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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18-04-19 (목) 00:53 6년전 1340  

본문) 요11:17-44, 욥33:14-18,23-28, 고전15:51-58

 

첫 주일에 거론된 바 있지만, 본래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은 창조와 소멸, 죽음과 부활의 연속성 속에서 세워진 곳이었다! 인간의 첫 마을이었던 에덴은 그 창조의 온전함이 보전된 곳이어서, 죽음이나 부활에 관한 신앙이 새삼스럽게 필요치 아니한 곳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추방되고 죽음의 공포에 쫓기게 된 인간은 떠나온 그곳에 다시 돌아갈 복낙원(復樂園)을 꿈꾸기 시작했다(창3:22-24참조). 삶의 사정이 복잡해진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의 에덴의 출입을 엄격히 단속하시는 바람에, 그 영역은 떠나온 인간이 깊이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품안에는 죽음을 넘어선 세계가 있고, 또 죽어도 다시 살아서 영생(永生)할 세계에 향한 강한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즉 영원(eternity)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전3:11참조). 

 

하지만 영원(永遠)을 대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하나가 못되고 둘로 나뉜다. 그 세계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곳을 외면한 체 그냥 죽음의 세력에 눌려 살다 가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창4장의 증언은 에덴을 잃거나 상실한 자들의 비극(悲劇)을 소개한다. 그 세계는 즉시 자기가 살려고 남을 죽여야 하는 생존경쟁 사회가 되면서, 시기와 질투의 싸움터가 되었고, 강자의 횡포로 약자의 희생이 펼쳐지는 무서운 살인적 현장이 되었음을 전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바라는 자들의 선택에 관심을 집중한다. 폭력자 가인이 아닌 아벨의 억울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때문이다(창4:10참조).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세상이 아닌 영원자 하나님의 세계와 판단을 우선하는 무리들에게 두게 된다. 

 

그 ‘영원 신앙’의 첫 열매가 에녹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진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물로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죽음을 보이지 않고 하늘로 친히 데려가신 휴거(携去)된 첫 인물이었다(창5:21-24, 히11:5 참조).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저(根底)도 하나님은 죽은 사람도 살려주신다는 믿음에 있음을 드러냈다. 그 바람에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객지로 떠날 수 있었고,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도 모리아산에 주저하지 않고 바칠 수 있었다(히11:17-19참조). 족장들 중에서 야곱의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역경들을 승리로 돌린 체험담이라든지, 요셉의 애굽의 종살이 극복담에서도 부활신앙의 그림자를이 가득하다.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에서나, 선지자들(엘리야-엘리사)이야기에도 부활신앙과 영생 신앙의 흔적들이 서려있다. 시가서(욥,시편,잠언,전도서,아가서)에서도 고난과 부활의 양축을 함께 보게 하는 증언들이 풍부하다. 

이방 땅으로 유배되어 포로 생활하게 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그리고 에스더와 그의 공동체들 역시 깊은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믿음과 그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충성으로 가득하다. 그 신앙으로 그들은 당시의 제국들의 엄혹한 세력들과 치열하게 맞섰다. 그들의 목숨을 건 그러한 고난과 부활 신앙으로 결국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까지 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 시대의 사두개인들이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활과 영생과 천사나 심판 등의 영적 세계를 믿지 않았다. 즉 종말론적(終末論的) 삶을 거부했다. 까닭은 그들은 현세의 종교권력의 맛에 빠져서 눈에 보이는 풍요와 승리를 선호하며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활의 주이신 예수께서는 그런 육적 종교인들과는 전혀 상종치 않으셨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바알신앙이나 기복주의에 빠져든 한국교회의 모습과 흡사해서, 예수님의 외면을 받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그러면, 오늘 세 본문들에 나타난 부활 담론을 다시 보자. 세 차원으로 우리의 부활의 길을 열어 주려하고 있다. 

① 구약 욥기는 하나님의 부활과 영생의 실재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를 말해준다. 

② 복음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일을 통하여, 예수께서 그 부활의 실재임을 선언하신다. 동시에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기 위한 지침이 분명히 제시되기도 했다. 

③ 서신서는 이 부활의 주를 믿는 이들이 맞이할 미래적 삶과 그 대비적 삶을 제시한다.

 

1) 고난자 욥은 뜻밖에도 친구 엘리후의 영적 감동에서 나온 증언을 통해, 그의 고난을 해결하고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매우 새로운 차원의 증언을 듣게 된다.

 

① 엘리후는 욥이 죽음의 고통에 빠져 신음하는 자기의 탄원에 답변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하고 있다고 보면서(13절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님을 변호한다(14-16절). 하나님은 인간이 졸거나 잠들 때 다양한 꿈이나 환상 등으로, 그에게 경고와 두려움을 전하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그 체험으로 악한 행실을 버리고 겸손해져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17-18절). 사실 이런 경우는 성경에 허다(許多)하다!  

 

② 엘리후는 매우 주목할 만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방법까지도 언급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그(욥)를 위한 중보자(물)이라도 찾으셔서 그를 변호하는 일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대속물로 삼아, 다음과 같이 대응하실 것이다(23-24절). 

☞그 때의 하나님의 명령은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몸값을 벌써 받았다’. 그러면, 그의 살은 청년보다 더 부드럽고 어렸을 때처럼 회복될 것이다(25절). 거기에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까지 올리면, 하나님은 그를 대면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를 모든 억울함에서 의롭게 회복되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렇게 기뻐 외치게 하신다(26절).

☞‘나는 부정한 짓으로 범죄 하여 마땅히 무덤에 떨어져야 되었으나, 하나님은 그 벌을 면(免)케 하셔서 이렇게 환한 세상을 보게 하셨다’(27-28절)

 

그러면 엘리후의 놀라운 감동(感動)으로 언급된, ‘죄인을 위한 한 중보자’와 대속물이 무엇이겠는가?(23절). 그의 중보로 다 죽을 자에게 하나님의 사면과 구원과 복권이 즉시 거행되었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행보를 중지시키고 도리어 죄인을 회복시킬 만큼의 대단한 중보자가 있었다면 과연 누구였을까? 우리는 엘리후가 언급했던 ‘그 중보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중보자 자신이 인간되어 나타나 자신을 친히 소개 때문이다

 

2) 나사렛 예수가 바로 엘리후를 통해 증언되었던 하늘의 중보자임을 스스로 확인하신다.   

당신이 부여하실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대상이 누구인지도 분명히 소개하신다.

 

① 예수께서는 그 하늘 중보자가 당신 자신임을 말씀으로 계시(啓示)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절)

이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가 아니고서는 내놓을 수 없는 엄청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말씀에는 그의 부활과 생명이 과시(誇示)용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들의 것임을 일깨우시려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기에 문제는 인간들이 예수와 그의 증언을 믿고 그를 겸손히 영접하느냐 여부이다. 본 주님의 증언에서도, 무려 세 번이나 당신에 대한 믿음을 절대 조건으로 제시하고 계셨지 아니한가! 염려할 주제는 예수께 부활 생명의 능력이 정말 있는 거냐가 아니라, 그런 예수를 내가 믿느냐에 있다

 

② 예수께서는 행동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이심을 보이셨다. 죽은 지 나흘 되어 이미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를 살려내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이신 것이다(44절). 그것은 마르다의 수정된 믿음의 고백들과(27절) 지시에 대한 사람들의 순종을 바탕으로 된 것이다(41절)

 

③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부활 신앙교육은 여기에서도 주님의 마지막 중대 사역이기도 하였다. 죽음과 사망의 위협 아래에서 늘 불안하고 신음하며 고통 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넘어서 있는 영원한 구원의 빛을 주시려했다. 그런 권세가 당신에게 있고, 당신과 믿음 안에서 연대(連帶)한 사람은 누구나 저 나사로처럼, 무덤이 아닌 광명의 빛의 백성으로 편입(編入)되어 부활 생명들로 살아가게 된다는 점을 알리고자 하셨다.

 

④ 주님께서 보이신 눈물은, 죽음이란 허세 앞에서 절망하고 짓눌려 고통 하는 인생들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다(33-35절). 

 

⑤ 하나님께 아들 예수께서 올려 드린 대속물(代贖物)은 무엇이었을까?- 십자가와 그의 죽음이었다. 보라. 나사로는 살려내셨으나, 당신은 이 일로 죽음을 맞이하셔야만 했잖은가! -그 바람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음의 주로 받게 되면서, 욥기의 증언처럼,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되고 내려가지 않게 된 것이다(18,24절). 

 

3)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게서 인간의 승리의 가능성을 찾아낸 바울이 삶의 결론을 제시하였다. 부활신앙인의 신앙고백이며 생활지침이기도 하다. 

 

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실질적인 죽음이란 없다. 잠자는 상태일 뿐이다(요11:11,고전15:51). 

② 종말에 맞게 될 부활의 실체는 죽거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새 옷을 입게 되는 변화이다(52-53절). 

③ 그 때에는 사망의 권세, 그를 부리는 죄와 율법의 허세들이 비웃음과 함께 패배 당하는 날이 될 것이다(54-56절). 

④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원하고도 진정한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57절). 

 

⑤ 그러니 부활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자. 그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58절)!!  

 

결론은 이렇다 

 

부활신앙과 영생 신앙에 굳게 서자. 그리고 종말 신앙에 굳게 서자.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도 진정한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사망의 거짓 세력에 위축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히 맞서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는 부활 공동체임을 절대 잊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주의 일에 항상 더욱 힘쓰는 자들로 살아가자. 절대 주안에서 헛수고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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