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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씨뿌림주일

관리자 2018-04-04 (수) 15:03 6년전 1383  

본문) 요 9: 1-11, 민 9:15-23, 행 26: 1-23 / 씨뿌림 주일

 

오늘 주일은 마침 우리 총회가 제정한 씨 뿌림 주일이다. 새 봄을 맞이하여 대지에 뿌리는 각종 씨앗들은 무엇인가? 그 메뉴는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다. 씨앗은 생명체요 부활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씨앗은 대지 위에 떨어져 흙에 묻혀 썩어 죽게 되면서 그 처음의 형체를 잃게 되겠지만, 그러면서 그 씨앗은 전혀 다른 형체를 가진 생명체로 변화되어 세상에 제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신선한 공기, 밝은 태양, 다양한 기후 변화를 통한 연단, 그리고 농부의 집중적인 손길을 받으면서, 자기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기를 닮은 또 다른 씨앗을 품은 열매들을 제공하면서, 자기를 길러준 농부와 자기를 소비할 수많은 생명체들을 기쁘게 한다. 이 얼마나 신비(神秘)롭고 경이(驚異)로운 부활 생명체의 선순환(善循環)의 모습인가! 

 

예수는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씨앗)로 오신 분이시다. 무슨 밀알이셨나? 바로 부활과 영생의 씨앗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물론 일반 인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와 다른 것은 죄(罪)의 유무에서 드러났다 

 

죄인은 죄인을 낳고 의인은 의인을 낳지 아니한가? 이단 교주들처럼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죄인들이 자기를 죽지 않을 부활의 주로 선전하는 것은 무언가? 기만이며 사기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만이 유일한 의인이어서, 그의 영을 받은 이들만이 그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부활체의 생명을 얻어낸다. 예수 부활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생명체를 생산해 내기 위한 씨앗이다. 그를 몸과 영으로 받아내야만 그의 생명이 내 안에서 자랄 수 있다. 그 작업을 해야 한다.  

 

예수의 부활은 그런 의미에서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이제는 키워내야 한다. 씨앗이 성숙한 열매로 결실하도록 인내하며 거름 주며 돌보며 키워내야만 한다. 이것이 예수의 씨를 몸으로 받은 이들의 엄중한 사명(使命)이다. 

         

성서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이 예수의 씨앗을 받으면서 거듭난 인물들이었다.  

예수의 씨앗이 가슴에 떨어진 인간과, 세상의 씨앗이 떨어진 인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예수의 씨앗을 받은 이들은 자기와 육정을 위한 삶에서 떠나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와 자기 육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삶을 집중한다. 

그러니 어찌 삶의 모습이나 가치관이나 열매들이 같을 수 있겠는가? 

 

오늘 세 분문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부활의 놀라운 소식들을 전하고 있다 :

① 부활의 주이신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 빛으로 당신을 계시한 모습을 보이셨다.

② 그 부활의 씨앗(빛)을 받은 이들은 삶에 큰 변화를 경험하면서, 그 부활의 빛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소명자(召命者)의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이제, 이 두 가지 측면으로 부활의 은총에 참여해 보자.

 

o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활의 실재는 낡은 삶과 틀을 새롭게 하시는 빛(The Light)이다. 

 

1) 복음서에 나타난 성자 예수의 부활의 실재는 맹인을 눈뜨게 하는 빛으로 나타나셨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맹인이었다(요9:1). 그래서 이스라엘 신앙인들의 논쟁거리가 된 불쌍한 존재였다(2절). 

☞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런 의식구조는 당시의 율법 종교가 얼마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에 젖어 있으며, 그러기에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신학적 논쟁에 빠져서, 고통 받은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비생산적 종교집단(제자들 포함)이었음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누구의 죄 값이냐’라는 수평적인 시각은 아무리 토론해도 그 답이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드러낼 사람이다’는 예수님의 수직적인 시각은(3절) 전혀 다른 생산적인 차원의 해답을 도출(導出)하기가 가능하다. 그렇다. 우리의 시선을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행위에 집중하는 모습은 모든 신앙인이 교과서처럼 배워야 할 일이다. 부활의 주 예수님은 어둠에 사는 이들의 눈(시각&안목)을 밝혀 주시는 일을 위한 세상의 빛이셨다(5절) 

 

어거스틴은 이 맹인을 ‘흑암 속에 살아가는 인류의 대표’로 보기도 했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 맹인 된 인류는 부활의 예수로 인해 다시 보게 된다. 특히 땅의 흙과 당신의 침(기운)을 혼합시켜 그의 눈에 바른 치유 방법이 매우 독특한데(6절), 이는 창2:7의 인간을 생령체로 창조하신 내용을 묵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동시에 그렇게 눈뜬 이는 땅(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하늘의 메시지도 부여 받았다고도 보인다. 

 

2) 출(出)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난 성부 하나님의 실재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다. 이는 부활체험자들에게 열린 새로운 영적 지평(地平)이었다. 빛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기 시작한 무리들이 된 것이다. 이 때부터 하나님은 마치 목자가 그의 양들을 인도하듯, 새 역사를 시작한 그의 어린 백성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분이 되셨다(14:19-20,24절). 그 바람에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어둠에 대한 두려움도, 길 잃은 실종에 대한 공포에서도 자유하게 되었다. 그것도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광야 4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말이다. 

 

이스라엘은 이 빛의 이끄심을 <여호와의 명령>으로 인식했다(18-23절). 거의 매 구절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행진했다고 한다(18-20,23절). 그 바람에,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가고 머물며 이동해 갔다. 

 

특히 그들의 장막의 중심에는 이동성(移動性) 성막(교회)이 있었는데, 여호와의 빛(불과 구름기둥)은 언제나 그 성막 위에 불 모양으로 계시며 이동하게 하셨다(15-17절). 이 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예배 장소인 성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함을 지시한 일이다. 

 

3)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울이 만난 성령 부활의 실재도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13절). 그 빛은 부활하신 예수의 얼굴에서 비치는 빛이었다(계1:16절 참조). 그 빛은 인간의 모든 삶을 환히 꿰뚫어 보시는 빛이었다(26:14-15절). 그래서 박해자 바울 행태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새로운 방향까지 제시할 수 있었다(16-18절). 그래서 박해자 바울로 하여금, 삶을 돌이키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의 빛이었다.

 

o 부활의 씨(빛)를 받은 이들은 그 때부터 자신이 받았던 그 빛을 세상에 비추기 시작했다.  

 

1) 복음서에서의 맹인은 빛 되신 예수를 통하여 육체와 영혼의 눈이 동시에 뜨게 된다. 주님의 예고대로, 부활 예수가 베푸신 빛이 그 안에 들어가면서 그는 신체적 치유는 물론 보내심을 받은 소명자로 거듭나게 되었다(7, 11절 참조). 예수가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임을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맹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인생이 된 것이다. 비록 주변의 제재와 압박도 있었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2)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불기둥 구름기둥의 빛은 온갖 광야의 위험과 방황과 극심한 기후 변화에도 다시없는 안전한 보호였고 피난처였으며 나침반이었다. 믿고 순종하여 따르는 자들의 마음과 삶의 걸음걸이를 규정짓는 지침이었고, 어떤 집단적 불만이나 갈등도 잘 융합해내는 신비한 능력이었다. 모처럼 에덴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돌봄과 사랑의 회복을 맛보면서, 하늘백성으로 자라게 하는 광야교회의 목자였다.

 

이런 모습은 부활의 빛 아래 사는 백성들은 어떤 광야 같은 고난의 현장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에 순종하면, 결코 망하지 아니하는 무리들임을 온 세상에 보여 준 것이다. 즉 인간에서 있어서 가장 안전한 삶은,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인내와 복종으로 그의 돌보심을 받는 데에 있음을 잘 보여 준 시범이었다.

 

3) ‘해 보다 더 밝은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를 만난 사울(바울)은 그 때부터 그가 그동안 줄곧 박해해왔던 그 예수의 종과 증인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상대해서 말이다(16-17,20절). 어떤 일을 위해 일하게 된 종이었나? 그가 하늘빛인 부활의 빛 가운데서 본 것을 전하는 일이었다(19절). 즉 부활신앙을 통하여 그들의 눈이 뜨면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최후에는 하늘 기업을 얻게 되기 때문에(18절), 바울은 그를 위해 완전한 부활 전도자로 나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부활 세계를 확장해가는 길은 아주 험한 고난의 길이었다. 극심한 동족의 핍박과 송사가 따라왔기 때문이다. 특히 바리새파는 원래 부활을 잘 믿는 자들이었는데도(6-7절), 바울을 그토록 박해하는 것은 부활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는 자기들이 십자가에 죽인 나사렛 예수가 부활의 주인공이라는 점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죄인으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 만민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입장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은 부활의 그 주를 직접 목격한 자였고, 또 예수의 일련의 고난과 부활의 전 과정은 선지자와 율법의 예고에 대한 성취의 열매로 인한 것이 분명하였기에(22-23절), 그는 자신에 부여된 알리는 소명을 목숨 걸고 받들 수밖에 없었다. 부활의 충만한 영성 때문에, 그는 지금 죄수의 몸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하는 순간이었지만, 그의 가슴은 그 증언을 듣는 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자기처럼 부활의 주를 영접하여 모두가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목숨을 건 확고하고도 뜨거운 부활 복음의 증언은 결국 세계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부활신앙의 반석 위에 굳게 올려 세우는 기틀이 된 것이다. 

 

o 결론은 이렇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부활의 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과 그의 일하심에 대하여 눈이 떠야만 한다. 저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맹인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세상의 죄악과 탐욕의 문화로 맹인이 된 더러운 눈을 씻고, 예수와 그의 밝은 빛의 세계에 눈이 떠야 한다. 

 

그 빛을 본 사람들은 또 다른 큰 삶의 변화들을 견인한다. ‘오직 진리와 생명을 위해 일하라’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부활 경험은 개인만을 깨우지 않는다. 바울처럼 세상을 깨우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민족을 새롭게 깨워서 진리와 의의 백성이 되게도 한다. 물론 고통도 따른다. 그러기에 그 고통 때문에 부활의 빛은 더욱 빛을 드러낸다. 우리도 바울의 부활의 영을 공유하여 어둠을 밝히는 증인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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