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주현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주현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1-19 (수) 08:30 2년전 343  

본문)  마 5:17~20, 신10:12-22, 딤전 1:1-11


o 세 분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주현절 셋째 주일이다. 겨울 추위가 깊어지고 있다. 코로나 속에서 맞이하는 추위라서 더욱 건강에 조심하며 살아야 하겠다. 그리고 추위보다 더 조심해야할 것은 내가 복 받은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견지하는 일일 것이다. 어떤 복이었나? 내가 사랑받고 사는 복만이 복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복이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고 이웃일 때 참 복이 된다. 그리고 시기와 분쟁에 맘을 빼앗기지 않고, 서로 화목하며 사는 일도 지속해 가야 하겠다.  


그러면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들은 우리에게 어떤 당부(當付)를 주시려는가? 한마디로, ‘균형(均衡) 있는 삶을 살라’ 하신다. 우리 육신의 지체들이 대부분 하나가 아니라 둘로 주어졌듯이, 우리의 삶에도 양면(兩面)이 주어졌음을 깨닫고, 그 양쪽과 양면 모두가 보유한 기능과 역할들을 제대로 숙지하고 활용하며 즐기고 살도록 일깨우는 말씀을 주신다. 사실 우리의 건강은 주어진 두 쪽과 양면을 얼마나 균형 있게 활용하느냐에 달렸다.  


우리는 빛과 어둠, 긍정과 부정, 오른 편과 왼 편, 진짜와 가짜, 건강과 아픔, 앞과 뒤, 성공과 실패, 성취와 좌절,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평화와 전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영과 육, 우측과 좌측, 젊음과 늙음, 생과 사, 웃음과 눈물, 좋음과 나쁨, 천국과 지옥, 복과 저주, 사랑과 미움, 의인과 죄인, 성과 속, 살림과 죽임, 복종과 저항, 위와 아래, 높음과 낮음, 깊음과 얕음, 소통과 불통, 의와 불의, 부유와 빈곤, 지식과 무지, 평안과 시련 등등의 서로 성격이 아주 대조적인 양면과 양쪽 모두와 함께 얽혀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상대할까? 전자는 무조건 백(白)이니 받아야만 하고, 후자는 무조건 흑(黑)이니 거부하면 될까? 궁금하다. 하나님은 그 중에 왜 좋은 것만 주시지, 둘 모두를 주신 것일까? 만일 하나님께서 좋은 것과 밝은 것만 주어졌다면, 인간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그런 여건이라면, 모두가 보장된 참 생명을 누리고 있을까? 그게 기계이지 인간이랄 수가 있을까? 대체 예수님은 왜 12제자 속에 가룟 유다와 같은 존재를 포함시키셨을까-?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에 눈이 밝아져야겠다. 하나님은 완성품 대신에 미완성품을 온전하게 하시려는 일에 관심하신다. 하나님은 나와 다른 이질적 요인들 중에, 당신이 주신 소중한 것들을 찾아서 그와 함께 연합과 일치와 사랑과 애환을 나누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참여하며, 당신의 구원을 맛보기를 원하신다. 그는 만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만들게 하신다. 아픔과 진통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보다 나은 당신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우리의 모습을 기뻐하신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신앙 현장에서 매우 견고하게 자리한 자들을 향한 경고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누구에게서 별로 충고를 들을 위치에 있지 않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왜 주의 말씀들은 그들을 겨냥하는가? 그들의 신앙 유형이 불균형과 장애에 빠졌고,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있어서, 그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치명적인 해(害)를 끼칠 위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인물들인가? 


복음서에서는 심각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서기관(신학자)과 바리새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구약에서는 십계명에 고지된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하지 못하고 사는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서신서에서는 이단 영지주의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든 에베소 교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신앙과 말씀은 절대 귀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내용이 중요하다. 그리고 한 쪽만의 치우친 경향과 교훈에 매달려, 보다 폭넓고 균형 있게 소화해야만 할 메시지를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체, 자기가 붙든 그게 진리의 전체인양 큰소리치는 모습은 정말 위험하다. 배후와 상대를 함께 보지 못한 말씀들은 위험성이 크다. 한국교회의 보수집단들이 문자주의에 매달려 그런 우를 범해온 일은 매우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1) 복음서 / 마 5:17-20 /  “너희 의가 저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화되고 메시야의 선교가 활발해졌을 때, 가장 크게 외부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은 일이 발생했다. 곧 ‘나사렛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폐하러 온 자’라는 비난이었다(17절). 그것도 당시 유대교의 최상위 권에서 백성들에게 신앙과 율법을 지도해 오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공격해 왔던 것이어서, 그 부정적 파장이 컸다. 주님으로서는 침묵할 수 없는 공격이었고, 반드시 해명(解明)이 필요한 비판이었다.  


사실 그때는 그 누구든 율법(律法)의 폐기를 말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 때였다. 그만큼 율법주의가 당시 유대 종교사회에서 최고 최상의 법적 체제였기 때문이다. 주님도 이를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주님의 율법사랑은 재론이 필요치 않을 만큼 확고하셨다. 그것은 율법이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내려주신 법들이었고, 그 자체가 또한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율법에 대한 주님의 입장은, 폐기(廢棄)가 아니라 살리는 일이었다(17절).        


그래서 주님께서 취한 접근 방식은 새로운 율법을 창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율법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율법이 담고 있는 바를 제대로 전하고 실천하지 못하여 빠뜨리고 살았던 진리의 소중한 영역들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연약한 인간이 율법주의(律法主義)에 빠질 때 갖게 되는 한계이기도 했다. 율법만능주의, 곧 문자주의에 빠진 인간들이 넘어설 수 없어서 나오는 치명적인 폐해이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율법은 더 이상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못된다. 도리어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도구가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저들은 율법이 본래부터 지향(志向)하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지고한 도리를 실천하려는 의지보다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정죄와 배척과 차별에 그들 종교적 열심과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율법을 살리는 복음이 아닌, 사람을 정죄하고 옥죄이는 심판의 도구가 되게 했다. 자신들이 심판자가 되면서 말이다.    


따라서 주님의 그러한 율법세계에의 개입은 그러기에 매우 미묘하지만 목적은 확실했다. 사람을 살리는 율법, 복음을 드러내는 율법, 곧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으로서의 율법이 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에 주님은 그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외눈박이들 판에 양 눈을 가진 인물이 홀로 뛰어든 것이다. 목숨을 건 영적 싸움이었다. 세기적 싸움이다. 이런 싸움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과 전 역사 속에서 이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심지어 21세기의 우리 교단 안에서 까지도 치열한 실정이다. 이른 바 ‘성소수자’와 ‘동성애’론에 대한 갈라진 입장들이다.  


그러면, 율법주의자들의 한계(限界)에 대한 주님의 지적과 그 너머의 세계를 눈여겨보자. 

1) 주님의 율법 지지에 대한 재확인이 분명히 천명되었다(17-18절). 율법의 일점일획도 세상 종말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2) 그런데도 당신이 오신 목적은 율법의 완전(完全)함을 이루게 하시려함이었다. 이 표현은 율법 자체의 불완전함을 지적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가르치며 시행하려는 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들의 율법 접근 방식으로는 율법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억압하고 짓눌러서 해독을 끼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해독이요 해악인가?  


3) 그것은 율법이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사랑의 눈과 마음을 잊어버린 체, 문자적 접근만으로 사람의 행동을 지적하고 심판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큰 눈으로 작은 것도 보아야 했는데, 그들은 작은 눈으로 큰 것을 보려고 하니, 아무 것도 못 보게 되고 만 셈이다. 율법이 안고 있는 큰 계명들은 무엇이었나?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인간(이웃) 사랑이었다. 


4) 그 사랑의 눈으로 보면, 인간은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구원을 받을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눈과 마음을 잃게 되면, 그 때는 글자와 현장만을 놓고 판단하려 든다. 마음까지 읽어낼 수 없다. 자비와 긍휼이란 하늘과 땅의 최고의 법과 질서가 끼어 들 틈이 사라지고 만다. 즉 모든 사안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본심을 읽지 못한 인간적 판단만 남게 된다. 그런 판에서는 감히 온전한 자는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죄인일 뿐이다. 그게 율법이 겨냥한 바가 아닌 데에도, 그 당시의 현실은 그랬다. 그 바람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었다(19절). 


5) 그 점을 주님은 그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신 것이다. 특히 당신이 선택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는(교회 공동체) 더욱 그런 차원의 접근이 필수임을 지적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는 경고의 말씀 안에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모두 들어있다. 의(義)란 물론 올바른 것이다. 하지만 의란 문자적 실천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과 사랑을 드러낼 때 나오는 것이다.


6)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무엇인 지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절). 우리는 이를 황금률(黃金律)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시한 가장 적극적인 방안이었다. 이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함께한 계명 실천에 나서야 한다.     


2. 구약 / 신 10:12-22 /  “하나님 사랑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일에서부터 ”


백성들과의 이별을 앞둔 모세의 마음은 어떻게 하든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사랑하면서,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돌봄과 사랑을 입고 사는 민족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밝혀주고, 그 하나님과의 사랑을 강화시키는 방안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소개하는 일들 중심으로 전해 주었다. 그 내용들은 인간들이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방안들이었다. 


1) 모세는 먼저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압도적인 사랑들을 환기(喚起)시킨다. 그들이 받은 큰 사랑은 무엇이었나? 온 세상 천지만물의 조물주이신 여호와로부터 그의 조상들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심을 입고 후손들인 자기들까지 만민 중에서 선민(選民)이 된  일이었다(14-15절). 특히 그들 조상들 70인이 애굽에 내려갔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그 후손들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창대하게) 하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22절,1:10절). 


2) 이 설명 후, 모세는 백성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12-15,22절 참조). 그러면서 자문자답하듯, 그 대답도 제공한다(12-13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사랑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섬기며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이 아니겠느냐며 답했다   


3) 모세는 여호와가 신(神)중의 신이요, 주(主)중의 주이시고, 크고 놀랍고 두려운 하나님이셔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뇌물도 받지 아니하시기에, 그 앞에서 항상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했다(16-17절). 아울러 여호와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정의를, 나그네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 사랑의 주로서, 그들이 애굽에서의 나그네 시절에서도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이셨기에(18-19절), 그들도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권했다. 즉 섬기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했다.


3. 서신서 / 딤전 1:1-11 /  “ 율법은 이단들에게, 사랑은 복음으로 자유를 얻은 이들에게  ” 


사도 바울은 후배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한다. 당신이 마게도니아로 갈 때에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하면서, 그곳의 교회와 성도들을 이단인 영지주의로부터 지켜내도록 분부한 것이다. 영지주의는 1세기 교회의 최대의 이단으로서, 헬레니즘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일원론적 복음을 이원론적 구원관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시도해온 거짓 세력이었다. 

즉 구원은 하늘의 빛을 받은 영만으로 완성되며, 육은 본질상 악하기에 범죄 해도 무관한 것처럼 교인들을 오도(誤導)했다. 그 영향으로 탈선한 교인들은 부활신앙도 외면하고, 허탄한 변론에 빠져들며(4절) 육체의 범죄에도 둔감하게 되면서,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성적 타락에 빠져들고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악행을 행하면서도,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괜찮다고 믿고 사는 괴기한 신앙인들이 양산된 것이다. 초기 교회의 큰 골치 덩어리였다.  


1) 그 바람에 그들은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잃고, 헛된 말에 빠져든 무리들이 되었다(5-6절). 많은 말을 하면서 마치 자기들이 율법교사나 된 것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려들고 있으면서, 정작 자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모세의 선한 율법을 복음으로 받아서, 새롭게 지도를 받아야만 될 무리가 되고 말았다. 9절에 나타난 모든 악행 목록들 모두도, 변질된 그들에게서 나온 것임이었다.


2) 그렇다. 잘못된 이단적 가르침의 결과는 정말 무섭다. 모든 악행들이 진리에서 탈선한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다 타락한 자들의 범죄가 불신자의 것보다 더 위험하다. 


o 건강한 신앙, 균형감을 갖춘 신앙을 위한 치열한 노력이 시급하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적 설교와 교육으로 모든 설교와 교육의 균형을 유지하고 편향성을 극복하게 하는 일이 요긴하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음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최종 목표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율법은 이단과 범죄자들에게 교육되고, 사랑은 복음으로 자유를 얻은 이들이 요긴하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