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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여신도회주일

관리자 2022-01-10 (월) 21:42 2년전 472  

본문) 막 9:38-50, 사11:10-13, 고전 3:1-9  


o 총회관련 기관주일 – 여신도회 주일


o 세 본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오늘은 주현절 둘째 주일이다. 그런데 총회에서는 오늘을 여신도회 주일로도 맞이한다. 총회에는 세 신도회들이 있는데, 그 중에 새해에 첫 신도회 주일을 여신도회가 맞이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상은 바로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즉 예수님의 신실한 일차 동역자들은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을 우리 여신도들은 긍지를 갖고 새해에 주실 주님의 사역에 임하면 좋겠다. 베드로의 장모를 붙잡아 일으키셨던 주님이 우리 여신도들에게 임하실 축원한다(막1:31). 


이제 오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하여, 잠시 지난 주일인 새해 첫 주일에 우리가 받았던 메시지를 점검해 보자. 어떤 메시지를 받았던가? 하늘의 복을 받되, 그 중에 가장 복 중의 복인 사랑하며 사는 복을 받자는 메시지였다. 곧 사랑하며 살지도 못하면서, 하늘의 복 받으려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받았다. 그러면 오늘 주일에는 어떤 말씀인가? 곧 ‘서로 화목(和睦)하라’는 말씀이다(막9:50절). 


그런데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살아가려는 데에서는 가장 경계(警戒)해야 할 요인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안에 서로의 화목을 훼방하는 심적 요인(要因)들인 탐욕과 독점의식(막9:38-39), 질투(사11:13), 시기와 분쟁과 같은 욕망(고전3:3)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완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한에는, 사랑하며 살거나 화목하며 사는 것들의 결국을 헛구호로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부정적 저해(沮害) 요인들이 세상 불신자들의 마음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나 주의 제자들에게나 교회 공동체 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 역기능이나 부정적 결과를 더욱 치명적이게 한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는 그런 부정적 감정들이 표출되어도 별문제 삼지 않지만, 교회 신자들에게서 그런 어둠의 감정들이 드러나게 되면 그 결과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보도들에는 ‘교회가 그랬고, 목사가 그랬다’라고 한다.  


왜 그리스도인들, 성도들,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서 그래도 중요한가? 그것은 그들 교회와 성도야말로 세상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가장 듣기가 싫거나 민망한 소리가 무엇인가? ‘교회마저 그러냐’, ‘믿는 자가 그러면 우리 세상은 누구에게 희망을 두고 살라는 것이냐’라는 소리들이다. 그런 음성 속에는 그들의 실망과 절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나 소임까지 불신을 당하거나 무너지는 아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신도회원들도 이런 점에 깊이 유의하여야 한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서로 안에 있는 시기, 질투, 독점의식이나 배타의식 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들은 여신도회는 물론 교회와 성도들의 일치와 화목과 연대의 성을 무너뜨리는 훼방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목과 일치를 위해 존재하지, 서로의 분쟁과 다툼을 위해 존재하는 그룹들이 아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그룹이 된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들의 전체적인 개요를 살펴보자.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께서 제자들 마음 안에 들어있는 복음과 은혜의 독점의식을 확인하면서, 그 점을 매우 심각하게 질책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그것을 넘어 믿음의 한 배를 탄자들 모두와 서로 화목하며 살기 위한 지침을 제시하여 주신다. 매우 엄격한 지침들이다.


예언서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인 남북 이스라엘에게 분쟁과 분열과 멸망을 안겨주었던 서로를 향한 질투의 장벽을 허물고(13절), 그들 전체를 다시 하나로 묶어낼 대안을 예언으로 제시하신다. 이는 곧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10절). 그가 누구신가? 바로 성탄하신 예수이시다. 오늘 복음서에서 제자의 분열 요인을 제거하시려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막9:38-40참조).   


서신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의 심각한 분열상을 통렬히 질책하며 그 치유책을 제시하신 내용이다. 그들은 인간적으로나 개인적으로는 받는 것이 많았다. 헬라인이라는 민족적 우수성, 복음을 받아들임, 다양한 성령의 은사체험들, 여유롭고 부유한 삶들이 화려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자기들을 부르시고 데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시려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전혀 분별하지 못했다. 그 점이 치유되어야 했다. 


이런 말씀들의 내용들을 보면, 그 때 그 시대의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상 불신자들의 문제이기 전에, 우리 교회의 문제이다. 아니 분열되어 있는 우리 한국 역사와 한국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의 복음은 바로 그런 우리 현장의 문제들에 대한 지적보다는 그 극복의 방안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숙원인 ‘서로 화목’할 길을 열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겉절이 김치에 소금을 치듯하는 작업들이 필요하다(50절). 

  

1. 복음서 / 막 9:38-50 /  /   “ 너의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


우리 민족의 김치 사랑은 아주 절대적이며 체질적(體質的)이다. 물론 김치도 종류는 많다. 그런데 김장할 때 만들어지는 김치는 대략 8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자료들을 투입하면서 김치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중에 매우 독특한 역할을 하는 한 가지 자료가 있다. 자기 몸을 투입하면서 자기 형체는 사라지지만, 그러나 그곳의 서로 다른 모든 이질적 자료들을 통합된 하나로 엮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소금(salt)이다. 소위 간 절이기를 통하여, 각자의 기세(氣勢)들을 잠잠하게 하고 자기의 맛들을 내놓게 하면서 서로를 융합(融合)시키며 결국엔 하나의 조화(調和)로운 김치 맛을 창출하게 하는 ‘신비한 에너지’가 바로 소금이다.   


주님은 바로 이 소금의 위력과 특성을 잘 아셨다. 그러기에, 당신의 택한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소금이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마5:13). 즉 성도와 교회 공동체는 자기 몸을 투입시켜서(선교와 섬김으로), 서로 억센 무리들의 기세를 장악하면서 그들이 가진 장점과 은사들을 규합하고 융합시켜 하나 된 전체의 맛과 멋을 드러내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를 위하여 성령은 이 지상의 교회들에게 세상 죄를 감당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란 소금을 투입시키셨다. 즉 예수의 이름과 사랑과 겸손과 죽임 당함이란 소금을 교인들 가슴 속에 투입시킨 것이다. 그 바람에, 교회는 기적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이질적 존재들이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고, 상대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며 헌신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한 서로 간의 화목이 가능해졌다.  

 

본문은 예수께서 추구하시는 그런 최상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육체적 행위로 당신의 길을 훼방하는 제자들의 행위의 잘못을 지적하시며, 올바른 길을 제시하신 내용이다. 


1) 그 내용은 이랬다. 제자 요한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어느 낯선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그 일을 금지시켰던 것이다(38절). ‘내 편, 네 편’의 문제에 걸린 것이다. 그러자 예수의 반응은 의외였다. ‘잘했다’가 아니라, ‘허용(許容)할 것’을 명하셨다. 그 이유는 ‘당신의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한 자는 즉시로 당신을 비방할 자가 없을 것이고, 또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본질상 우리를 위하는 자이기 때문’이었다(39-40절).   


여기에는 제자들과 스승 예수의 가치관과 시야가 아주 다른 데에서 마찰이 발생하였음을 보여 준다. 제자들은 눈앞의 것들만 보았다. ‘우선 가까이, 내 우리 안에 있어야만 우리 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치와 추구하는 행동이 같으면, 모두가 한 편이요 한 공동체며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보셨다. 그게 ‘울안이냐 울 밖이냐’가 문제가 아니셨다. 장소나 소속에 불문하고, ‘같은 일을 하느냐 다른 일을 하느냐’가 큰 관심이셨다. 그래서 연대의 폭을 세상까지 넓히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그런 시야(視野)과 가치관을 공유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또한 제자들 속에 있는 ‘예수님은 내 편이다’라거나 ‘예수는 이미 내 사람이다. 그러니 예수를 접하려면 나를 통해야 한다’라는 등의 소유의식이나 독점의식도 절대적 경계 사항이었다. 그들이 섬기는 예수는 절대 특정인을 위해 오신 메시야가 아니라, 세상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공공재(公共材)로서의 메시야였다. 그러기에 누구든 그를 원하면, 그 길을 방해하지 말고 그 앞으로 나아가도록 길을 내주어야만 했다. 이게 곧 교회의 길이요 제자의 길이었다. 


2) 이를 위하여 주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의 완전한 결속(結束)을 요구하셨다. 그런 일을 못해서 ‘작은 자라도 실족(失足)하게 하는 일을 범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기도 하셨다(41-42절 참조). 그러면서 작은 자들을 향한 신도들의 손 조심, 발 조심, 눈 조심, 입 조심을 극력 명하셨다. 범죄한 지체는 찍어 버려서라도 장애의 몸으로 구원받음이 낫다고도 단언하셨다(43-48절). 요즘 성소수자를 향한 신자들의 거친 언행이 매우 우려되는 대목이다.


3) 말씀의 결론은 제자들의 마음과 자세에 소금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금이 쳐지면서 김장 김치가 완성되듯이, 예수의 이 십자가의 화해와 용납의 영과 말씀이 그의 제자 된 우리 모두에게 소금처럼 스며 들어서, 우리 각자가 자기 것이 아닌 성령이 주신 새 맛과 조화된 맛으로, ‘서로 화목(和睦)하게 되는 일’이 이루어져야만 된다. 그래서 예수의 김장 공동체인 교회가 맛있게 창출되어야만 한다. 이게 바로 구원의 생명체의 모습이다! 


2. 구약 / 사 11:10-13 /   “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 


흩어진 우리를 하나 되도록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한다. 본문은 그의 독생자를 이새의 뿌리의 한 싹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만민의 기치(旗幟)로 세우시고,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게 하시리라고 예고하셨다. 그러기에 이스라엘도 그런 하나님을 독점하려 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이방인들을 경계하거나 시샘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을 두고 서로 질투해서도 안 된다.  


성육하신 예수님도 그렇다.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나 어느 특정 계층의 독점 대상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다. 그의 뜻과 가치관인 서로 사랑, 서로 화해, 서로 평화의 길을 원하는 모든 이들이라면 그 누구나 그를 소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인류 최대, 최선, 최고의 공공재로서의 존재이시다. 따라서 그의 제자나 종들은 이 점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자기들의 독점이나 전유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안내자요 홍보자의 위치만을 견지하면 되는 것이다.    


☞ 분명히 알자. 하나님은 당신이 기치로 세우신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로 오려는 자들을 오게 하신다. 민족들이건 흩어진 그의 백성들이건 다 포용하신다(11-12절). 그래서 모인 자들에게는 다시는 서로의 질투와 시기로 분열되고 흩어지지 아니하게 하신다. 옛적의 남유다왕국과 북이스라엘 간의 상호 질투로 결국엔 모두 망하게 되는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신다(13절). 


3. 서신서 / 고전 3:1-9 /  “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


고린도교인들은 매우 골치 아픈 이들이었다. 서로의 자기주장과 입장을 고집하며 맞서는 바람에, 교회는 항상 분열의 진통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도 있고, 기도도 열심해서 은사들도 많이 받았으나, 그들은 상대에 대한 존중심 대신에 자기 체험과 입장을 완고히 앞세우는 바람에, 화목과 평화를 잃은 교회가 되어 그 영적 생명력은 밑바닥이었다. 그런 모습을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worldly)로 규정했다(1-3절). 그러면 불화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나?  


1) 파벌 싸움이었다. 교회 개척자인 바울을 지지하는 파와 후임 교역자인 아볼로를 추종하는 파들의 기(氣)싸움이었다(3-4절). 거기에는 양쪽 지지자들의 가슴에 시기와 분쟁이 기승하면서, 교회의 신령한 영성과 성장은 마비되고 있었다. 실로 철부지 어린아이의 싸움판이었다. 

  

2) 이 소식을 접한 바울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들의 잘못과 질서를 바로잡고자 편지를 보냈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개척자인 자신은 심은 사람이고, 후임자인 아볼로는 물을 준 자일뿐이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밭이요 집인 성도들은(9절) 관심을 더 이상 교역자들에게 집중하지 말고, 오직 자신들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 그래서 서로 화목하라. 일꾼들은 자기 행한 바에 따라 상을 받을 뿐이다’(5-8절 참조).    


o 사랑이란 최고의 법과 계명을 둔 교회 공동체가 가장 우선해서 외부에 선보여야할 모습은 서로 화목하는 모습이다. 곧 예수의 십자가란 소금으로 간 절인 듯해 나온 낮아짐과 겸손으로 상대를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태도에 따라 사는 모습이다. 새해는 부디 이 거룩한 화목의 사명을 실천해보자. 본래의 내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오직 은혜로 받은 것임을 알고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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