함께 하게 될 그 이후의 모든 또 다른 예수의 무리들도 다 그 대상들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하나

 

승천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가 몇 가지 차원에서 하늘 아버지께 올려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사들을 담은 기도이어서 우리가 크게 주목해야할 부분들이다.

 

1) 먼저는 성자 당신의 성부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 복원(復元)을 위한 간곡한 기도요청이 올려지고 있다. 이제 돌아갈 때가 이르렀기에, ‘이 아들을 영화(榮華/Glorify)롭게 해 달라’고 하셨다(1,5절). 이는 그 동안 본래 천상의 존재이시자 아들이셨던 그가, 인간되셔서 그런 하늘의 영광을 포기 내지 내려놓고 지내셨는데-, 이제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었기에(11절),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을 창세 전(前)부터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바로 그 영화로(5절), 아들이신 당신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요청 드린 것이다. 주님의 이 기도요청은 너무도 당연한 주어질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정성스러운 예전(禮典)같은 기도로 아버지께 요청 드리는 모습이기에 우리에게도 크게 긴장을 주는 대목이다. 그러면, 천상에서의 아들이신 주님이 누릴 영화의 실체(實體)는 어떤 것이었나? 오늘 구약의 본문인 다니엘의 증언은 그 점에 대한 분명히 예시(例示)가 된다. 

 

☞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는 것이니라’(단 7:13-14절)

 

2) 당신을 세상에 파송하셨던 하늘 아버지께 올리는 아들의 사역보고(使役報告)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2-4, 6-8절). 

성자께서는 성부가 부여하신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바탕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영생을 베푸시려고 아들에게 주셨던 자들에게 영생(永生/Eternal life)의 복음을 전하셨다. 영생이란 다름 아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3절), 바로 그 사역을 위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받았던 말씀들과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줄곧 그들에게 나타내셨다(6,8절). 

 

3) 주목되는 부분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이다(2,6,9절). 그들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로 택하여 부르셨던 자들이다. 이는 예수께서 당신이 택하신 제자들이 누군지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음을 말한다(막3:13참조). 그들은 단순한 갈릴리의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하늘 아버지께서 영생을 주시려고 아들에게 붙여주셨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다(요17:2,6,9절). 그런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한 눈에 예수를 뵙고 자기들의 목자로 알고(요17:3), 예수의 그 부름에 선뜻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설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예표도 오늘 본문에 소개되었다. 단7:14의 하늘 인자를 섬기도록 선택된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4) 사역의 결과는 이랬다. 그들은 변화되었고 이전과는 아주 달라진 존재가 된 것이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무리가 되었고(6절),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보내심을 받고 온 분임을 알고 믿기까지 하게 되었다(6-9절). 그럼으로써 그들은 진정한 ‘아버지의 것(소유)’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보고하신 것이었다. 

 

5) 주님의 마지막 기도가 더욱 눈에 띈다. 그렇게 성장하게 된 당신의 제자들의 보전(保全)의 문제이다. 당신은 떠나도 그들은 이 땅에서 반드시 참 제자로 살아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였듯이, 그들도 서로 하나 되게 해달라(화목)고 요청하셨다(11절).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한 자들에게서는 아무런 생명과 복음의 열매를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은 분열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용하고 있는 현재의 병든 한국교회에 커다란 경종을 올려주고 있는 말씀이다. 

 

서신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사도 바울 역시 그 천상의 대열의 일원으로 선택된 사람이다(요17:2, 단7:14). 비록 뒤늦게 그 영생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한 때나마 어긋난 행동으로 큰 아픔을 주었던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자책(自責)의 심정과 빚진 자의 심정에서 주어진 소명 감당에 예전의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이었고, 치열하게 부활하신 주의 영생의 복음 전파를 주도했다. 진정 ‘늦게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주님의 지적이 그를 위한 것일 정도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이들의 특성(特性)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다 더 증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그들의 삶이 강권함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다(고후5:14). 즉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다시 살게 된 빚진 자의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생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대신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되는 숙명을 가진 자들’이다는 의식으로 사는 자들임을 선언했다(15절). 그런데 그 빚은 사랑의 빚이기에 부작용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특성을 가진다. 

 

바울은 이런 증언을 통하여, 영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의 삶의 척도(尺度)를 규정한다. 영생에 참여한 자들은 그 삶의 중심이 자기중심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중심으로 바뀌어 진 것이 가장 큰 특성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육체 중심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모두의 구원과 유익을 추구하는 삶을 택하는 영적 삶으로 그 중심이 이동하였음을 말한다. 그리고 어떤 육체적(외형)인 기준은 인간의 구원여부의 척도가 될 수 없음도 분명하게 한다(16절).

 

구원과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언제나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것>이다(17절). 그것은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주님의 사랑의 행위 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최고의 삶의 척도로 간주하고 그 정신을 본받아 살고 있음에서 나온다. 그런 모습은 이 낡고 이기적인 처음 것들이 판치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고 새 피조물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깊은 심호흡이 필요하며, 나의 영적 상태를 정직하게 점검해야 한다. 나의 구원과 영생의 진정한 척도가 내가 그리스도의 것을 좇는 데에서 나온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울리는 괭가리일 뿐이다! 

 

끝으로 바울은 하늘의 전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특별한 역할을 제시한다(18-21).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수 된 세상에게 평화와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기 위하여, 먼저 이 땅에 화해(和解)의 행위를 펼치신 것을 요구한다. 그 행위 역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의 화해의 제물로 내어주신 일에 기인한다(18절). 사실 세상은 이 복된 소식을 모른다. 그러기에 이런 하나님의 화해를 위한 사랑의 행위를 알리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거기에서 비로소 화해의 진정한 마당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화해도 그런 복음의 전령자(傳令者)들의 협력으로만 가능해지기에 그렇다. 

       

그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바울은 그 대상이 바로 ‘우리들’이라고 알려 준다(19절).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하나님의 사신(使臣)들이다(20절). 이 일에 순종하며 사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그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의(구원/영생)가 드러난다(21절). 

 

결론은 이렇다

 

금주 간은 이렇게 성령강림을 대망하는 주일이기도 하지만, 어버이주일이면서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당연히 성령을 대망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할 것이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은 새 역사를 탄생시키려던 자궁이었고, 요람이었음을 기억하며 우리도 성령 대망을 위한 기도의 다락방에 올라가자. 우리는 아버지의 소유된 무리들이잖은가!

 

동시에 아들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의 깊은 연대를 본받아서, 우리의 육신의 어버이와의 교제와 사랑의 시간들로 강화시켜 가자. 부모 공경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잖은가? 

마침, 5.18민주화 항쟁 제38주년을 맞이한 주일이다. 그날의 희생자들은 세월호 희생자들 못지않게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조국 통일을 열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신 분들이었다. 그들의 희생은 썩어 가라앉는 이 땅을 건져낸 우리 역사의 희생 제물이 되었음도 잊지 말자.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 역사는 내일의 새로운 탄생을 위해 사람을 준비시킨다. 120명의 새 인류처럼, 우리도 깊은 기도와 거듭남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하겠다. 결정은 그 분이 하신다. 준비된 영혼들에게 새 시대를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소명이 반드시 부여될 것이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