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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세계성만찬주일 - 군선교주일

관리자 2021-09-28 (화) 08:05 2년전 488  

본문) 출 16:1~8, 13~15, 요 6:26-35, 고전 11:23-26 


o 세 본문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본격적인 추수 계절이 되었다.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 짓는 때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확인하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런데 추수의 핵심은 먹거리 식량을 모은다는 데에 있다. 먹거리 문제는 인간의 가장 생존의 기초이기에,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인류사에서 보면, 이런 먹거리 추수 때에는 그냥 넘어간 적이 없다. 반드시 거둠을 축하하고 그것을 허락하신 자기들의 신들에게 예물을 드리면서, 감사하며 경배를 드렸다. 동시에 축제를 통하여 소득한 것을 이웃들과도 나누는 단계까지도 나아가곤 하였다. 아마도 그 어떤 원시사회에서도 이런 축제들은 다 공통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여호와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먹거리 문제는 아주 큰 과제였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유목민(nomad) 생활을 오랫동안 영위해 왔던 이들이었다. 그러다가 애굽에 이민 후 정착하여 고센이라는 비옥(肥沃)한 곳에서 430여년의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바로의 학정 때문에 여호와께 이끌림을 받아 출 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가고자, 그들은 약 40여년의 시나이 반도를 중심한 광활한 광야생활을 하게 된다. 거기에서의 가장 큰 삶의 과제는 역시 먹는 것과 마실 것에 대한 해결이었다. 


오늘의 세 본문들은 모두 인간들의 먹거리 해결에 집중되어 있다. 다만 그 대상이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생존 방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여되어 있음을 말한다. 떡은 생명의 상징이며, 인간은 받아야만 한다. 대상들을 보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이고, 복음서는 예수의 무리들로 택함 받은 제자들과 그를 좇는 사람들이다. 서신서에서는 교회 공동체에 참여한 온 세계 그리스도인들이다. 


☞ 이들은 모두 놀랍게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무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이 먹거리 해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점을 믿음으로 받으면서, 그 대신 먹거리 해결자인 하나님 중심으로 행동하며 살 것을 요청받고 있다. 그 특징들을 각각 살펴본다.


1)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먹거리 해결은 매우 극적이다. 먹거리 해결 위하여 인간들이 끼어 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밤에는 메추라기(고기)를 동원하셔서 먹이시고, 아침에는 만나(빵)를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무려 40여 년간이나 말이다. 이런 모습은 엄마가 자기 자식의 입에다가 유두(乳頭)를 물리신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 지울 수 없는 경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보여준다.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는 과제만 있다. 


2) 복음서의 오병이어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양식이라곤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떡 두 개가 전부인 형편에서, 예수께서 축사하신 후 그것으로 남자만으로도 오천 명을 넘는 그곳의 참석자들 모두를 다 배불리 먹이시고도 12광주리나 남게 하신 일은, 진정한 인류의 생명을 위한 먹거리 제공자가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늘의 만나로서 오신 이심을 매우 구체적으로 계시한 내용이었다. 부여된 일은 이 생명 양식을 위해 일하며 사는 것이다.  


3) 서신서는 그런 예수를 생명을 살리는 양식을 주시는 구주로 확인하고 고백하는 믿음을 공식화시킨 성만찬(sacrament)을 말한다. 물론 첫 제정(制定)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하셨다(마26:26-28,막14:22-24,눅22:19-20참조).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육신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의 몸과 피를 먹이시고 마시게 하시는 것으로 내어 놓으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찬을 기념하며 주의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며 살아야 했다. 


1. 구약 / 출16:1-8, 13-15 / 당신의 백성에게 친히 양식을 먹이시는 하나님


1) 출애굽한 지, 한 달 만에 이들 백성들은 신 광야(廣野)에 도착했다. 1월 15일에 출애굽한 이래(민33:3참조), 둘째 달 십오일에 여기에 도착한 것이다(1절). 그 사이 낙원과 오아시스가 있었던 엘림을 거쳐서, 이들은 시내 산 사이에 위치한 신 광야에 도착했다.


2) 그런데 이곳에 온 백성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폭발(爆發)했다. 벌써 두 번째 였다(15:24참조). 앞에서는 마실 물 때문이었는데, 이번엔 먹을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버리고 떠나온 애굽의 ‘옛 것에 대한 그리움’까지 거론하고 나왔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2-3절). 


☞ 이런 백성들의 모습은 출애굽에서부터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들에게 기적과 은혜로 인도하시고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짓이었다. 큰 믿음이 필요한 시점에서 그들은 그곳 광야에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아니하고, 오직 원망과 불신으로 하나님의 종 모세를 곤경에 처하게 한 것이다. 


☞ 그곳에 인도 받은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망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어떤 믿음이었나? ‘하나님이 우리들을 몰살하려고 이곳 신 광야로 인도하셨을 리가 없다. 반드시 더 큰 그의 돌보심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우리 모두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랬다면, 그들은 그곳에서부터 광야의 오병이어를 체험하고 나중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까지 상속하는 위대한 신앙 첫 세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히도 최악의 나쁜 생각으로 치닫고 말았다. 출애굽을 통한 자유의 백성의 출발에 대한 감사는커녕, ‘애굽에서 열 번 째 재앙 때 애굽인들과 함께 죽어버렸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라는 아주 고약한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자유를 누릴 가치가 없는 패역한 자들임을 드러낸 것이다. ‘애굽의 고기 가마’라는 말은, 이때부터 서양(西洋)에서는 안락을 위한 자유를 파는 기회주의를 표현하는 속담이 되었을 정도이다. 


3) 결국 그곳 신 광야 한복판으로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확연히 드러내셨다. 우선은 그곳에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을 먹이실 것인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동시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육성시키고자 하셨다. 여기에는 끝까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주할 수 있는 적격자(適格者)들을 가려내시려는 큰 뜻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격적인 시험(試驗) 과정에 제시되었다. 곧 그들의 불안 요인인 먹거리는 일시에 해소시키시되, 제 칠일인 안식일용(用)으로 제공하실 분량, 곧 여섯째 날에 갑절로 그들에게 제공되는 분량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그들이 과연 순종하느냐 않느냐를 두고 시험하시겠다는 것이었다(4-5절, 16-30절 참조). 이것은 소유물에 대한 탐욕과 그것을 억제하는 하나님의 지시의 말씀에 대한 선택 여부를 묻는 시험이었다. (이 부분은 추후에 거론될 예정이다) 


4)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하여 원망한 내용을 다 들으셨음을 전하면서도(7-8절),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광야의 식탁 지급 방안도 함께 통보하였다. 곧 저녁에는 고기를 주어 먹이실 것이며, 아침에는 떡으로 그들을 배불리실 것이다(8절). 그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 식품을 균형 있게 지급하실 계획이었다. 


저녁에 날아와 광야 진(陣)에 덮일 예정인 동물성 식품인 메추라기는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 퉁퉁한 몸집을 가진 꿩 과(課)에 속한 철새였다(민11:31참조). 그런데 이것들은 40년간 지속적으로 공급되었던 만나와는 달리, 1개월 정도만 공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민11:21참조). 


반면에 아침 이슬과 함께 내려서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으로 주어진 만나(manna)는 그들에게는 빵 대용 식물이 되기에 적합한 물질이었다(민11:7-9참조). 크기는 약 3mm로서, 모양은 갓씨나 진주처럼 작고 둥글며 색깔은 서리같이 흰 것으로서 갈거나 삶을 수도 있는, 굵고 모래알 크기의 쌀가루 같은 것이었다. 이것을 접한 백성은 서로 속삭였다. ‘이것이 무엇이냐’(what is that?)라고 물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만후’(what)라고 하고, 헬라어는 ‘만나’라고도 부르게 된 표현이었다(15절). 고기와 빵이 그들에게 공급되게 되었다. 


5) 의문의 하늘 식량인 만나가 그들 광야에 백성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세가 궁금해 하는 그들에게 단호히 선포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다’(15절,하). 이는 하나님께서 마치 엄마가 직접 젖을 아기에게 물려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바로 그 모양새였다. 그러니 얼마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깊었을까! 이런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계획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믿음으로 응답해야만 했다. 


2. 복음서 / 요6:26-35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라 


본문은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쫓아온 무리들을 향하여 당부하신 말씀이다 -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印)치신 자니라’(27절). 


1) 주님은 양식을 둘로 구별해 주셨다. 첫째는 우리 생명을 썩게 하는 양식이다. 오병이어인 빵과 고기도 육신의 양식이면서, 그것들 모두가 일시적인 것들로서, 결국은 생명을 썩게 할 뿐이다. 그러기에 그것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결국 매달린 자도 썩고 만다. 


그러면 두 번째 양식인, ‘영생(永生)하도록 주어진 양식’은 무엇인가? 대체 어떤 양식이기에,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그 양식에 전념(專念)해서 일하며 살아야 됨을 강조하신 것일까? 당연히 이 양식은 물질 양식일 리는 없다. 양식 자체가 먹는 자에게 영생을 줄만한 전혀 다른 차원의 양식이어야만 가능하다. 그게 무엇일까? 새로운 차원의 양식이 필요했다. 


2) 마침 주님이 실마리를 직접 풀어주셨다. ‘이 양식은 인자(당신)이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이 인(印)친 자니라’(27절,하). 인침은 소유물의 표지이다. 당신이 곧 하나님의 소유물이요 독생자임을 밝히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흠 없는 제물에 인을 쳤는데,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음을 그렇게 밝히신 것이다. 


3) 결국 영생하도록 주어진(보내진) 양식은 하나님께서 세상 만민들(죄인들)을 먹여 살리시려고 하늘의 떡(양식)으로 보내신 예수 당신 자신임을 공포하신 것이다. 이 말씀 안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의 만나를 먹은 일을 추억하게 되면서, 또 다른 하늘의 양식으로 예수란 양식이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알고, 그 결단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28-32절 참조). 


4) 따라서 이제 그들은 예수께서 먹이신 오병이어의 양식을 쫓으려하지 말고, 그 양식을 주신 예수 자신을 생명의 양식인 하늘의 참 떡으로 취하고 먹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계란이 아닌 닭을 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첫 선언을 경청해야 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3-35절). 이제 인류 중의 새 인류(new human beings)는 이 생명의 떡을 먹고 피를 마시기 위하여 예수에게 나오는 자들이었다. 


3. 서신서 / 고전 11:23-26 / 나를 기억(記憶)하며 기념(記念)하라


예수라는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먹고 마신 사도 바울은 그때부터 그가 성령 안에서 세운 모든 교회 공동체들로 하여금 이 참 떡을 먹고 참 영생의 샘물을 마시게 하기 위한 기념의 식탁인 성만찬(聖晩餐)이 예배의 확고한 예전(禮典)이 되도록 전하기 시작하였다(11:23-26 전문).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은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못지않게, 예수의 살과 피로 나온 빵과 포도주에 그의 인격을 담아서 기념하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일이, 우리 기독교의 ‘듣는 말씀’(설교)과 함께 ‘먹는 말씀’으로 받는 성례(聖禮)가 되었다. 그러면서 참여자들은 주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기억(記憶)하고 기념(記念)하며 세상에 전(傳)하는 존재로 살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신 자를 잊지 않고 증언하는 자들이 어찌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영생의 길에 들어가지 못 하겠는가! 



o 섞어질 양식이 아닌 영생을 안겨 줄 구원의 양식인 예수를 위해 일하자. 그의 정신과 희생을 우리 몸에 받아서, 우리도 그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기념할 성만찬에 참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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