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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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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1-03-02 (화) 13:56 3개월전 146  

분문) 눅 15:11~32, 호 14:1-9, 요일 1: 8- 2: 6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신생(新生)의 기쁨을 맛보는 때였다. 우선은 3.1절 독립만세 운동을 통하여 살아 있었던 당시 우리 조상(祖上)들의 역동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풍성히 내린 봄비로 우리의 대지(大地)마저 생명의 연푸른 옷을 입고 출현하는 감동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는 모든 국민들과 함께, 그 동안의 짓눌린 멍에를 떨쳐내고 희망의 새 옷을 입기에 매주 적합한 조합인 듯해서, 기분이 참 좋다. 

 

그런데 우리 아시아의 이웃 국가인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 소식은 우리를 매우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지금 봄기운에 가슴 설레지만, 저들은 지금 냉혹한 정치적 겨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군부의 쿠데타 재발(再發)로 인하여 합법적인 정권이 강탈되고, 그로 인한 국민적 저항, 그래서 파생되는 억압의 악 순환적 행태는 지금 온 세계를 크게 당황하게 한다. 대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렇게 군부가 합법적 정권을 전복하면서, 군국주의 국가로 들어가고 있는가?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도 구금되어 행방이 요원하고, 쿠데타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 운동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어서, 너무도 가슴 아프다. 특히 군경(軍警)이 저항하는 백성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모습은, 41년 전, 우리에게 있었던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무장 군인들의 시민들을 향한 총질을 다시 보는 듯하여, 충격을 금할 수 없다. 그곳 민주화운동의 저항자들은 이미 자신의 귀한 목숨을 내걸고 싸우기 시작한 상태라고 한다. 

 

일부 젊은 저항자들은 SNS 인터넷망을 통하여, 우리 한국 대사관 앞에 몰려와 무릎을 꿇고, ‘한국이 자기들의 저항운동을 응원해 달라’고 절규하기도 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우리 한국어를 구사하면서 말이다. 저들은 우리를 이미 잘 알고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를 자기들의 친구로 알고, 우리에게도 협력과 구원의 손길을 뻗은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의 선 자리가 문제가 되었다(눅10장 참조). 제사장의 자리인가, 레위인의 자리인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의 자리인가?

 

저들은 21세기 ‘강도와 불한당을 만난 이웃’이 분명하다. 강도만나 신음하는 이웃으로 미얀마가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우리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달라는 SOS요청을 보낸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기도부터 보내자. (☞가능하면 우선 우리 모두, 아래의 제목으로 미얀마 사태를 위한 공동의 긴급 합심기도 시간을 가져보자 – 일어서서든 앉아서든 )

 

☞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곳 미얀마인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자. 우선은 폭력적인 군부세력들의 힘을 빼주시고, 그들 폭력자들의 생각과 마음들이 역사와 국민을 두렵게 생각하면서, 마음과 뜻을 회개하고 돌리도록 기도하자. 그곳 국민들에게는 용기와 지혜를 뜨겁게 부어주시고, 국민 모두가 하나된 비폭력 저항을 통하여 승리를 맛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이웃국가들의 압도적인 저항 연대도 모아져서, 평화로이 민주의 봄을 맞이하도록 기도하자. 부디 이번 기회가 그곳의 군인들의 정치 개입의 최후가 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자. 아멘!

 

☞ 마침 이번 사순절은 잃은 자(버림당한 자/빼앗긴자/강도만난 자)를 찾아나서는 하나님을 만나고 배우는 기회인데, 우리에게 이런 강도만난 이웃 미얀마와 수난을 당하는 그 백성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게 하신 일은 그들을 살리시려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하다. 미얀마의 민주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 모두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저항의 연대를 강화시켜가자.

 

오늘도 주님은 ‘잃은 자’를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다 크고 깊은 마음으로 우리를 계속 이끄신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위, ‘두 아들 이야기’, 혹은 ‘두 탕자(蕩子)들 이야기’라고도 일컫는 복음서 내용들이 우리의 신앙에 도전을 주신다. 

 

눅15장의 복음서 이야기의 주역은 둘째 아들도 아니고, 첫째 아들도 아니다. 바로 그들의 아버지가 주역(主役)이다. 그 아버지를 대하는 두 아들의 태도의 변화에 따라서, 둘째와 첫째 사이의 운명과 처지가 심각하게 재편(再編)되는 모습을 깊이 있게 전하는 내용이 오늘 복음서의 내용이다. 그러면서 우리 현재의 신앙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 지도 심각하게 묻는다. 

 

호세아서는 복음서의 주인공인 아버지의 마음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다. 곧 집나간 아들의 귀환(歸還)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깊은 속마음을 전한다. 그러면서 그런 아버지의 마음에 부응하여 자기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돌아온 아들(자)에게, 아버지가 어떠한 준비된 배려와 축복들을 제공하시는 지를 풍성히 전하여 준다. 

 

요한서신의 내용은 교회 시대를 사는 두 아들 이야기를 재현(再現)하여 전한다. 하나는 저 둘째 아들처럼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와,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고 새 자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은 이미 영적인 특별한 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죄와 심판에서도 해방된 체 살고 있다는, 소위 구원에 대한 자기 확신에 빠져 살아가는 영지주의(gnosticism/靈知主議)자들이다. 이들은 지금 현대교회의 또 다른 첫째들로 존재하고 있다.

 

복음서를 다시 주목(注目)해보자. 집을 나갔던 둘째나 집을 지키던 첫째 모두에게는 다 같이 문제들과 가능성들 함께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갈라놓는 확연한 분기점(分岐點)이 따로 있었다. 바로 아버지를 대하는 두 아들들의 아주 대조적인 다른 태도들이었다. 

 

무슨 차이인가? 나갔다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의 주권과 영역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자아(自我)를 그 앞에 내려놓은 상태로 아버지께 나아갔다. 전적인 순종의 아들로 거듭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내내 집안에 잘 있었던 큰 아들은, 상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아버지에게 돌변(突變)하며 저항하고 나왔다. 불순종의 아들임을 선보인 것이다. 돌아온 동생을 얕잡아 보았고, 아버지의 태도를 비판하고 등지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 그러니 상상해 보시라. 그 후 이런 그들의 결과는 어떻게 이어질까? 분명히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는 대역전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까?’(눅13:27-30절 참조)

 

☞ 두 형제들의 이런 모습과 그 결과는, 현재의 내 신앙의 흐름을 점검하는 데에 큰 경고를 준다. 둘째는 아버지를 향하면서부터 치욕적인 타락에서 벗어나, 회복과 새 존재로의 영광스러운 변화(變化)쪽으로 급속히 나아갔다. 반면에 첫째는 돌아온 동생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행동에 딴죽을 거는 바람에, 기존의 견고한 위치에서 급속하게 퇴보(退步)와 타락과 불의(不義)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다. 실로 놀랍고 무서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일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첫째는 평소는 아버지를 잘 모신 효도하는 아들인 듯 했으나, 실상은 아버지의 마음과 고민과 소원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체, 오직 자기만족만을 바라면서 아버지 곁에 머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바람에 둘째 가슴의 아버지는 보름달이었다면, 첫째 가슴의 아버지는 초생달에 불과했다. 누가 아버지의 영광을 누리겠는가? 첫째의 부끄러움도 그 마음에 아버지가 없었기에, 스스로 심판의 함정에 빠져든 거였다! 

 

이를 위하여, 좀 더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 이 비유에서의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를 말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아버지’를 온전히 전하시고자(요5:19-20참조), 이 두 아들을 상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를 듣는 청자(聽者)들은 바로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행보를 깊이 배우면서, 자신의 설 자리를 교정하는 일을 해야 한다. 

 

첫째, 비유에서 나타난 둘째 아들의 면모(面貌)부터 다시 보자(12-19절 참조). 

1) 그는 오직 자기 것만 생각하는 자였었다. 자기 자신, 권리, 자유, 미래 실현 등에만 집중했다. 그러면서 가족 공동체의 공존과 유지에 관하여서는 아주 무관심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권리나 감정 등에도 한없이 무심했다. 그 바람에 그는 아들로서는 예의와 상식을 무시한 ‘재산의 분깃’을 감히 아버지에게 요구하기도 했었다(12절, 집회33:20-24참조). 

 

2) 아버지의 것을 받아내자마자, 마음껏 누리면서 타락의 길로 치달았다. 집과 가족과 동족과도 떨어져 이방 지역에서도 살아보았다. 그러면서 숱한 죄에 빠져서 돈과 죄악이 주는 호사도 누려봤고, 실패와 타락에서 온 범죄의 비참한 결과도 뼈저리게 체험도 하였다(13-16절 참조). 

 

3) 그런 인생의 심한 부침(浮沈)을 경험하면서, 그에게는 비로소 새삼스럽게 보는 게 있었다. 그것들은 온통 아버지에 대하여 새롭게 보게 된 것들이었다. 모두 세 가지였다(17-19절). 

☞ ① 아버지 세계에 있는 생명을 살리는 풍족함이 보였다(17절). ② 그런 아버지를 몰라보고 떠나와서, 자신은 지금 죽게 될 정도로 비참해졌다(18절). ③ 살 길은 회개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자기를 ‘자식이 아닌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부친께 요청 드리는 것이었다(19절). 

 

둘째, 아버지의 대응(對應)은 상상을 넘어서는 파격적 환대(歡待)였다(20-24절, 호14:1-8).  

1) 마치 아들의 귀환을 예정하신 듯, 깊은 연민(憐愍)으로 나간 아들을 목마르게 기다리셨다. 어느 날 멀리 오고 있는 아들이 보이자, 달려 나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맞이하셨다. 아들의 죄의 자백(自白)도 이전에, 이미 용서부터 시작한 아버지였다(20절). 아들의 죄의 고백이 떨어지자(21절), 아버지는 그 고백의 나머지도 다 듣기도 전에, 아들의 신분 회복과 다시 찾은 아들을 향한 성대한 환영연(歡迎宴)을 베푸셨다(22-23절). 파격(破格)의 연속이었다! 

☞ 제일 좋은 옷/손 가락지/신발 제공/살진 송아지 파티 등이 아들에게 제공되었다. 

 

2) 아버지가 그런 놀라운 환영 행사를 펼친 이유는, 그 아들의 돌아옴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24절, 32절). 새 아들을 얻는 것이다.

☞ 아버지 자신의 기쁨만을 위한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돌아온 아들을 향한 무한한 배려였다. 가정의 적응에 어떠한 걸림돌이 없도록, 아들 자격회복과 위치를 보다 확실히 공인되도록 하기 위한 아버지의 섬세한 배려였다. 아들의 재출발을 영원히 확실히 하게 하고자 하심이다. 

 

3) 예언자 호세아는 일찍이 하나님의 그런 따뜻한 마음, 곧 여호와께 배신했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마음과, 또 돌아온 그들에게는 삶을 아예 변화시킬 복들까지 부여될 것에 대한 약속들을 선포했었다. 호세아 본문에는 그런 내용들이 가득하다.  

 

① 먼저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돌아올 것을 요구하셨다. 그들의 참담한 현실은 모두가 그들의 불의 때문이었기에(1절), 이제는 지정의(知情意)가 기반이 된 완전한 회개로 돌아올 것을 권하셨다(1-3절). 돌아올 때는 보장이 약속된 말씀을 믿고, 상(傷)한 심령이어야 한다. 이웃 제국의 군사력을 의지하지 말고, 우상에게 매달려서도 안 된다. 오직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심정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치 복음서의 둘째의 돌아옴처럼 말이다(눅15:18-19, 시51:7참조).

 

② 그러면 모든 상하고 빼앗긴 것들에 대한 회복과 보상은 전적으로 여호와께서 해주신다(4-8절). 참된 회복과 풍요는 돌아온 자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여호와만 가능한 일들이다(롬3:10-18, 엡2:8-9). 대체 어떤 은혜와 자비가 제공되는가? 반역을 고치고, 진노가 떠나며, 이슬처럼 복을 받아서 꽃이 피고 뿌리가 내린다. 꽃과 향기가 가득하여, 돌아온 자들이 살기에 부족하지 않도록 풍성한 곡식과 극상품의 포도주를 즐기면서, 그때부터는 자신이 이제 여호와의 열매됨을 온 세상에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서의 둘째가 누린 복과 같다. 

 

셋째,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둘째의 그런 감격의 재회에 딴죽을 걸고 나왔다(28-30절,요일1:8-10,2:4참조). 그는 밭에서 돌아와, 갑작스러운 집안의 대잔치 판의 경위를 접하고서, 그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처사(處事)에 반발했다. 집나가서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과 흔들림 없이 집과 아버지를 지켜온 자신에 대한 처우의 형평(衡平)성 문제를 넘어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28-30절). 그 바람에 동생에 대한 경멸과 무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비판의 감정에 빠져들면서, 그 잔치판과 아버지를 괴롭게하는 주역이 되고 말았다. 

 

1) 이 첫째는 당시 유대교 정통세력인 바리새인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신앙수준이 못되는 모든 자들을 경멸하며 죄인으로 몰았다. 예수가 그런 죄인들과 가깝게 지내니까, 예수까지도 배척한 것이다. 실로 비유에 나타난 첫째 아들의 모습이다. 

 

2) 이들의 치명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가까이서 모시면서도, 실상은 그 아버지의 마음과 뜻에는 무지하고, 오직 자기 유익 여부를 따지며 지내온 바람에, 그는 아버지와 집을 대변할 참 자식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신앙의 치명적인 허점을 첫째와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교회시대에 접어들면서도, 뜻밖에도 교회 안에까지도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3) 바로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교회 신앙을 헤치는 주역이었다. 이점은 오늘 서신서 본문의 주류를 이루는 내용들이다. 교회는 이들을 분별해내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이런 편지를 작성하여 보낸 것이다.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이 시대를 이어가며,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오고 있잖은가 싶어 고민된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의 최대의 이단이었다. 요한 서신들은 모두 그들의 위선과 거짓 신앙에 대한 비판과 경계에 관한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외형상 다소 차원이 다른 신앙의 풍모를 보이지만, 그 내면엔 십자가의 예수가 없고,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되기에 육신적 책임은 무시하는 이원론(二元論)에 빠져 사는 무리였다. 이들에게는 신앙적 낯선 모습들이 많다. 

 

기도와 말씀에 복종하는 헌신이 없다. 고통 하는 이웃들을 섬기고, 잃은 자들과의 고난에 연대하는 행동에는 아예 무관심하다. 회개도 없고, 봉사도 없다. 하나님 사랑만 말하지만, 이웃 사랑까지는 전혀 이어지지 못한 믿음, 곧 행함이 없는 믿음, 예수가 중심이 되지 못한 모습만 보인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외면한 첫째 아들의 냄새만 가득할 뿐이다. 

 

☞ 사순절 셋째주간을 맞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위선적 신앙을 극복할까? 우리의 시선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는 일에 집중하면, 극복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내 중심. 형편중심의 신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디 조심하자. 첫째의 영성에 포로 되면, 희망은 없다. 반드시 둘째의 영성으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 아버지께 돌아가야만 한다. 살길이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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