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창조절(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종교개혁기념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창조절(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종교개혁기념주일

관리자 2021-10-26 (화) 08:19 2년전 438  

본문)  신 7:6~11, 마 5:43-48, 롬 1:1-17 


o 총회지정주일 – 종교개혁기념주일 / 루터종교개혁 제 504주년

- 종교개혁은 자기 정체성 확립에서 부터


o 세 본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창조절 아홉째 주일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제 504주년 기념 주일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 

개신교회(改新敎會)의 출현을 기념하는 (탄생)주일이기도 하다. 즉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라는 저항(抵抗)정신을 교회 정신의 기반으로 삼은 신앙공동체가 이 지구촌에 출현한 날이어

서 그 의미가 매우 큰 주일이다. 


당시 루터는 자신이 속해 있는 로마 카톨릭의 평 신부(사제)중의 하나로서, 교황청에서 주도하

고 있는 세칭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깊은 회의와 반발심을 갖게 되면서, 차제에 교회의 그

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과연 성서의 하나님 말씀에 부합된 것인지를 따져 보자는 입장에서, 자

신이 속한 독일 비텐베르그 성당의 게시판에 95개조 토론 논제를 내 걸었던 것이다. 그런 행

동은 뜻밖의 불길처럼 온 유럽에 거대한 파장(波長)을 일으키면서, 루터는 그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새로운 길을 내는 ‘개혁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기치(旗幟)는 바로 ‘오직 성서로’, ‘오직 말씀으로’이었다. 그의 마

음의 자세는 마치 저 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라는 성경 말씀 자

체를 상고(詳考)한 모습이었을 뿐이었는데도(행17:11), 그 결과는 온 유럽에 교회 개혁의 물결

을 불러오게 되면서, 세계사에서 개신교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

야할까? 루터의 위대함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개혁하게 하시는 능력과 그

를 추종하는 그의 신실한 주의 종들을 일깨워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보아야만 한다. 


그 후 세월은 어느 덧 500여년이 훌쩍 흘렀다. 한국의 개신교회의 역사도 130여년 대를 보내

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비록 외형으로는 세계가 감동하는 교회의 모습

을 이룬 것을 사실이지만, 내면으로는 큰 위기(危機)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또 다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있다. 그 강력한 요구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제기되었다. 


어떤 점에서인가? 그 동안의 우리는 외형적 교회 구축에 전념을 해왔다. 그러면서 어느 덧 세

상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할 또 다른 힘의 집단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또 다

른 창조주의 음성을 듣는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는 ‘한국교회야,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라는 음성이다. 이는 자아를 상실한 교회의 모습에서 연유하고 있고, 정체성 회복

의 시급한 요청에서 나온 성령의 음성이기도 하다. ‘너 자신을 다시 찾으라’는 요구다. 


이를 위하여, 2021년에 맞이한 우리에게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주

목하게 하는 정체성(Identity) 찾기에 집중하도록 소중한 말씀들을 주신다. 


구약 신명기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백성의 뿌리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확인해 준다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전달된 내용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성민(聖民)이요 택하신 기

업이었다(6절). 그들은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주할 터인데, 그러기에 그들의 목자이신 하나

님과의 관계 설정은 가장 핵심적인 과제였다. 정체성에 대한 바른 정립과 인식만이 그들의 미

래를 결정지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께서 당신이 택하신 무리들인 제자들이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 지를 일

깨우신 말씀이다. 특히 하나님 사랑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당신의 택한 

제자들의 존재는 어느 정도여야 하는 지를 지침으로 주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바로 원수까지

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44절). 이 수준에서, 주의 말씀은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고 있는 우

리 한국교회들에게 많은 도전을 안겨주시고 있다고 보인다. 


서신서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로 택하신 이방인 그리스도

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일깨우신다. 그들은 저 유대인 못잖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특히 성도(聖徒-saint)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임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잘 알고 지내야 하며 

그의 말씀과 정신을 분별하여 지켜 행하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 


☞ 이제 세 본문이 제시한 <성민-제자-성도>로 이어지는 우리의 정체성의 내용들을 본문의 

말씀 속에서 재확인하면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다시 구축해 가자. 개혁의 시작은 자기개혁

에서부터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설 때, 주변 환경에서 필요한 다양한 변화들을 

자연스럽게 견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또한 루터의 길이었을 것이다!


1. 구약 / 신 7: 6-11 /  - ‘ 하나님의 성민이요 기업이 된 이스라엘 ’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기억하며 살아야할 할 하나님과의 절대 관계(關係)가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는 거룩한 백성인 성민(聖民)으로 선택 받았고, 전 세계 만민 중에서 여호와께서 유

일하게 자기 기업(基業-,소유)으로 택하심을 입은 족속이라는 점이다(6절). 여기에서 ‘성민’이

란 말은 히브리어로 ‘암 콰도쉬’라 말인데, 그 뜻은 ‘구별해 바치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관계는 마치 부모와 자식이 운명적으로 절대 관계로서, 지워질 수 없이 얽힌 것과 흡사하다. 


1) 여호와는 당신과 이스라엘이 그렇게 특수한 관계로 맺어진 연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 당시 떠돌이였던 이스라엘이 모든 족속 중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었다는 점이었다(7절). 

그러기에 숫자가 너무 적어서 고단하고 외로웠던 민족이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

서 자비와 사랑(인애/9절,하)을 베푸신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그 어떤 공적에 무관하게, 하

나님이 먼저 주도적인 사랑을 베푸신 모습이 구약에서는 바로 이곳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둘째, 그들의 조상들에게 여호와 자신이 맹세(盟誓)하신 연고 때문이었다(8절,하). 사실 이 이

유가 보다 더 결정적인 선택의 원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

르실 때, 복(福)을 주시고 그들의 후손과도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바가 있었는데

(창12:2,17:1-8,26:3-9, 28:13-15참조), 지금 그런 당신의 약속을 그의 후손들에게 실행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얼마 전, 애굽의 바로로부터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면서 출애굽하게 하신 것

과 지금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일정 전체도, 바로 그 조상들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2)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돌보심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응답

적인 대응을 하나님께 해드려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받기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책임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신 인식(認識))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다. 여호와를 어떤 

분으로 알고 지내야만 하는가? ‘가장 신실하신(the faithful) 하나님’이란 인식을 간직하고 사

는 일이다. 오랜 전에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면서, 그것을 이루시려고 최선을 다하시

는 여호와이기에, 그 배려와 사랑을 특권적으로 누리게 된 이스라엘은 반드시 인격적 응답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출20:5참조). 


-의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내려 주시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꼭 지켜 행하는 일이다(11절

).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크고 놀라운 보상도 약속하셨다. 천 대(代)까지 사랑을 베푸

신다. 하지만 계명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 보응하신다(9-10절). 여기에

서 ‘당장’(엘 파나)이란 말은 주위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보여 주시는 상태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징벌을 가족에서 개인 단위로 좁혀 있음도 주목된다(출20:5-6참조).   


2. 복음서 / 마 5:43-48 /  - “ 원수도 사랑하며 기도해 줄 수 있는 제자들 ” 


예수 시대에 국가종교였던 유대교의 가장 큰 신앙적 오류(誤謬)는 빈곤한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열정은 나름대로 역할을 열심히 감당하였으나, 그 사랑의 또 다

른 날개인 이웃 사랑의 날개는 거의 힘을 잃고 죽어 있었다. 그러기에, 유대교는 생명의 종교

가 되지 못하고,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나 하는 무섭고 두려운 재판 종교가 되어 있었다.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은 신앙에 열심이지만, 그 제사를 받으시는 여호와(예수님의 입장에 의함)

는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매우 모순된 실정이었다(요8:44 참조). 


예수께서는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고자 오셨다. 그래서 생명을 구원하는 건강한 종교

로 일어서도록 돕기 위하여 오셔서, 전 생애를 바치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점에서 유

대교의 열심(하나님 사랑)과 그 부족(이웃 사랑)을 함께 전승도 하고 매우기도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위치에 있음을 본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이웃사랑의 참 모 

습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전하신 내용이다. 그 핵심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다(44절). 


1) 주님은 그들이 들어 온 잘못된 정보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시면서, 그것을 새롭게 교정해 

주시고자 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네 이웃을 사랑하되, 네 원수는 미워하라’는 정보였다(43절).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구약에는 없다. 오히려 원수 사랑에 관련된 말씀들은 곳곳에 있을 뿐

이다(출23:4-5,레19:33-34,욥31:29,잠25:21-22참조). 


2)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예수 시대 유대교 당파 싸움에서 있었다. 

쿰란 문서에 올라 있다. 그런 정보가 듣는 자들고 하여금, 온전한 사랑이 아닌 불구의 사랑을 

확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곧 사랑을 조건부(條件附)적으로 선택할 빌미를 안겨 주고 있었다. 


3)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라면, 전혀 다른 상반된 입장을 취해야 됨을 강조

하셨다. ‘적어도 당신 제자들의 이웃 사랑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라는 새로운 제자의 정체

성을 부여하신 것이다. 바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박해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었다

(44절).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인간 사랑의 보편성과 공정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창조주께서는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실 때, 선인이나 악인이나 그 누구에게도 차별 없이 혜택을 베풀어 

주시는 점을 그 구체적인 사례로 들면서, 차별없는 사랑을 역설하신 것이다(45절). 


4) 동시에 조건부적 사랑-, 즉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랑은 무익할 뿐임을 일깨

우셨다. 그런 본능적 사랑은 하늘 아버지 앞에서 받을 상(賞)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지내는 이방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저급 수준이기 때문이었다(46-47절). 예수

님의 이런 가르침은 입술만의 훈계가 아니었다. 당신 자신이 당신의 원수들의 손에서 무참히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원수 사랑의 참 모습을 끝까지 잘 보여주신 것이다. 


5) 예수님의 원수 사랑의 교훈은 무엇을 원하신 것일까? 모든 원수관계가 지속되지 아니하고 

아예 종료되게 하려면, 원수를 아예 사랑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단의 흉계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의 가슴에는 아예 미움의 장벽이 없

게 하시려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은 이웃 사랑을 무제한 주도할 수 있게 되기를 원

하셨다. 원수가 남아있으면, 이웃 사랑은 저해를 받는다. 그러기에 온전한 이웃 사랑은 오직 

원수 사랑의 수준에까지 올라야만 한다. ‘내 마음에 원수란 없다’라야 참 제자가 된다(48절). 


3. 서신서 / 롬 1:1-7 /  “  성도(聖徒)로 부름을 받은 무리들 ”


1)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밝힌다. 자신은 예수 그리

스도의 종(從-노예)으로서, 예수의 전권을 위임 받아 사도(使徒)란 직임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택정(擇定)함을 받은 자라 설명했다(1절). 


2) 그러면서 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중적인 정체를 잘 설명하였다. 예수께서는 육

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으나(3절), 성령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

님의 아들이란 종말적인 전권자로 책봉(冊封)되신 분이시다(4절). 바울은 바로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使徒)직을 위임받아 일하고 있음을 말했다. 그 바람에 

지금 온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5절, 고전15:8-10참조). 


3) 그 뿐 아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비롯하여 온 세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향하여, 그들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성도(聖徒,saint)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알렸

다(7절). 이 점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성민(聖民)으로 택하심을 받은 것과 같은 차원이다. 하나

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을 당신과의 교제 안으로 부르셨음을 알린 것이다.  


☞ 그렇다. 우리들의 자리는 성민-주의 제자-성도의 자리이다. 이에 걸맞는 삶으로 응답하자.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