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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주일- 해외선교주일

관리자 2021-02-03 (수) 17:16 3년전 742  

본문) 눅 4:16~30, 사 61:1-9, 행 4:5-12

 

주현절 다섯째 주일이다. 2월의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설(설날)주일이면서 동시에 본 교단이 제정한 해외선교주일이기도 하다. 하나는 조상과 가족 사랑을 도모하는 주일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그들의 헌신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주일을 함께 맞이하고 있다.

 

설날이면, 흩어진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집안의 어른께 인사드리고, 가족의 정(情)을 나누며, 가족 간의 사랑을 돈독히 하는 아름다운 연대를 강화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민족 풍속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그 나마의 일도,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워졌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떤 식이든, 이 명절의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서 관심과 사랑을 보내고 나누는 움직임을 살려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신앙인일수록 더욱 그래야한다

 

해외선교사들을 위한 우리의 관심과 기도도 식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 해외선교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역시 코로나 때문이다. 적잖은 이들이 현지 사정이 어렵고 건강 문제로 귀국하여 지내는 분들도 많은 듯하다. 임지를 떠날 수밖에 없음이다. 하지만 현지를 지키는 이들의 사정도 더욱 힘겹다. 그들을 지원하는 한국교회의 후원 상태도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후원의 힘들이 마르지 않도록 기도하자.

 

마침 오늘 이러한 두 주일의 개념을 담은 말씀이 복음서의 내용으로 올라와 있다. 예수님의 고향(故鄕) 방문과 그 고향을 찾으신 예수님의 선교(宣敎)가 매우 의미 있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향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보면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사랑과 가족 사랑의 내용이 어떠해야할 것인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선교와 후원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도 함께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은 우리 인간들의 경우와 같은 부분도 있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다. 우리의 고향 방문의 경우를 보자. 대부분은 거의가 친교와 혈육에 따른 용무들 때문이다. 고향을 선교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고향은 이미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또 인척관계로 얽혀서, 선교하기에는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셨다고 본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절). 

 

그러면, 예수님의 고향방문은 우리와 같은 사적인 것이었는가? 아니다. 전적으로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상대로 그 누구도 쉽지 않은 당신의 선교의 첫 발을 내디디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선교는 우리들과는 아주 달랐다. 누가도 예수님의 그런 고향에서부터 선교 행보를 예수님의 선교의 시발점으로 전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고향 선교에 담긴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예수님의 선교를 말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 자신이 선교에 있어서,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그는 먼저 복음 선교사(宣敎史)의 시작이셨고, 모든 선교사(宣敎師)들의 원조(元祖)이셨다. 바로 그의 인간되어 오신 하나님인 성육신(Incarnation)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파송되어 오신 분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팔레스틴의 북부지역인 갈릴리의 나사렛에다 당신의 고향을 두기는 하셨으나, 실제로는 영원한 하늘에다 본향(本鄕)을 두시고 이 인간 세상에 파송되어 오신 하늘나라 선교사이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지상의 고향이나, 가족이나, 이웃들에게나, 심지어 그의 고국인 유대와 이스라엘 백성에게까지도 인간적 이해관계나 감정에 매이지 않고 훨씬 더 객관적이고 보다 자유롭게 열린 마음으로 당신의 ‘하늘 선교’(Heaven Mission)를 수행하실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지상 선교에서 가장 신경 쓰신 대상은, 그의 파송자이신 하늘 아버지였을 뿐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끊임없이 하늘 아버지와 교제를 이어가셨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늘 선교사에 대한 이런 기초적 이해 위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사역의 특성을 보아야한다. 구약의 예언서를 통하여서는, 그를 파송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의 선교지침들도 확인한다. 그리고 서신서를 통하여서는, 성부와 성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선교를 세상 현장에 펼쳐 가게 하시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확인이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의 모든 선교들도 그 바탕에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 본문을 통하여, 종합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바로 ‘희년(禧年/Jubilee) 선교’이다. 이는 곧 ‘주의 은혜(恩惠)의 해’요 ‘사면(赦免)의 해’를 전파하는 선교임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에게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희년 선교의 바탕위에 있음을 말한다. 이 선교의 영적 바탕은 바로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이다. 이것은 정죄와 심판을 바탕으로 한 율법과는 차원이 다르고, 심판의 메시아를 집중한 세례 요한과도 차별을 보일 수 있었던 연유였다. 

 

그러면 희년 선교사로 이 땅에 오신 분인 나사렛 예수가 고향 나들이에서 보여주신 선교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그의 선교의 기반인 여호와의 예언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그 영을 받은 사도들은 그 희년 선교의 현장을 위해 어떤 자세로 임하였는가? 먼저 희년 선교를 선보이신 고향 방문에서 나타난 몇 가지 중요했던 상황들부터 확인한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희년 선교는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약자(弱者)들을 돕는 선교를 지향한다. 약자라면, 어떤 성격의 약자들인가? 특정 영역만을 포함하지 않고, 모든 인간 영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약자들 모두를 포괄(包括)한다. 물론 여기에는 힘의 남용과 교만으로 군림하는 강자들이나, 자신의 불의와 범죄와 힘의 남용으로 심판받아서 약자의 처지로 떨어진 대상들을 포함하지는 않는다(사61:8참조). 이제 말씀을 통하여 그 대상을 확인해 본다.

 

☞ 주님이 친히 나사렛 회당에서 택하여 읽으신 이사야 예언의 내용을 보자(61:1-). 여기에서 주님은 당신의 하늘 선교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시작되고 파송되었으며, 그 선교의 대상들이 누구이며, 어떤 세상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를 상세히 담아 주셨다. 

- ‘주의 성령(聖靈)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禧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참고로, 원 사61:1-3의 내용을 확인해 보면, 조금 더 선교 대상들이 구체화되어 있다. -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여기에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태어나고 밀려나서 힘의 역학(力學)상 그럴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 선상에 빠진 모든 영역의 약자들을 포함한다. 동시에 경제적 약자, 사회적 약자, 윤리적 약자, 생태적 약자, 신체적 약자, 그리고 정치적 약자들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그런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약자의 고통과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불가능한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의 힘의 한계에 빠져 살아가고 있고, 자신의 무력감과 체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 달리 보면, 그들 위에 군림해 온 어둠과 불의와 거짓된 거대한 세력의 휘하에서, 종으로 노예로 천민으로 끌려서 살아 온 무력한 민중(民衆)들이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처지와 환경이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運命)인양, 지내 온 이들이다. 이들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런 낮은 자들이 어찌 하나님의 선교의 일차적 대상이 될 수 있었나? 하나님에게는 지금의 그런 그들의 모습이 원래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창조주인 하나님에게는 그런 그들 모두가, 다 당신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자녀요 백성이며 가족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본래의 모습을 다 아신 사랑의 하나님에게는 그런 그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였을까-! ‘뭔가 새로운 회복(回復)의 기회, 본래의 모습인 정체성을 되찾을 기회가 그들에게도 주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곧 희년 선교가 언제나 그런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본래의 모습과 형상을 회복하고 되찾는 일이 창조주의 깊은 뜻이었기 때문이다. 

 

희년 선교의 열매와 결과물은 주로 다음의 유형으로 나타났다. -기쁨으로, 고침으로, 자유로, 해방으로, 갑절의 보상으로, 보복으로, 위로로, 재건으로, 명예회복이나 새 역할 부여로, 존경 받음으로, 재물 번영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희년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2-7절 참조). 그것은 하나님의 편애(偏愛)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의와 성실의 기초 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8절). 특히 은혜의 열매는 그 후손들의 번영과 명성으로 더욱 세계인의 공인을 받게도 되었다(9절). 

 

☞ 선교는 희년 운동이기도 하다. 창조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는 운동이다. 이제 우리의 시선이 항상 낮은 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있어야 마땅하다. 그들을 돕고 섬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기도와 헌신이 꾸준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세워주신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의 원칙은 ‘선(先)신앙, 후(後)혈통’위에 있다. 가족이나 문중의 이해관계 때문에 선교의 원칙이나 진리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일은 용납되지 아니했다(마12:48-50참조).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희년 선교적 입장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함을 받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율법까지도 받아서 세상 모든 민족들 중에서 영적 우선권을 보유하고 있던, 유대인들부터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당신의 동향인이자 가족들이 살던 곳 나사렛을 향하여 첫 발걸음을 택하셨던 것이었다(16절).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들은 역시 가족과 지역과 종교 우선주의를 고집하였다. 그래서 주님의 거룩한 말씀과 권위의 은혜로움에 놀라워하면서도(22절), 그러나 예수의 행보가 자신들의 기대와 자존심에 관련된 이익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고(23절), 또 예수가 자신들의 신앙적 약점을 비판하는 모습이 확인되자(24-27절), 그들은 즉시 예수를 거부하며 죽이려고까지 하였다(28-30절).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진리와는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우월적 허상에 빠져 사는 지를 잘 보여준 것이다. 그 바람에, 그들에게는 결국 고향을 향한 예수의 그 어떠한 선행도 아예 불가능하게 하였다(막6:1-6참조). 선교의 생명은 방향을 잃지 않는데 있었다.

 

☞ 가족사랑은 매우 귀한 덕목이다. 하지만 성도들의 가족사랑은 그 기반이 하나님의 공의와 말씀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선 하나님 사랑, 후 가족사랑’의 틀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 우리의 가족의 기반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반석위에 세운 가정과 가족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질서가 어긋나면, 우리는 모두를 잃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특정인이나 특정 영역에 결코 갇혀 있지 않다. 예수와 그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서, 끊임없이 물처럼 흘러서 들어간다.(눅4:22-30, 행4:11-12)  하나님의 선교는 본질적으로 온 세상 전체를 하나의 선교지로 보고 활동한다. 이곳이 막히면 저곳으로 간다. 저곳이 막히면 또 다른 곳을 찾아 간다. 이곳이 막혔다고 끝내는 것은 선교가 아니다. 선교는 끝이 없다. 그게 하나님의 선교의 경향이다. 중국선교가 탄압으로 막히니까 태국과 아시아 선교에 뛰어드는 선교사들이 많다. 그게 하나님의 선교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집단으로 배신하자 그 재앙으로 3,6년의 흉년으로 온 나라가 고생할 때, 유독 이방 여인인 시돈 땅 사렙다 과부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녀에게 오병이어의 복을 베풀어주셨다(왕상17:1.이하 참조). 엘리사 시대에는 수리아의 나병환자인 나아만 장군이 수많은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들도 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치유를 받아 깨끗함을 받는다. 그것도 전적으로 그의 믿음과 순종 때문이었다(왕하5:1-.이하 참조). 신앙의 복은 국경선이나 인종적 차별이 없다. 필요한 곳만 있다.

 

예수를 맞이한 고향 나사렛 주민들은 완고했던 그들의 조상처럼, 하나님께 교만하였고 자기 우선주의 입장 때문에, 예수로 실족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마11:6참조). 바로 그 사건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과 사랑을 빼앗긴다. 주님의 선교가 자국민보다는 이방인에게로 돌릴 당위성을 갖게 하였다(30절). 그의 제자들의 경우도 똑 같았다-(행4:5-10절) 

 

부활하신 예수께서, 당시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가장 낮은 자에게 당신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전 예루살렘을 뒤집어 놓으신 일과(행3장), 성령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억압하던 관리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게 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교의 일환들이었다(행4:5-10절). 곧 주의 공의로운 사랑과 능력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을 향하고, 어느 한쪽이 거부면서 다른 곳으로 옮기며, 언제든지 더 필요한 이들에게 부여되고 있음을 온 세상에 알렸다. 동시에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의 주 만은 아니라, 그를 사모하는 온 세상 만민의 주이심을 확인해 주었다. 그 바람에, 그리스도 예수는 서로 다른 양쪽에게 구원과 생명을 이어주는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것이었다(11-12절 참조)  

 

 

☞ 가난하고 세상의 약자들로 지내는 이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은 최고의 축복으로 이어지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 안에 밀고 들어온 하늘 선교란 매체를 통하여, 그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뜨겁고 충만한 구세주 예수의 희년의 은혜와 보상을 가득하게 받는 존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본인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성도들이었지 않았을까-! 한국만큼 전쟁 후 가장 빠른 시기에, 가장 불쌍했던 나라에서 경제대국이 되고 G7에 들만한 선진국의 위치에 도달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과 선교의 열매는 한없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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