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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부활주일

관리자 2018-03-28 (수) 17:56 6년전 1407  

본문) 눅 23:50-24:12, 출 14:15-31, 계 1:10-18

 

기독교 신앙에는 몇 가지 성격의 신앙 메뉴들이 있다. 창조(創造)신앙, 구속(救贖)신앙, 부활(復活)신앙, 종말(終末)신앙, 재림(再臨)신앙 등이다. 그 중에 가장 최고봉(最高峰)에 있는 신앙을 말하라면, 무엇일까? 그 답은 역시 부활(復活)신앙이다. 

 

그 까닭은 예수의 부활이 발생하면서, 인간은 인생 최대의 숙제인 죽음이라는 최후의 한계를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믿음을 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은 예수의 부활을 접하면서 영생(永生)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부활이 생긴 것이 아니라, 부활이란 실체를 예수를 통하여 확인하였기에 비로소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부활 자체의 실존(實存)은 언제부터 였을까? 창조 질서의 핵심부분으로 존재하였다고 본다. 적어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제거된 에덴에서는 부활의 찬란한 빛이 가득한 곳이었을 것이다(창1:2참조). 즉 죽음이 감히 엿볼 수 없어서 아담 부부가 죽음에 대한 염려와 불안에서 해방된 삶을 한껏 누리며 살았던 무대가 에덴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곳의 생태계는 죽어서 변화된 몸으로 다시 사는 곳으로 단장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언제부터 창조주의 솜씨인 부활의 밝은 빛이 인간의 마음자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일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첫 사람들이 에덴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에 의해 사전에 예고된 죽음이란 공포의 먹구름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였다(창2:17). 게다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이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로 인하여 영생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아예 차단하시는 바람에(창3:22-24참조), 인간은 희망이 아닌 암담한 미래의 절벽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인간은 ‘다시 생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죽음은 곧 마지막이며 끝장이다’는 치명적인 도그마(dogma)에 떨어졌다. 죽음이 가장 두려운 실세가 되었고, 인간을 가장 절망하게 만드는 주체가 되었다. 그 바람에 인간은 죽음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주눅 들고 비겁해지며 소심해진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히2:15). 늘 어둠과 저주와 불안의 먹구름의 종으로 살아온 것이다. 평화와 영생을 주는 부활의 세계가 여전히 엄존한대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불행한 인생들이었다. 

 

그 바람에, 마귀와 어둠의 권세자들이 이 죽음이라는 허상(虛像)을 부리는 주체가 되어, 양심의 가책으로 허약해진 인류를 마음껏 유린하는 어처구니없는 시대가 지속해 온 것이었다. 최소한 언제까지였나? 바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였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그 치명적인 장벽을 깨뜨리신 때까지였다. 그러기에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닫힌 눈과 불행한 마음을 어둠과 절망의 늪으로부터 건져준 최고의 기쁜 소식(福音)이다!!!

        

그렇다면, 그 부활의 실체(實體)를 나의 것으로 접목할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믿음(신앙)이다(요1:12-13참조). ‘부활이 있음’에 대한 믿음, 예수와 함께라면 죽음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믿음,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첫 열매가 된다는 믿음이 바로 인간이 부활의 실체를 접하게 하는 열쇠다(고전15:20). 아울러 그 부활의 여러 증인들을 통하여 부활 세계를 접근하는 일도 큰 도움이 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한, 다음의 말들을 참조하면 종합적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고전15:16-18참조).

 

우리는 이제 이 부활의 실재(實在)에 눈이 떠야한다. 지금도 부활의 영은 우리 안팎에서 매우 활발하게 일하신다. 이제 창조 때부터 존재한 부활이 인간의 부활로의 전이(轉移)로 그 민낯을 드러나기까지, 부활이 어떻게 현존했는지를 살펴보자. 오늘부터 계속 되는 세 본문들은 우리와 함께하는 그 부활을 생생히 만나게 해 줄 것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1) 본문은 죽음의 영역인 무덤이, 빌라도에 의해서 완전히 사망했던 예수를 더 이상 가두어 둘 수 없어서 빈 무덤이 되어야만 했던 놀라운 현실을 전한다. 본래 그 무덤은 당시 국회의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 시신(屍身)을 위해 제공한 것인데(눅23:53절), 장례 후 사흘째 새벽에 두 명의 하늘 천사들이 그 무덤을 방문하면서, 그 무덤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던져주는 빛을 주는 곳이 된 것이다. 이유는 그곳에 누우셨던 예수는 천사의 도움을 받으며 사망으로부터 일어나(하나님이 일으키심), 그곳을 ‘빈 곳(허망한 곳)’으로 만드시고 세상 밖으로 나가셨기 때문이다. 

 

2) 이 빈 무덤의 충격은 그곳을 찾은 여인들에게는 사랑하는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차원에서의 경악(驚愕)하는 순간이었지만, 그러나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환희(歡喜)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듯이, 아담 이래 인류를 줄곧 괴롭혀왔던 죽음의 정체도 허망한 것이 되었으며, 죽음이 왕 노릇하던 시대 역시 끝났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런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는가!!!

 

3) 그 <죽음의 죽음>의 시대가 열렸음을 생생히 목도하면서 확인해 준 인물들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다양한 주인공들이다.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과 제자 베드로(12절)였다. 이들은 물론, 처음에는 ‘죽은 예수’를 찾았다(3절). 비록 생전에 예수의 부활 예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아예 믿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들은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산 증인도 되었고(10, 눅23:55참조), 그 죽음의 세력이 예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낼 수 없었음을 확인하였던 증인도 되었다(24:2-3). 이것은 인간들이 죽음의 한계를 넘어 생명의 부활에 눈이 뜨는 순간이었다! 

 

4) 천사들의 힐난(詰難)과 증언이 뼈아프다(5-7절). 그 증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세 차례 예고(豫告)말씀을 회상시키는 것이었는데(마16:21,17:22-23,20:17-19 참조), 그들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대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첫 수난 예고 때, 베드로의 강한 반발과 저지가 있었는데(마16:22), 이것은 부활은 못보고 죽음만보고 살아온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실상을 대변한 모습의 전형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사전 예고는 예수께서는 생전에부터 이미 부활의 세계를 내다보고 계셨고, 이제는 당신이 그 세계를 먼저 열어 가실 것을 예고하셨음을 재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출애굽기(구약)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1) 본 홍해 도강(渡江) 사건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민족적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준 기록이다(14:31참조). 그들은 홍해 도강이라는 현장 체험을 통하여, 온 백성이 집단적(集團的)으로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남(부활)을 통하여 여호와의 큰 능력을 보았고, 경외하게 되었으며, 믿게 되었음을 전한다. 

 

2) 도강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피압박자를 누르고 자기의 노예로 붙들려는 억압세력에게는 흑암과 죽음을 선고하시고(20절), 그런 억압과 속박에서 해방과 자유를 구하며 찾는 무리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을 베푸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심을 보여 주셨다(20, 30절). 그런데 이때 심판의 갈림길로 사용된 지표(指標)가 바로 홍해(紅海)라는 바다(물)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이 홍해의 물을 통하여 사망과 부활의 세계로 당신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① 홍해 도강을 하기 이전의 이스라엘과 도강 이후의 이스라엘이 같은가, 다른가? 결코 같을 리 없다! 그들은 도강하면서 이전의 애굽에 매달려 살아왔던 이스라엘이 죽는 체험을 했고, 도강 후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백성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이 출애굽의 부활 사건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되는 민족이 되었다

 

② 바울은 고전 10:1-2에서, 이 도강 사건을 주목하며 집단(集團) 세례 행위로도 보았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렇게 홍해 도강을 집단적(민족적) 세례로 본다면,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홍해 도강 사건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탄생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의 세례통한 죽음과 부활 경험의 전거(典據)가 됐기 때문이다(롬6:3-5참조). 그렇다. 우리 모두가 받은 물 세례에는 이 홍해 기적의 표징이 담겨 있음과,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가장 확실한 증표임을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하겠다.  

 

계시록은 어떻게 보아야할까 

 

1)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현재 어디에 계시며,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연계되어 있는지를 전하고 있는 내용이다(11-12절) 

 

2) 천상의 주(主)이신 분이 자신을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라고 밝히신 것은 그가 지금 영생(永生)의 주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17절). 

 

3) 동시에, 장로 요한을 그의 나라로 부르셔서 땅에 있는 고난당하는 당신의 교회들에 대한 관심사를 전하게 하시는 모습은, 주께서 하늘에 오르셨어도 우리 세상과 당신의 몸된 교회들의 모습을 지켜보시며, 미래를 대비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계시하신 것이다(11절 참조). 

 

4) 특히 지금의 당신을 ‘전(前)에 죽었었던 이’로 밝히는 것은 매우 특별한 정보다(18절). 그것은 하늘 영생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보전하신 체로 하늘에 계심을 밝힌 내용이다. 그것은 그 죽음의 흔적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이었음도 의미한다. 동시에 죽음과는 상관없는 그 나라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경험하고 또 부활을 통해 이겨내신 분으로 존재하신 일은, 그가 이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심판하실 열쇠를 보유하신 유일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결론은 이렇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부활 세계에 눈이 떠야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을 견인하고자 한 일임을 확실히 믿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고 우리의 것이 되게 해야만 한다. 특히 개인 차원의 부활만이 아니라, 집단 공동체 차원의 부활 역사에도 우리의 눈이 떠야 하겠다.

생각해보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임박했다. 어제의 위기의 한반도가 이제는 세계의 평화를 견인하는 역사적인 현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일은 우리 국민들이 세월호의 처절한 희생과 촛불 혁명의 값진 영적 세례를 통하여 얻어낸 부활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아직도 세상과 인류는 죽음이라는 허상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의 허상을 벗겨주고, 부활의 빛으로 세상을 구원해낼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그렇다. 세상을 이길 믿음과 평화도 그 부활의 세계를 보고 보유하고 누리고 사느냐에 달렸다. 확실한 부활신앙의 사람들이 되길 빈다. 예수 부활의 능력을 한 평생 풍성히 즐기고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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