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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21-11-03 (수) 10:05 2년전 427  

본문) 삼하 23:13~17, 마 10:34-39, 약 4:1-10


O 본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창조절 열째 주일이다. 11월에 들어선 요즈음의 환경은 단풍(丹楓)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 

듯하다. 잠시 나무의 일생이 생각된다. 신록의 싱싱함과 아름다움을 과시하던 때가 엊그제 같

았고, 그 몇 달 간의 그 자태의 풍성함과 위용을 뽐내던 때가 어제 같은데, 오늘에 와서는 밀

려 온 세월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또 다른 모습인 단풍의 단아(端雅)한 옷으로 갈아

입고 자신의 자태(姿態)를 뽐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더 아름답다. 몹시 가련한 듯하면서도 황홀하다. 삶

의 절정을 뽐낼 줄 아는 나무들이 참으로 멋있다는 느낌이 든다. 머잖아 벌거벗은 몸만 드러

내겠지! 그리고 긴 겨울잠에도 빠져 들겠지! 그 다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아마도 나무가 뽐

내는 단풍의 아름다움과 멋은 미래의 생명을 품고 있는 기품(氣稟)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이런 나무의 변화를 보면서, 왠지 늙을수록 추해져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오버랩(overlap)된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내면의 변질에서 온다고 본다. 욕심과 욕망, 교만

과 거짓, 분별력 상실과 자기도취 등에 오염된 인격과 양심에서 나오는 결과물로 보인다. 이

런 것들을 씻어내지 못한 체 노년에 접어들었기에, 그 사람의 말년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 

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위 골동품 인생이 아니라 폐품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

서 인간에게는 매우 강력한 자기 쇄신과 정결함과 고고함을 안겨 줄 <신앙 백신>이 필요하다. 


신앙은 자기 부정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그러기에 외부의 도움을 겸손히 요

청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한계와 스스로의 자정 능력의 부족함을 직시하고, 조물주

의 거룩하고 따뜻한 은혜와 자비와 강한 능력을 겸손히 의지하고 요청할 때 나온다. 자기 자

랑이 아니라 자기 비움에서, 교만이 아니라 겸손에서, 본능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말씀

과 의지적 복종의 삶을 선택하는 데에서 얻어진다. 


신학자 에벨링의 말대로, 신앙은 확실히 결단(Entscheidung)이다. 내 삶의 중심을 예수와 그

의 말씀으로 삼느냐, 아니면 인간의 본능과 세상의 유혹에 굴복해서 사느냐를 결정하는 일이

다. 비록 내가 보다 깨끗한 삶을 원한다고 해도, 내 스스로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함을 인식하고, 그러기에 그런 나를 온전히 잡아주시고 조율(調律)해주실 거룩한 능력과 세

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우리의 큰 길잡이임이 분명하다.


구약의 말씀은 군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용감히 행동한 다윗의 세 장수들의 모습에서, 

복음서의 말씀에서는 자기의 부모나 형제보다도 예수를 더 사랑하고 좇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서신서의 말씀에서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만을 겸손히 가까이 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참 

신앙의 진수(眞髓)들을 목격한다. 이런 이들에게는 세상을 이기고 하늘의 기업을 상속할 축복

이 부여된다. 마치 더 풍성한 미래를 기대하며 긴 겨울나기에 돌입하는 나무와 같이 된다. 


1. 구약 / 삼하 23:13-17 /  “ 충성(忠誠)의 옷을 입은 사람들 – 자신의 군주(君主) 위해 ”


블레셋과의 전쟁 중인 왕 다윗은 불리하게 기우러진 전세(戰勢)와, 가까이 있으면서도 들어갈 

수 없는 고향 베들레헴을 먼 산성에서 바라보면서(14절), 몸과 마음이 깊은 갈증에 빠져 있었

다. 그것은 자신들은 아둘람 굴에 진(陳)을 치고 있었고, 자신은 산성에 있었는데, 적군 블레

셋의 요새는 이미 베들레헴을 장악하고 있었음이 그 당시의 처지를 말해 준다(13-14절). 


그 때 마침 다윗의 정예 부대 두목들 30명 중에서, 3인이 다윗에게 나아왔는데-, 그 자리에서 

왕 다윗은 마음의 소리를 쏟아낸다 -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15

절). 이것은 자신에게는 소망이었으나, 그것을 실행하려고 할 때에는 목숨을 내놓아야만 하는 

난제(難題)였다. 적군의 핵심부을 뚫고서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다윗도 그런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뜻을 지시가 아니라 ‘바램으로’ 띄웠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곳을 방문했던 세 장수들이 왕의 그런 마음을 헤아려서 즉시 행동에 나섰다. ‘블레

셋 진영을 돌파(突破)하고 나가서, 그곳의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 가져 온 것이다(16

절,상). 그 물을 받아 든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꿈을 이루었으니, 황홀했을까? 아니다. 

비록 자기의 소망을 이룬 순간이었음에도, 다윗은 자기의 원대로 마실 수 없었다. 그들 세 장

수들의 순복(順服)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 지를 절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그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그들의 쏟아낸 피(생명)로 보인 것이다. 자신의 공사(公

私)에 대한 분별없이 쏟아낸 말을 두고, 그것도 지극히 사적인 요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순간에 군주를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적진에 침투하여 그 물을 취해 온 것은, 더 이상 사적 

만족을 위한 자료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바꾼 피와 같았기 때문이다. 혹 그 돌

파 과정에서 피할 수 없이 죽임 당해야 했던 적군들의 죽음의 피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윗이 어찌 그 물을 편안히 즐길 수 있겠는가? 


결국 다윗은 그 물을 자신을 위해 먹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 만다. 그것도 자신

의 과오를 뉘우치는 전제(奠祭)로 드렸다. 그런 공사에 분별력 없는 자신의 행태에 대한 회개

의 제물이었고, 이번 일로 인하여 아까운 생명들의 희생이 초래된 과오에 대한 반성의 제물이

었으며, 동시에 그런 부족한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충성스러운 신하 장수들을 안겨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그들을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심에 대한 감사도 겸하였다.  


☞ 결국 다윗의 성공과 번영은 결국 이런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들의 헌신 때문이었다. 죽음이

나 상황을 전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인과 군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이들의 일편

단심(一片丹心)의 헌신으로 그의 역사는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사실 이런 모습은 

다윗에게도 필요했지만, 우리 주이신 예수님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일이었다. 


2. 복음서 / 마10:34-39 /  “ 예수의 제자들 – 부모형제자매보다 예수를 더 사랑한 사람들”


요즈음 정당들이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원팀(one-team)에 대한 구호들을 외치고 있

다. 자당에서 선출된 후보를 중심으로, 전 당원들이 하나로 뭉치자는 외침이다. 승리를 목표한 

당이 후보와 당원의 하나 됨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분열되고 갈라져서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지고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상대에게 승리하려면, 반드시 자체 내부의 

결속과 하나 됨을 이끌어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중심으로 할 것이냐’는 점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도 이 부분이 매우 중요했다. 세상 마귀의 초강력한 훼방의 힘

과 분열의 술수가 매우 고차원적이었기에, 예수 중심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아주 강한 결속력

이 확보되어야만 했다. 본문은 그런 점에서 나온, 제자들 자체 결속에 관련된 예수님의 엄중

한 행동 지침이다. 과연 어느 정도의 결속이 필요한 지를 예수께서 친히 제시한 내용이다. 여

기에 관련된 주님의 수준은 일반 상식적 이해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 내용들이 제시되었다.  


1) 여기서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의 예수 사랑의 차원과 수준은 일상적 수준을 넘어선다. 부

모보다 더 사랑해야하고, 혈육 형제들보다도 더 사랑해야하며, 자기 십자가도 지고 따라야만

하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아야 만하기 때문이다(37-38절). 이는 마치 이스라엘

에게 부여된 하나님 사랑 수준인, ‘네 마음을 다하고-목숨을 다하며-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차원의 수준을 예수를 향해서도 요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신6:5, 막12:30 참조). 


2) 이유는 이런 하나님 사랑 수준의 압도적이고 선제적인 사랑을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드

려야만, 그런 박해와 분열이 만연한 종말시대에서도 성도들이 가정과 가족과 직업에 매인 강

한 고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기꺼이 참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어야만 종국에는 예수와 가족 모두를 잃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차원에서 얻게 되는 

축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 그렇다. 참 가족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 없는 

가족사랑은 결국 하나님과 가족도 모두를 원수가 되게 하는 결과에 빠지게 함도 명심해야 한

다(34-36절 참조). 가족은 본래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못된다. 인생의 도움과 변화

는 오직 하나님과 그를 향한 믿음으로부터 나올 뿐이다. 가족들 간에도, 불신이 개입되면 피

차를 망하게 한다. 그러기에 진정한 가족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믿음에서 찾으려고 해야 한다. 


4) 예수 중심의 교회를 이루듯, 가정과 부부,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되도록 헌신하자. 오

직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된 삶과 세상을 이루고자 힘쓰자. 그 길 만이 자기 이익만이 기준

이 되는 인간세상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어둠과 갈등의 현상에서 해방될 수 있다(렘9:2-9, 시

55:11-14 참조). 다윗의 신하들의 수준만큼 우리의 예수를 향한 충성도가 이루어져야 하겠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는 은혜를 삶의 전 영역에서 받게 된다(마6:33참조).  


3. 서신서 / 약 4:1-10 /   “ 그리스도인 – 오직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들 ” 


본문은 서로 싸우는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듯하다. 성도간에 서로 불편한 마음으로 대하면

서 믿음 생활에 큰 장애를 겪고 있는 모습을 사도 야고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훈계

와 지도를 하고 있는 내용이다(1-5절 참조). 이 무명의 교회 교우들은 소위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의 허물어진 모습들을 후대인 우리들에게까지 보여 준 것이다. 우리로서는 타산지석(他

山之石)으로 삼아야할 내용들이다. 우리의 영적 취약성을 보완해야할 자료들임이 분명하다. 


1) 이들의 싸움과 다툼은 무엇 때문이었나? 저들이 싸움의 실상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인 내용

이 소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야고보가 거론한 표현들을 듣다 보면, 그들의 싸움과 다툼은 

진정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답지 못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1-4절 참조). 사도의 탄식

과 질책을 듣다보면, 더욱 그러하다(5절 참조). 한마디로, 매우 저질적(低質的)인 싸움판을 교

회 내부에서 벌렸다고 보인다. 하나님과 세상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2) 야고보는 저들의 싸움의 근본적 원인이 그들의 ‘정욕’(desires-육욕들) 때문으로 보았다(1,3

절). 그런 정욕으로는 얻어낸 것도 없었다(1,3절). 진실한 구함(기도)이 없었는데, 어찌 얻겠는

가? 저들은 다만 정욕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싸움판을 벌린 것이었기에, 그들은 결국 그들 자

신들의 온갖 비인격적이고 비신앙적인 마음의 찌꺼기들만 드러냈다. 욕심, 살인(억압), 시기, 

다툼과 싸움 같은 실로 세상 사람들이 즐겨 취한 육신적 수단들(예, 간음한 여인들/4절, 마

12:39 참조), 곧 하나님과는 원수가 될 온갖 육체적 수단들을 분쟁에 동원하였던 것이다. 


3) 이에 야고보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다음의 말씀으로 질책한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5절). 무슨 말씀인

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부분이지만. 대체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그 영(靈)

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는 내용으로 보면 좋겠다(창2:7참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탐욕과 범죄에 빠지자, 우리 안에 그의 흔적을 심어주신 하나

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것에 대한 투기(妬忌)까지(?) 하심을 일깨운 말씀이다. 


4) 그러기에 이제 야고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육체의 정욕을 좇아 행하지 말고, 

‘더욱 큰 은혜’(more grace)를 주실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라 면서 이렇게 호소한다(6-10). 


첫째, ‘하나님은 교만(驕慢)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謙遜)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마음을 낮추고 복종하라(6-7절,상).

둘째, ‘마귀에 대적하라’. 그리하면 마귀는 대적자를 피하리라(7절,하, 엡6:10-17참조). 여기에

는 물론 믿음의 무장이 꼭 필요하다. 


셋째, ‘손을 깨끗이 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마음을 성결하게 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

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가까이하시리라(8절). 부정한 방법의 삶과 이중적 마음을 경계

하신 것이다. 

넷째, 회개와 애통과 근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낮추라. 주께서 그를 높이시리라(9-10)


o 모든 나무들은 뿌리는 대지에, 얼굴과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산다. 그러기에 그들은 철따라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입고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산다. 우리의 삶과 영혼도 마

찬가지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절대적 믿음과 사랑의 관계 정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 한

다. 

그와의 관계는 항상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와 그의 말씀이 내 삶의 나침판이어야 한다. 우리 

앞의 인생도 그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다.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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