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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교회연합주일

관리자 2021-09-08 (수) 08:34 2년전 504  

본문) 렘 17:5~8, 마 6:25-34, 엡 6:10-20


O 교단제정주일 – 교회연합(聯合)주일


O 세 본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인생은 결국 선택(選擇)이다. 특히 각자에게 부여된 지(知).정(情).의(意)가 담긴 마음이 어떤 방향과 누구를 향하여 모아져서 살아가느냐는 일은 그에게는 마치 운명(運命)으로 보인다.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구별되는 지점은, 그에게 창조주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며 그와 어떤 관계에서 살아가느냐에 달렸다. 그 분을 자신의 생명과 존재의 뿌리로서 믿고, 거기에서 형성된 영적 질서에 따라서 사느냐, 아니면 조물주(造物主)를 아예 무시하거나 외면하면서 모든 삶을 자기중심이나, 보이는 세상과 인간 중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이 둘의 선택의 결과가 어떤 지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비유로 설명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물가에 심긴 푸른 나무로(8절),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 자는 다른 새가 낳은 알을 품어 부화시켰으나 마침내는 그 새끼에게 버림을 당하고 마는 자고새로 비유하였다(11절). 전자의 경우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으나, 후자의 경우는 자신이 의지했던 것조차도 멀지 않아서 빼앗긴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른 질서와 그 결과는 결코 인간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주도하는 모든 집단이나 단체인 국가, 사회, 가정, 공동체 모두도 다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들은 구약이 그런 영적 질서에 관한 총론(總論)적 지침을 제시하였고, 복음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부름 받은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한 지침을 제공하였으며, 그리고 서신서는 교회 공동체의 도전해오는 어둠의 마귀 세력에 대항하는 데에 필요한 무장을 제시하는 내용들을 각론(各論)으로 담았다. 


이제 확인해보자. 나는 지금 푸른나무 인생을 살고 있나, 자고새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나?


Ⅰ. 예언서(구약) - 렘 17:5-8 / 저주(咀呪)를 받을 사람 & 복(福)을 받을 사람


오늘 이 본문의 배경은 유대 왕 여호와김이 북방의 바벨론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남방의 애굽 왕 바로느고와 동맹(同盟)을 맺었던 역사적인 사건이 기반하고 있다(왕하23:35참조). 이 일을 보시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매우 격노(激怒)하셨다. 그들의 그런 선택은 그들의 마

음에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아닌 불신이 가득한 일에서 나온 것임을 아시고 격노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유대를 향한 저주(咀呪)를 선고하셨다.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이 선고된 것이다. 


1) 하나님의 분노는 그들이 하나님을 아예 모르는 백성이 아닌, 그의 선민 이스라엘이 그런 배신적인 행위를 하고 나온 일에서 더욱 그러하셨다. 그러면서, 세상 만민이 함께 들어야만 할 금언(金言)을 말씀하셨다. 

-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干潮)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5-6절)


2)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복(福)받을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서도 첨언(添言)해 주셨다.  

-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靑靑)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7-8절).  

☞ 이는 시1:3의 내용을 연상시키는 구절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을 언제나 마시고 사는 사람에게는, 늘 열매가 삶에서 계속 맺힌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2. 복음서 – 마 6:25-34 / 자기 노력으로 사는 사람 &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


본문은 제자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행동 지침이다. 그들은 이미 세속주의자들의 삶의 영역에서 떠난 사람들이기에, 그 때 지니고 살았던 가치관이나 물질관에서 떠나야 했다. 그리고 주께서 부여하신 새로운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야만 했

다. 먼저 붙잡아야할 가치의 대상을 바로 정해야 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서 나타난 삶의 우선순위(優先順位)도 바르게 확립해야 한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 


1) 인간 삶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 문제로 염려(念慮)하지 말라는 점이다. 이 경고는 첫 절(2절)에서 시작하여 끝 절(34절)까지, 일관되게 이어진 주의 사항이다. 믿는 자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영접한 이들이다. 공중의 새들-땅의 백합화들 같은 미생물체들도 조물주께서 입히고 먹이시는데, 어찌 그의 자녀된 자들을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이유 때문이다. 


   또한 이 염려 행위가 심각한 것은 염려하는 일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불신으로 간주되고 물질이 자신을 지켜주는 주역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30절). 그리고 정작 자녀된 이들로서, 더욱 우선해서 추진해야할 일들을 외면하게 되거나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염려만하다가 끝나는 존재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랄 수가 없음이다. 


2) 땅의 사람이냐 하늘의 사람이냐는 문제에도 분명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안정성의 차이뿐만 아니라, 일시성과 영원성의 문제도 되고, 가시성과 불가시성의 문제도 되며, 세속성과 거룩성의 문제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분명한 태도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3) 사람이 두 신(하나님과 세상물질)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문제도 제기 된다. 영혼은 하나뿐이기에, 최고의 가치가 될 신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물질을 함께 섬기려는 일을 창조주에게는 진정한 모독(冒瀆)이 된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세상의 것들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 질서를 정상화(正常化)시키고자 함이다. 


☞ 곧 하나님을 우선하면 그 안에서 필요한 세상 문제도 해결되지만, 물질을 우선시하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물질이 된다. 그렇다. 물질도 자기 노력으로 획득한 것들과 하나님의 공급해 주신 은혜로 받은 것들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나를 교만과 범죄로 인도하지만, 후자는 나를 하나님의 청지기로 만들면서 그 물질로 인하여 더 복 받은 인생이 되게 된다. 


4)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지목하신 까닭은(26-29절), 그것들이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존 법칙의 틀 안에서, 그 누구와의 경쟁이나 탐욕도 없이 자신의 기능과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며 지내고 있는 생명체들의 표본듷로 보셨기 때문이다. 이는 만물 중 최상위 생명체로 창조된 인간들이 탐욕과 경쟁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차별 훼손하며 지내는 모습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5) 따라서 주님의 시선과 권고가 ‘염려하지 마라’는 요구와 함께, 이 말씀에 모아졌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33절,상). 이 점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요지(要旨)이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이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다 두고 살아야 됨을 역설하신 것이다. 자신의 만족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삶을 자신의 최우선 권에다 두고 살아가는 일이다. 그 지점에다 현재의 나의 삶은 조정되고 지배되며 포기되고, 재건축되어 가야함을 말한다. 그의 다스림은 우리의 미래의 빛으로 나타나리라. 


6) 그런 삶의 결과에 대하여서도 주님이 한마디 덧붙여 주셨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절,하). 이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인생이 되리라는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하시는 일과 관심에 함께 마음을 모으는 자식이 될 때, 아버지는 그 자식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되심을 밝혀 주셨다. 그게 반석위에 세운 삶이요 영생에 이르는 삶이 된다. 


☞ 신앙인에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처럼 사는 일은 가장 나쁜 모습이다. 이방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쟁도 감당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장론은 마땅히 주목할 만하고 또한 유익하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기 위한 실질적인 영적 무장에 우리의 시야가 열려야 하기 때문이다. 



3. 서신서 – 엡 6:10-20 /  혈육을 상대하는 사람 &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은 사람

                                              

그리스도인들은 늘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만(2:6참조), 그들은 아직도 피할 수 없는 마귀와 그의 세력들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의 영적(靈的) 전쟁(戰爭)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려는 하나님과 그 일을 훼방하려는 사탄과의 싸움이다. 이 전쟁을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인 무장(武裝)이 필요하다. 


전체적인 무장은 하나님의 전신(全身) 갑주(甲冑)를 입는 일이다(11,13절). 그리고 두 가지 차원의 무장들도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무장(사59:17,시35:2-3 참조)과 그리스도인 무장이다(13:12,고후6:7,10:4,살전5:8,벧전4:1참조). 그리고 다음의 사전 지식들이 필요하다. 


1) 이 영적 전쟁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악한 영들이다(12절). 다음은 악한 영들의 특징이다. ①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12절,하). ‘통치자’들과 ‘권세’라는 두 칭호는 그들의 힘과 권위를 말해 준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 함은 그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마4:8-9,요12:31,14:30,16:11, 요일5:19참조). ② 아주 사악(邪惡)하다. 도덕적 원칙이나 고상한 감정 따위가 전혀 없다. ③ 교활(狡猾)하다.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기도 한다(고후11:14참조). 


2) 전쟁의 최종적인 승리는 성도들의 것이다. 이 마귀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를 통하여 격퇴당한 바 있는 패장(敗將)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믿음을 갖고 대처하는 한, 그들은 예수께서 가지고 승리해내신 부활의 능력에 힘입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의 영적 싸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된 승리를 안고 싸우는 것이다(롬8:35,빌4:13참조). 


3) 이런 전쟁에서 필요한 무기들은 무엇인가? 검이나 창 같은 육체적인 무기가 아니다. 그 대신 진리, 의, 평화, 믿음, 구원, 말씀 같은 전신 갑주들이다. 이런 무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제공해 주시는 영적 무기들인데(사59:17참조), 이는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을 의지해야만 그 사용이 가능한 무기들이다(왕상17:45-47참조). 담대히 써야 한다. 


4) 이 영적 전쟁의 기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이다. 이것이 문제라면 큰 문제이다. 끝까지 믿음으로 대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은 사탄의 집요함과 끈질김에 대한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사탄은 성도들이 한순간의 허점에서 무너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창9:21-22, 삿16:19, 행20:9참조). 보장된 승리를 지켜내는 일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 항상 깨어 있어야할 이유이다,


5) 이런 싸움은 나홀로 감당하기엔 벅차고 위험하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을 중요하게 본 듯하다. 그러기에 연약한 서로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는 중보의 협력을 강조했다(18절). 성도들은 물론, 복음 전파자와 선교자를 위한 기도도 잊지 말아야 한다(19-20절). 강력한 기도의 연대와 기도망이 필요한 시대이다. 천국은 홀로 가기 위한 곳이 아니라, 함께 가기 위한 곳이다. 그게 교회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o 메시지  


내 삶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어디에 있나? 결코 아니 절대 세상 현장에 있지 않다. 다만 우리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자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데에 있다. 성부의 뜻을 헤아리고, 성자의 말씀을 순종하며, 성령의 이끄심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길에 우리의 안전과 안식이 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지겹고 끈질긴 영적 패장(敗將)인 사탄과의 기나 긴 싸움에 들어서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한순간의 미끌어짐이 우리의 미래에 무엇을 안겨다 줄 것인지를 깊이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다 이긴 싸움에서 패배할 수는 없잖은가? 견디고 버티지 못해서 결국 손들고 말아서는 안되잖은가? 


나의 영적 무기들의 상태를 점검하자. 진리, 의, 평화, 믿음, 구원, 말씀 같은 전신 갑주들이 내게 잘 작동되고 있는 지를 점검하자. 녹슨 칼이나 무기로는 한순간도 견딜 수 없다. 성령의 강한 도우심을 간구하며, 항상 깨어살자. 좁은 길을 걸어도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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