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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평화통일주일

관리자 2021-08-10 (화) 15:10 2년전 552  

본문) 롬 10:5~17, 사42:18-43:7, 막 7:31-37


강림 후 열 두 번째 주일이다. 오늘은 일제(日帝) 치하로부터 광복(光復)한 지 제76회 기념일인데, 한국교회에서는 오늘을 평화통일주일로 지킨다. 8.15광복절을 평화통일주일로 제정한 까닭은, 그 날의 광복이 민족전체의 통일로 이어지지 못한 체, 남북 분단(分斷)이란 불구의 몸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일제란 외부의 장애물은 넘었으나, 이념(理念)이란 내부의 장애물은 넘지 못해서, 우리는 지금 민족평화통일을 제2의 광복으로 간주하고 살고 있다. 


O 수난과 구원의 역사란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비슷한 우리 한국의 역사 :

그런데 민족 역사의 아픔으로 보면, 성서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우리 대한민국은 유사(類似)하다. 그 중에서 특히 바벨론 제국의 휘하에서 70년간을 식민지 백성으로 고생한 이스라엘은 우리가 일본 제국의 치하에서 36년간을 보낸 세월보다 훨씬 더 아픔과 고통이 컸음이 분명하다. 그 때의 참혹한 세월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오늘의 말씀에서 이렇게 전한다.

☞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이 백성이 도둑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21-22절). 


그러면 그런 고난과 치욕을 불러 온 까닭은 무엇이었나? 그 원인을 보면, 역시 우리 사정과 흡사하다. 그 결정적인 시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못 듣는 자들(청각 장애-소경)로 살았고, 못 보는 자들(시각 장애-맹인)로 살아서, 그렇게 비참하게 당하고만 것이었다(18-20절).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직접 택한 백성이기에, 그 어느 백성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의(義)와 사랑을 아주 오랫동안 압도적으로 받아왔다. 하지만 정작 절박한 국난(國難)기에 그들은 여호와를 외면하였고 이방 제국들에 더 매달렸다. 여호와의 말씀을 더욱 좇아 살아야 했으나, 이방신 숭배와 세속의 향락과 불의에 빠져서 살았다. 


곧 남편(男便)을 버리고 정부(情夫)와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범죄에 빠져서 살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약탈자에게 넘겨졌고,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의 공세 속에 떨어졌으며, 사방이 불타고 몸이 타도 돌볼 이가 없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었다(24-25절). 


☞ 우리 조선의 사정은 좀 달랐다고 말할 수 있다.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하나님 자리에 ‘진리, 정의, 사랑’을 대입한다면, 우리의 처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색당쟁과 쇄국정책과 온갖 차별과 억압구조의 조선은 분명히 다가 올 미래를 볼 수 없는 맹인이었고, 정의-평화-생명의 구원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귀머거리였다. 그러기에, 조금 더 미래적 세상에 눈 떠있던 이웃인 일제에 먹잇감이 되어, 그토록 유린을 당했던 것이다. 


☞ 하지만 역사의 주 하나님은 그런 동토(凍土)의 땅 조선에 복음의 씨앗들을 민중들 틈새로 뿌려주시면서, 새 세상의 싹을 띄어 주셨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꾸준히 보내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와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교회가 민족 해방과 자유의 보루(堡壘)가 되게 하셨고, 또한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다음 세대의 일꾼들을 양육해 내셨다. 3.1독립운동이 기독교(교회) 중심으로 일어난 일과, 교회가 건립된 곳에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 인물들이 꾸준히 생산된 일은 그런 하나님의 선교의 열매가 교회를 통해 일어난 결과물이었다. 


비록 코로나19이래, 한국교회의 초라해진 민낯이 세간의 실망을 받게 되긴 했으나, 지금의 교회는 회개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교회와 복음에 부여하신 풍성한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다시금 온 세상에 전파하는 일에 계속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 낡은 당신의 사람들은 징계하실 지라도, 당신의 복음과 몸 된 교회에 대한 기대와 사랑은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본질상 교회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곳이잖은가!


이런 모습은 사43장에 들어가 보면, 그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하지 못하신 사랑과 기대에서 확인이 된다. 이는 마치 부모가 종종 말썽 부리는 자식을 교육상 엄하게 징계하고 책망할지라도, 그러나 때가 되면, 다시 불러들여 격려하며 붙들어 세워서 자식의 위상을 드높여 줌과 같다. 이런 말씀을 지금의 망가진 우리 한국교회들도 새겨 듣고, 다시 용기를 내게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은 쉽게 버리지 못하신다. 문제아라도, 다시 고쳐 쓰시고 세워 주신다.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신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3:1-7절 참조). 


O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에게, ‘에바다’(열리다)의 세계를 열어주신 메시야 예수

복음서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북부와 동부 외곽의 이방인 지역들인 두로, 시돈, 데가볼리 지방들을 두루 선교하시며 살피고 돌아오셔서, 일어난 한 중요한 사건을 소개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보면, 나사렛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돌보아야할 백성들 속에,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셨다(31절). 곧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모든 자들을 나오게 하시는 사역을 생생히 진행하고 계셨다는 말이다(사43:7절 참조). 


1)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데려온 한 장애인을 만나신다. 그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였다. 그들은 주님이 그에게 안수(按手)하여 주시도록 간청하였다(32절). 장애로 인한 삶의 고충(苦衷)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긴 사람들의 요청을 받으신 것이다.  


2)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특별히 상대해 주셨다.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당신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매우 특별한 안수(터치)를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명하셨다 -‘에바다’(Ephphatha-Be opened!).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리면서, 말이 분명하여졌다(35절). 사람들의 심히 놀랐다! - ‘그(주)가 못 듣는 자를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자도 말하게 한다!’(37절). 


3) 그러면, 이 ‘에바다’의 사건이 예수님의 사역들 중에서도 왜 특별한가?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役事)들 중에서, 가장 메시아의 전권(全權)을 드러낸 사건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치병(治病)하여 사람들에게 건강과 자유를 안겨 준 기적과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서, 오직 인간 존재의 전인적(全人的) 구원(救援)인 ‘못 보는 것을 보게 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하며,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세상과는 물론 하나님과의 소통과 교제도 가능하게 하는 구원의 총제적인 차원을 선사하신 일이 바로 에바다였기 때문이다. 


4) 그러기에, 이 ‘에바다’의 전권적인 은혜를 입게 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드러진 특징들을 드러낸다. 선포된 소식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듣게 된 소식에 온몸으로 반응하게 된다. 입술로도 고백하고 행동으로 고백하게 된다(막6:52,7:14,8:17-21참조). 그러기에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일을 전하는데, 그 무엇으로도 억제될 수 없다(36절참조). 


☞ 왜 주님은 이 에바다 치유행위를 은밀하게 처리하려 하셨을까? 이 장애인의 일은 성격상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와 너무 흡사했다. 당시 유대 종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기억도 못한 장애인들’이었기 때문이다(8:18절). 그러기에 예수의 치유는 유대 종교의 심장부를 깊이 태클하는 일이어서, 그런 상황을 주님이 유의하셨다고 보인다. 


☞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태는 어떠한가? 진리와 가치보다는 풍요와 성장 차원에 관심이 너무 크다. 따라서 교회로서의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영역에 더 깊이 관심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 점에서 에바다의 치유가 우리 한국교회에 더욱 요긴하다고 본다. 시각과 청각과 언어 장애에서 어서 치유 받고 해방되어, 참 진리와 생명을 전하는 공동체로 환골 탈퇴하여야 하겠다.  


o 구원의 수원(水源)이 다르다. 구원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는 서신서

해외(海外) 선교에 부르심을 받아 사역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일꾼들을 세우는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부딪친 선교의 장애물이 있었다. 곧 구원이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이냐 예수의 복음에 의한 것이냐’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었다. 이 일은 우리나라가 남북의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전쟁까지 하며 서로 미워하고 담을 쌓고 지낸 것 못잖게, 당시 교회와 성도의 분열과 갈등을 촉발하는 무서운 장벽이었다. 구원론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바울 자신의 사역에서는 이런 논제가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개척하고 섬기던 그곳 교회를 떠나면, 그 문제가 바로 붉어져 나왔다. 까닭은 바울이 떠난 후, ‘슬며시 들어온 유대인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의 복음 이외에도 행위를 강조하는 모세의 율법 준수가 구원의 조건이고 할례(割禮)까지 받아야만 된다는 점을 강조하므로서, 그곳 복음의 의한 구원만을 믿어왔던 현지인들(이방계)에게는 큰 시험이 되는 경우가 허다히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장의 재방문이 힘들었던 바울은, 장문(長文)의 해명의 글을 써서 측근을 통하여 그 교회에 보내야만 했다. 저 유명한 고린도교회-갈라디아교회-에베소교회-데살로니가교회-로마교회들이 다 해당 교회들이었다. 여기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들면서, 일관되게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을 역설하였다(롬4:1-5참조).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한 의‘에 의하여서만 얻게 됨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바울은 믿음에 의한 구원의 필요한 실재적인 내용들을 언급한다. 매우 쉽게만 들릴 수 있는 구원론이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강조한 것이다(10절). 예수의 ’에바다‘의 은혜를 받으면 성취될 내용들이다!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9-10,13절 참조)


☞ 바울의 구원론의 특징(特徵)을 좀 더 들여다보자 

1) 율법에 의한 구원을 거부했다. 본질상 인간의 행위를 밑받침하고 있는 율법이 인간에게 구원을 안겨준다는 것은, 결국 구원이 인간의 자기 의와 행위나 공적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논리를 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는 원천적으로 외면하는 것이어서 부적합한 것이다. 


2) 율법에 의한 구원론은 자칫 인간의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하고, 영웅호걸의 승리담을 추출하게 하는 등의 인간 승리의 경험담 위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바울은 이 부분의 허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30:11-14에 나타난, 옛 메소포타미아의 전설이나 길가메쉬처럼, 선사시대 영웅들이 하늘로 올라가든지 또는 바단 건너편 먼 나라의 신(神)들을 만나서든지 해서 영생을 얻는다는 등의 모험적 허위적 위험에까지도 빠져들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5-7절 참조).


3) 구원을 안겨 줄 말씀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내게 가까이 있고 내 입에 있으며 내 마음에 있다’ 이것은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가 곧 나를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믿는 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9절). 즉 믿는 자에게 구원은, 새로운 어떤 일을 해야 가능한 것이 아닌, ‘이미 예수 안에서 주어진 실재’이다. 따라서 그런 현실을 안겨 준 예수를 내 마음으로 믿고 내 입으로 주이심을 시인하면, 구원은 나에게 안겨지는 것이다(9-10절,9:30 참조). 


4)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상호 불가분리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활동은 이것들을 통하여 작용되기 때문이다(고전12:3, 빌2:9-12절 참조). 그렇다. 믿는 마음과 입술의 고백은 구원을 불러온다. 누구든 믿는 마음과 신실한 고백으로 주를 부르면 구원받는다!


☞ 우리 주변엔 듣지 못하고 전파하는 자가 없어서, 믿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못하는 이들이 많다. 비록 듣는다고 다 순종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은 역시 너무 아름답다(14-16절 참조). 들음에서, 그것도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나고 구원의 문이 열린다는 점에서, 우리의 복음 선교는 여전히 뜨겁게 계속되어야만 하겠다(17절). 


o 에바다의 신자, 에바다의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구원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성취해야 얻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날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를 내 마음으로 주로 믿고 그의 주이심을 입으로 시인하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내 마음과 귀와 입이 먼저 주 예수와 그의 말씀에 항상 깨어 반응하도록 살아야 한다. 


경계하자. 악과 죄를 주관하는 귀신들은 여전히 우리의 눈이 못 보게, 귀가 못 듣게, 입이 닫히게 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런 귀신들의 도전에 저항해야 한다. 예수와 그의 말씀에 에바다 되는 일이 왜 중요한가? 바로 온 세상의 그 어떤 장벽도 뛰어넘게 하는 능력이 거기에서 나오고, 사람과 시대를 살릴 구원의 능력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가 온 세상의 주되심을 한 마음으로 믿게 되고 선포될 때, 남북의 평화통일은 필히 따라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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